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들개들의 진혼가
류나가 일부러 잡혔을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그 백작의 아들놈이 무슨 수를 쓴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류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비겁한 수를 썼을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당장 계속해서 혼자 고민해봐야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현실적으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했다.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혼자서 고민하고 쳐들어가봐야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도와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생각이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결코 도움 받고 싶지 않은 그 놈, 결코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 사람. 한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그리고 자신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맹세한 녀석. 그 위선자.
그러나 지금, 이제와서 그런 걸 신경 쓸 여지는 없었다. 쯔르레이는 뒷골목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사정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해야만 했다.
“내가 왔다.”
나와라, 아레히.
~
“뭐야, 쯔르레이? 돌아왔다고?”
쯔르레이가 술집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실비아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논의하고 있던 실비아는 쯔르레이를 보자마자 당황해서 소리쳤다.
“쯔르레이라고? 그 꼬맹이?”
“무슨 일이야?”
술집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며칠전 고집을 부려 떠난 그 꼬마가 갑자기 돌아왔으니 그럴만도 했다. 쯔르레이는 후드를 벗어재끼며 구석에 서있던 마틴에게 다가갔다. 마틴은 한껏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쯔르레이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아레히, 어딨지?”
“쯔르레이양, 무슨 일 때매 돌아온 건지는 몰라도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쳐서 아레히씨를 찾으셔도….”
“닥쳐. 나는 지금 바쁘다. 시간이 없어. 당장 아레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다소 험한 말에 마틴의 얼굴이 찌푸러졌지만 입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기분이 나쁘다고 한든 이런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봐야 자기 꼴만 우습다는 걸 알고 있는건지, 아니면 애초에 쯔르레이의 성격이 원래 이런 것을 파악한건지. 한숨을 좀 쉰 마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아레히씨는 지금 출타 중입니다.”
“언제 돌아오지? 나는 지금 한 순간의 여유도 존재하지 않아.”
“금방 올 겁, 아 기다릴 필요는 없겠군요.”
마틴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술집의 문이 열렸다. 아레히가 등장했다. 아레히는 곧바로 금발 머리의 쯔르레이를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쯔르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너… 왜 이곳에? 무슨 일이 생긴거냐? 괜찮은거냐?”
“아레히, 약속을 지켜라.”
네 목숨을 가지러 왔다.
“뭐라고…?”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지.”
아레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짜고짜 2층의 빈방을 향해 올라가는 쯔르레이를 토하나 달지 않고 따라갔다. 주변에서 용병들의 혀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리더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일까.
“그래서 어떻게 된 일이지? 왜 갑자기 돌아온거지?”
아레히가 방에 들어와 문을 닫으며 물었다. 쯔르레이는 잠깐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아레히의 당황은 아랑곳하지 않고.
“기뻐해라, 네 말, 네 위선, 나의 증오, 그 모든 것을 증명할 시간이 되었다. 네 목숨, 나에게 맡긴다는 그 맹약, 며칠만에 잊어버렸다고 하지 않겠지. 그걸 받으러 왔다. 이틀 뒤, 류나벨트, 흑마법사 엘프의 처형식이 열린다고 들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
“아… 그래, 사실이다. 분명 그런 이름이었던거 같군. 이 주변 숲에서 혼자 살고 있던 엘프인데 갑자기 잡혀서 처형식을 연다고 했다. 흑마법사라는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구하는 게 나의 목적이다. 협력해라.”
“그녀를…?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너에게 질문은 허락하지 않았다. 너는 그저 맹약대로 약속을 지키면 될 뿐이야. 아니면 그 잘난 맹약도 위선일 뿐이었나?”
쯔르레이의 비꼼이 아레히의 가슴을 할퀴고 들어갔다. 쯔르레이는 이성적으로는 지금 도움을 구하는 상황에서 아레히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를 앞에 두니 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레히는 거스를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나….”
“계획?”
“에리히는 지금 백작가에 감옥에 갇혀있을 것이다. 우리는 처형식의 틈에 맞춰서 잠입해 에리히를 구하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엘프를 구해야 한다면… 찢어질 수밖에 없다.”
아레히는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러나 끝내 답을 내지는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안돼, 이 방법으론 양쪽 다 실패할 뿐이야.”
“…그래서 어쩌란거지? 넌 약속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단거지. 좀 기다려봐라.”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아레히가 밖으로 나갔다. 쯔르레이 역시 따라나서려 했지만 아레히가 제지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쯔르레이에게 아레히가 말했다.
“네가 끼어봐야 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을 거다. 미안하지만 여기 있어줘야겠다.”
“하, 웃기지도 않아.”
