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5화 〉들개들의 진혼가 (115/162)


  • 〈 115화 〉들개들의 진혼가

    “우리 또래 애? 메이드?”

    “아니, 아니. 아마도 귀족?”

    “내가 그쪽으로 빨랫감을 받아온 적이 있는데 남자애 옷이 있더라고.”

    메이드들의 말에 쯔르레이가 귀를 기울였다. 귀족? 남자애? 에리히를 납치해서 데려갔다면 적어도 감옥에 데려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 에리히는 듄벨의 피를 잇고 있으니까. 희생양으로 쓰려고 해도 감옥에 가둬두어서는 모양새가 살지 않는다.

    “어디 다른 가문 귀족 도련님이 마실이라도 나왔나?”

    “이런 촌구석 영지에?”

    “하긴 이런 촌구석에 뭐 볼 있다고 내려와. 그럼 누구지?”

    “글쎄, 뭐든 간에 잘생겼으면 좋겠다. 어쩌다 나랑 마주쳐서 딱! 운명의 로맨스를 시작하는 것도나쁘지 않겠지.”

    “실비아, 너는 쟤처럼 되지 마라.”

    “네, 네엣.”

    하지만 쯔르레이에게는 아쉽게도 메이드들에게서 유용한 대화는 거기까지 였다. 그녀들의 대화 주제는 수수께끼의 귀족 도련님에서 자신들이 쓰는 싸구려 화장품등으로 넘어갔고 그런 주제는 쯔르레이로서는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빨랫감들을 모두 나르고 돌아가는 시점에 되어서 쯔르레이는 조용히 메이드들에서 벗어나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그 사이에도 메이드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르틴 의상실에서 일하는 애가 얘기해준건데 이건 확실한 정보라니까?”

    “에효, 말을 말아야지. 어라, 잠깐 실비아는 어디 갔어?”

    “그러게…. 길이라도 잃어버린 거 아니야? 설마 이 작은 구석에서?”

    “우리에도 전에는 자주 잃어버렸잖아.”

    “어디 다른  일이라도 하러갔나? 메이드장님에게물어보러갈까?”

    “됐어. 괜히 긁어부스럼이지. 알아서 어련히 잘하겠어. 그 아줌마 성격상 경을 칠텐데 그냥 신경 끄자고.”

    “그치만….”

    “자 일하자, 일!”

    ~

    서쪽 별관은 동쪽 별관만큼이나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쪽 별관의 반대쪽으로만 가면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곳도 몇 명의 기사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 별관만큼 삼엄하진 않았다. 실제로 몇몇 메이드들도 드나들고 있었으니.

    쯔르레이는 어떻게 저 곳으로 들어갈  있을지 고민했다.  정도의 경계라면 생각보다 단순한 방법으로 뚫을  있지 않을까. 메이드들의 뒤를 따라가는 척 해볼까? 아니다. 들킨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되는 방법이다. 밤이었다면 동쪽 별관에서처럼 기사들이 교대하는 틈을 노릴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아침이 밝은 지금은 무리였다.

    어쩔  없나.

     명의 메이드가 기사들과 짧게 목례를 한  문을 열고 들어갈  였다.

    “저, 저기.”

    쯔르레이가 기사들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냐.”

    “저, 저는 얼마 전에 처음 이곳에  메이드인데….”

    “네가 메이드인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수 있다. 무슨 일이지?”

    “메, 메이드장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길을 잃어서… 여기가 서쪽 별관이 마, 맞나요?”

    쯔르레이는 꽤나 훌륭한 배우였다. 아주 조금 말을 더듬으면서 연기를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어리고 심약한 메이드로 보였다. 물론 그건 연기력이 좋아서라기보단 모습이 그만큼 가냘프기 때문이었지만.

     모습이 기사들에게도 꽤나 가녀리게 다가왔는지 퉁명스럽게 대꾸하던 기사는 조금이나마 말씨를 고쳤다.

    “…그래, 무슨 심부름이니?”

    “아, 안에 계신 에리히 도련님께 이걸 전달해드리라고….”

    쯔르레이가 보여준 것은 하나의 편지 봉투였다. 당연하지만 안에는 아무런 편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 도박이었다.만약 에리히가 제대로 갇혀있는 거라면 당연히 이런 수작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격하게 반응한다면 이 장소에 에리히가 존재하는 것이 맞을 테니 그대로 도망을 가면 되는 것이고 만약 그대로 들여보내준다면 그 또한 문제가 없는 일인 것이다.

    다행히도 쯔르레이의 도박은 먹혀들었다.

    “그런 이름이었나? 흠… 좋다. 들어가도록. 도련님의 방은 제일 안쪽 왼편에 있으니 기억하도록.”

    심지어 친절한 기사는 쯔르레이에게 에리히의 방 위치까지 알려주었다. 쯔르레이의 연기가 그만큼 효과적이었나보다. 쯔르레이는 감사인사를 하며 별관 안쪽으로 진입했다.

