소설리스트

〈 116화 〉들개들의 진혼가 (116/162)


  • 〈 116화 〉들개들의 진혼가

    쯔르레이는 적에게 직진하지 않고 옆으로 흘려들었다. 도망을 가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물론 상대가 바보처럼 당해주지는 않을 것을 알았기에 단순히 시도해본 수준이었다. 역시나 적은 쉽게 쯔르레이의 움직임을 차단했다. 쯔르레이가 다시 거리를 벌리자 그는 검집을 벗어던졌다. 무겁게 검집을 낀 채로 싸워서는 쯔르레이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단 걸 알게된 것이다.

    역시나 상대는 듄벨의 기사단, 들개들의 기사. 용병 출신에서 만들어진 기사단이었기에  기풍은 자유롭고 잔혹했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검을 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기에.

    쯔르레이는 다급해졌다. 상대가 자신을 깔보고 있을 때는 일이 그나마 쉬울거라고 생각했지만 적은 곧바로 검을 뽑았다. 물론 당연히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고있지 않겠지만 적어도 확실하게 찍어누르겠다고 생각한 건 분명해보였다.

    하다못해 무기라도 있었더라면! 두고온 솜뭉치가 더더욱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솜뭉치는 없었다. 상대는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은  쯔르레이에게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투항한다면 좀 덜 고통스러울 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자가 아직 투항을 권유하고 있단 것이었다.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적을 앞에 두고 순간 쯔르레이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바닥에는 있었다.

    기사가 버린 검집이.

    생각할 새도 없었다. 쯔르레이는 다시 단검을 든 채로 적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단검을 던지고 달려든 것이 아니었기에 상대는 바로 검을  채로 대응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애초에 적을 공격할 생각이 아니었기에 적의 검을 쉽게 피해냈다. 적은 노련하게도 빗나간 검의 궤도를 돌려 곧장 쯔르레이를 향해 찔러들어갔지만 간발의 차이로 쯔르레이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쯔르레이의 손에는 적이 버렸던 검집이 손에 들려있었다.

    “제정신이냐? 그걸로 나를 상대한다고?”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러나 검집을 손에 쥔 것이 마냥 무기를 얻었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쯔르레이에게 투항의 의사가 아예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어진 그는 바로 쯔르레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집은 생각 외로 튼튼했다. 기사와 검을 맞대고 있는 데도 바로 부서지거나 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쯔르레이 쪽이었다. 명백하게 힘이 부족했다.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적에게 밀려나는 것외에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적의 검을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한발 한발 검믈 맞댈 때 마다 뒷걸음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쯔르레이의 입장에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원래 쯔르레이의 힘이라면 검을 맞대기는커녕 곧바로 튕겨나갈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쯔르레이의 속에서 무언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도 용의 피를 깨달은 것 때문일까? 지금 쯔르레이의 힘을 명백하게 강했다. 단지 그 힘이 기사 수준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었을 뿐.

    적 역시 쯔르레이를 몰아붙이고 있지만 상상하기 힘든 쯔르레이의 힘에 당황한 느낌이었다. 검술 역시 평범한 수준은 아니었고 속도는 자신보다도 빨랐다. 그리고 자신보다는 약했지만 결코 어린아이라고 볼  없는 강력한 힘도 갖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이기고 있는 것은 단지 힘이  세기 때문이란 것이 그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벽 끝까지 몰린 쯔르레이는 양손으로 검집을 든 채로 적의 검을 막고 있었고 슬슬 한계는 다가왔다. 적은 이런 어린아이에게 순간이나마 밀릴 뻔 한거에 대한 불쾌감을 지워내기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단순히 저 손에 들린게 검집이 아니라 멀쩡한 무기기만 하더라도 승패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중이 그의 패착이었다. 검을 맞대고 있던 그가 천천히 쓰러졌다.

    “괘, 괜찮으신가요.”

    깨진 화분을 든 채로 에리히가 물었다. 쯔르레이와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전혀 신경도 쓰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는 에리히가뒤에서 화분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눈치챈 것은 쯔르레이 뿐이었다.

    “…고맙다. 하지만… 위험했는데.”

    “산에서 절 도와줬잖아요. 아무튼 어서 빨리 도망가야….”

    “알아서 하도록 하지. 

    쯔르레이는 감사인사에 더 시간을 끌지 않았다. 헝크러진 가발을 대충 정리하고 곧바로 기사의 손에서 검을 꺼내 들어보았다. 무거웠다. 분명 아까까지 남자와 상대했던 그 힘이라면 들기 어렵지 않을터인데 그 힘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건지 검을 들 수 없었다. 에리히는 그 장면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쯔르레이는 뭐라 꺼낼 말이 없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아까처럼 남자의 검집을 들고 문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티를  시간이 없었다. 쯔르레이는 곧장 바깥으로 나가기 전에 기척을 숨긴 채 별관 문 앞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미 문은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녀석, 왜이리 늦지?”

    “무슨 일이 생긴거 아냐?”

    “어린애 하나라며, 설마….”

    이미 들킨게 확실했다. 쯔르레이는 정문으로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사람이 없는 방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창문을 향해 힘껏 검집을 내리쳤다. 창문이 큰 소리를 내며 깨졌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선 안됐다. 바로 창문 밖으로 나온 쯔르레이는 소리를 듣고 쫓아오는 기사들을 뒤로 하며 움직였다. 목표는 정원 쪽이었다.