그렇지만 쯔르레이는 아레히의 말을 따랐다. 끼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용병들에게 자신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설사 이미지가 좋았다 하더라도 이런 어린 아이를 끼워줄지도 알 수 없었고.
방 안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은 꽤나 고역인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초조했다. 남은 시간은 오늘과 내일 단 이틀이었다. 그나마도 오늘은 이미 점심이 지난 후였다. 어떻게든 시간 안에 류나벨트를 구해야했다. 그런 상황에서 가만히 용병들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강한 스트레스를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용병들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벌써 바깥이 조금 어두워질 징조를 보일 때가 되었다. 쯔르레이의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가 되어서야 문이 열리고 아레히가 들어섰다.
“늦어!”
“미안하다. 좀처럼 의견 확립이 안되서… 어떻게든 도움을 얻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문제라면, 어떻게 그들을 구출할지인데….”
“그 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작전 하나도 못짠거냐?”
“아니, 몇가지 생각해둔 것은 있다. 다만….”
아레히는 주저하는 태를 보였다. 안그래도 초조함 때문에 짜증이 나있던 쯔르레이가 답답해서 외쳤다.
“말해!”
“우리는 단적으로 말해서 어디에 네가 말한 엘프와 에리히가 갇혀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원래 계획으로는 엘프의 처형식 때 단체로 숨어들어가서 에리히를 찾을 생각이었지만 구할 사람이 둘로 늘면 위험성도 시간도 두배로 걸린다. 우리에겐 정보가 부족해.”
“그래서? 뭔가 작전이 있다면 생각한게 있을거 아니냐.”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말해.”
“너를 잠입시켜서 그 둘이 갇힌 곳을 알아내게 하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쯔르레이는 잠시 침묵했다. 말도 안되는 작전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쯔르레이는 되려 반색을 하며 말했다.
“응하도록 하지.”
“뭐?”
“응한다고 했다. 오히려 좋은 생각이로군. 나라면 상대가 초월자가 아닌 이상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몸집이 작고 이런 외모라면 붙잡혀도 곧바로 죽이지는 않겠지. 꽤 쓸만한 생각이다.”
“바보냐?! 붙잡힌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어. 어린애라고 봐주는 놈들이 아니란 말이다.”
“그럼 다른 방법이 뭐가 있지?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 따르겠다.”
아레히는 반박할 수 없었다. 확실히 효율만 따지고 본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니. 그래서 아레히는 다른 방법으로 쯔르레이를 말리려고 했다.
“…초월자가 아니라면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고? 네 말대로라면 잠입은 불가능해. 지금 성 내에는 어린 초월자 엘핀 세이피어스가 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게 사실이라면 너는 금방 붙잡히게 될거야.”
쯔르레이는 순간 나온 낯익은 이름에 놀랐지만 곧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조금떨렸지만 아레히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더더욱 내가 가야겠군. 그와는 조금, 안면이 있다.”
물론 단순히 안면이 있다고 말할 정도가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배신한 사람이니까. 다시 그를 보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어떻게… 그런.”
“알 필요 없다. 하지만 그럼 확실해졌군. 잠입은 언제 하는거지?”
“…오늘 밤이다.”
쯔르레이의 잠입 준비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실비아가 준비해준 메이드복을 입고 가발을 뒤집어썼다. 기본적으로 잠입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행해져야겠지만 만약 들킨다면 최소한의 변명이라도 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제라면 쯔르레이의 외모가 너무 튀는 것이었다. 흔한 갈색 머리의 가발을 뒤집어 썼음에도 그 미모가 쉽게 가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실비아는 약간의 화장을 통해서 그 미모를 가리고 조금 예쁘장한 정도의 아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메이드복과 갈색 머리를 보자 어쩔 수 없이 과거 함께 다녔던 세르미나카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이런 거로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만.
“변명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절대 들키지 않는게 상수일거다. 조심하라고.”
“무기는 반입할 수 없나?”
“아무래도 무리겠지, 그건. 네 칼은 너무 커서 눈에 띄어. 품에 작은 단검 정도는 숨겨갈 수 있겠지만.”
“그거면 됐다.”
사실은 되지 않았다. 솜뭉치가 없다면 쯔르레이는 여전히 작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 들키더라도 무기가 있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테고. 하지만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였다. 무엇보다 성 안에는 엘핀이 있다. 아레히에게는 안면이 있으니 괜찮다고 밀어붙였지만 쯔르레이는 이번 잠입에서 절대 엘핀을 만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솜뭉치를 들고 간다면 단숨에 자신임을 들킬 것이다.
들고가지 않는다고 해서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