    쯔르레이는 곧장 기사가 말해준 곳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왼쪽 문 앞에서 똑똑하고 노크를 했다.

    “…누구시죠?”

    “메이드입니다. 심부름 차 찾아왔습니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안에는 그때 설산에서 만났던 하얀 소년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소년은 어울리지 않는 귀족적인 옷을 입고 있었으며 수심에 빠진 모양새였다.

    “무슨 용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알아서 하고 나가세요.”

    “오랜만이군.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버지를 닮았어.”

     말에 에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며 쯔르레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쯔르레이가 가발을 벗어 그 길고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들어냈다. 이제는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에리히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떨어트렸다.

    “벨투리안씨…?”

    “그래.”

    쯔르레이는 간만에 불리는 그 이름에 꽤나 기분이 좋아졌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자신은 최근에 항상 쯔르레이로 불려왔으니까. 그러나 자신의 본래 이름이란 것은 이토록 감미로운 것이었다.

    “어떻게 이 곳을?”

    “네 아버지에게 부탁을 받았다.”

    실제로 부탁한 것은 쯔르레이였지만 적당히 둘러대었다. 쯔르레이는 대화를 오래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 에리히가 있는 곳을 확인했으니 이제 돌아가서 정보를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가 곧장 쯔르레이에게 달려들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무사하신가요?”

    “아레히는 무사하다. 얄미울 정도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아버지의 무사를 확인 받은 에리히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쯔르레이는 그런 에리히에게 안도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곧바로 물었다.

    “내일 바깥에서 처형식이 이뤄지는 것은 알고 있나?”

    “처형식이요? 아뇨, 여기서는 저한테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혼자 탈출해보려고도 해봤지만… 무리였어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군. 아무튼 내가 붙잡히지 않는다면 오늘 밤, 아레히와 다른 용병들이 너를 구하러 올거다. 미리 준비하고 있어라.”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기쁜 소식일거다. 그러나 에리히의 얼굴은 여전히 수심이 가득찬 상태였다. 되려 절대 들어서는 안될 소식을 들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에리히는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뇨. 저는나가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무슨 소리지, 그건?”

    “듄벨의 들개들에 대해서 제가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왕국에서 가장 잔인하고 끈질긴 추적자들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대로 도망친다면 그들의 추적이 저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분들, 그리고 벨투리안씨에게까지 이를테고 저희는 평생 도망치며 살아야겠죠. 그럴 바엔 제가 도망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헛소리로군.”

    “헛소리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 때문에  모든 이들이 희생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말은 틀렸어. 첫째, 나는 널 구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둘째, 네가 쫓기든 말든 탈출하든 말든 그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돌아가서 그들에게 정보를 전해주면 끝이고 너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도망치지 않겠다는 헛소리를 할거면 나중에 그들이 오면 하던가 해라. 나는 관심 없으니.”

    쯔르레이의 무관심한 말에 에리히는 당황했다. 그가 이렇게 매몰찬 사람이었던가? 에리히는 자신을 구해준벨투리안에게 꽤나 좋은 첫인상과 호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것이라 믿은 것이다.그러나 쯔르레이에게는 지금 그러할 여유는 없었다. 쯔르레이는 오직 류나벨트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었고 에리히는 정말로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하지.  오래시간을 끌면 기사들이 의심할거다.”

    “잠시만요…! 얘기를…!”

    그러나 쯔르레이가 에리히와  얘기할 시간은 없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고 보는게 맞았다. 쯔르레이가 다시금 가발을 쓰고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 쯔르레이를 향해 무언가 둔탁한 공격이 날아왔으니까.

    간발에 차로 쯔르레이는 공격을 피하고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도 상대는 곧바로 공격을이어오지 않았다. 그는 바로 아까 전의  친절했던 기사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린 채 쯔르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요 앙큼한 것 같으니. 감히 날 속여?”

    “그만두세요! 어린 아이에게 무슨 짓입니까?!”

    “하, 가문의 사생아신 분께서는 잘모르시겠지만, 기어들어온 쥐새끼는 확실하게 처리해야하는 법입니다. 아하, 혹시 바깥에서 기르던 쥐였나요? 그거 아쉽게 됐군요.”

    에리히가 기사를 말려보려했지만 당연하게도 에리히의 가문내의 지위는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기사가 말을 들을리 만무했다. 쯔르레이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런 단검 하나만을 가진 채로 무장한 기사와 싸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를 봐서 도망가야겠다. 들켰다는 시점에서이미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자신이 잡힌다면 그보다 더 문제가 꼬이게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란 것은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깔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린 아이에게 무장한 기사가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실로 지당한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상대는 검조차 꺼내지 않고 검집채로 쯔르레이를 후려치려 한 것이겠지. 물론 생포하기 위해서 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나 쯔르레이는 평범한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쯔르레이가 곧장 단검을 적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하나의 단검을  꺼내 달려들었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기에 단검을 쳐내고 검을 치켜세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