    기사들을 따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자신의 몸을 숨기는 것만큼은 자신있었다. 문제는 자신이 창문을 깨고 나온 그 이후로 기사와 병사들이 주변에 쫙 깔린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관대하게 넘어가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마도 약속한 곳으로 나간다 하더라도 자신이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젠장. 쯔르레이가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수색은 길게 이어졌고 정원에 숨은 쯔르레이를 찾은 이는아직 없었다. 쯔르레이는 희망적인 기대를 했다. 이렇게 계속 숨어있다가 자신이 이미 빠져나간 줄 알고 경계가 줄었을 때 도망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늦었다. 정보를 전달해야하는데 경계가 줄었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이미 류나벨트는 죽은 후일 것이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쯔르레이가 그렇게 생각하고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그 순간,

    “읍!”

    무언가가 쯔르레이의 뒷목을 치고 지나갔다. 급소를 타격하는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쯔르레이는 강한 충격에 그대로 나가 떨어져 쓰러졌다.

    뒷목에서 느껴지는 것은 낯익은 고통이었다. 그렇지만 이번에 쯔르레이는 기절하지 않았다.

    “정말 어린애로군.”

    검집 채로 쯔르레이를 공격한 이가 말했다.  목소리는 쯔르레이에게 조금 익숙하게 들려왔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낯익은 상황이었다. 쓰러진 쯔르레이가 고개를 들려 하는 그 순간 쯔르레이를 공격한 이는 쯔르레이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강하게 잡힌 목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저 켁켁 대는 신음소리만이 조금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쯔르레이를 공격한 이는 뒤를 잡은 채로 있어 쯔르레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쯔르레이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남자는 쯔르레이의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않은  그대로 쯔르레이를 들고 정원 밖으로 나섰다. 바깥에는 남자를 기다리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잡으셨군요.”

    “그래. 여깄다.”

    남자는 쯔르레이를 그대로 집어던졌다. 기사는 다행히 요령좋게 기절한 쯔르레이를 받을 수 있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시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곧 찾아뵙는다고 전해드려.”

    “감사합니다.”

    기사는 그대로 쯔르레이를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는 등에 엎어 감옥이 있는 동쪽 별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그 순간 잠깐 쯔르레이의 얼굴이 쯔르레이를 잡은 남자에게 스쳐갔다.

    남자는 순간 낯익은 얼굴을 봤다 싶었지만, 곧 기분 탓으로 넘기고 사라졌다.

    그도 그럴게 머리카락 색깔도 다르지 않은가.

    엘핀은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식사는 어떠한가?”

    “맛있군요.”

    엘핀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르카딘 듄벨은 그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건성인 태도를 알아차렸지만 특별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호탕한 편에 속했고 상대는 영웅인  초월자 엘핀 세이피어스였다. 조금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나쁠 것이 없는 상대였다.

    “하하,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군. 혹시 생활에 불편한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시게. 뭐든 최고의 것으로 준비해드릴 테니.”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마운 일이야. 세이피어스 경 같은 사람이 이런 변방의 영지까지 와서 도움을 주다니.”

    “변방이라고 할 것까지요. 듄벨의 들개들은 울펜슈타인의 검은 늑대들만큼이나 뛰어난 기사단이라고 이름 높지 않습니까.”

    엘핀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의례상 해주는 말인 것도 같았지만 그의 얘기는 분명 사실이었고 엘핀 역시 부정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검은 늑대의 기사단장이 이렇게 말을 해주니 고맙기 그지 없지만… 사실 아무리 그래도 용병업과 기사단말고는 별 볼일 없는 영지임이 분명하니까 말일세.”

    “겸손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 직접 들러서 확인해봤지만 들개들의 실력은 분명한 것이었으니. 다만….”

    “호오? 다만?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구만 그래.”

    “뛰어난 리더의 부재는 조금 아쉽군요.”

    엘핀의 말은 자칫해서는 시비를 거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얘기의 내용이었다.  말은 즉슨 현 들개들의 기사단장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아르카딘은 되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과연… 그런 사실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로군. 그래.  동생 아마티코는 뛰어난 검사지만 기사단장 노릇을 하기에는 조금 안맞는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네. 그 녀석은 야심이 너무 많아서 기사단장 일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아.”

    “저야 그런 사정까지야 알  없습니다만, 실력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기사단의 관리를 제대로 할  있는 이에게 기사단을 맡기는  더 낫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래그래, 새겨듣도록 하겠네.”

    엘핀이 지적한 이야기는 아르카딘 역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것이 외부인의 지적에 걸린 것은 뼈아픈 이야기였으나 상대가 엘핀이어서야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적당한 핑곗거리를 쥐어준 셈이니 고맙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시점에서 아르카딘은 엘핀이 지적한 기사단의 ‘관리’가 자신이 뜻하는 것과 정반대의 의미로 얘기되어졌음을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식사가 다 끝날 때가 되어서야 아르카딘은 정말로 묻고 싶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그것은 엘프 류나벨트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리를 일어서려는 엘핀을 붙잡고 아르카딘이 입을 열었다.

    “한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만….”

    “무엇입니까?”

    “분명 전에 경께서 말하셨지. 그 엘프가 흑마법사가 분명하다고. 나로서는 솔직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야. 엘프가 흑마법사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들은 흑마법과 가장 떨어진 종족이 아니었나? 무엇보다 그 엘프는 수십년간 이 곳에서 살면서 아무런 문제도 일으킨 적이 없다네. 내 아들도 그녀와 자주 교제하곤 했고.”

    “저야 엘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이 없으니 쉽게 그것에 대해 입을 놀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한가지 있습니다.”

    엘핀 세이피어스는 그 순간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얼굴은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 흑마법사의 초월자였다.

    “제 초월자로서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리죠. 그 엘프는 흑마법사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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