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7화 〉들개들의 진혼가 (107/162)



〈 107화 〉들개들의 진혼가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 아레히가 힘으로 막는다면 무기도 사태는 꽤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야기가 잘풀린게 다행이었다. 별로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지만, 어쨌든 곳에서 나갈 방법을 거부할 생각까진 없었다.

“실비아와 마틴을 붙여줄 테니 문까지 같이 가도록 해라.”

쯔르레이도 그것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잠깐, 내  없이는 못간다. 곤란해.”

“네 짐이라면 아까 마틴을 시켜서 이곳으로 가져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솜뭉치는?”

“솜뭉치?”

“내 칼이다. 침대 밑에 숨겨놨는데. 내 손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거다.”

“…다시 들러야겠군,  여관으로.”

아레히는 칼에 대해서 묻지 않았다. 뭔가  수 없는 힘을 가진 칼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걸 묻기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대답해줄리도 없었고 아레히 또한 그걸 알았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아레히는 바깥으로 나가 마틴을 불렀고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들을 말해주었다. 마틴은 흔쾌히 아레히의 부탁을 수락했다. 쯔르레이는 그대로 마틴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섰다. 여관까지 가는 길에 마틴은 침묵이 어색했는지 이래저래 말을 걸어왔다.

“음… 아까는 상황이 그렇다보니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지만, 우리 구면이지?”

“…기억하고 있다.”

“아가씨, 벨투리안씨의 딸이라고 했지? 아레히씨의 형제나 다름 없다는….”

“그와는 형제도 친구도 아니다.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아 그래, 미안하다.”

쯔르레이의 정색에 마틴은 곧바로 사과했다. 사정을 모르는 마틴의 입장에서야 당황스러운 이야기긴 했다. 다만 지나치게 까칠한 쯔르레이의 태도는 성격이 여러모로 다정한 마틴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용병이었으면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마틴을 보낸 것이기도 하겠지만.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니?”

“미련한 사람.”

마틴은 용기있게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고, 다시금 말을 이어가기도 어려운 대답이었다. 마틴도 원체 수다적인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상대가 이런 태도여서야, 쉽사리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결국 마틴은 입을 닫았다.

반면 쯔르레이는 본인이 자신도 모르게 곧바로 내뱉은 대답을 곱씹고 있었다. 미련한 사람. 그런가? 자신은 미련한 사람이었나? 그러나 떠오른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은 미련했다. 그래. 이상하리만치 짜증이 났다.

두 사람의 침묵 속에서 마틴과 쯔르레이는 곧 여관에 도착했다. 타이밍 좋게도 여관 주인은 카운터에서 곁잠을 자고 있었고 쯔르레이는 곧바로 방으로 올라가 솜뭉치를 꺼내왔다. 등 뒤에 거대한 대검을 매고 나서야 쯔르레이는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실비아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거다. 북쪽의 문을 통해 나가면 될거야.”

“그래.”

그 뒤로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쯔르레이는 후드를 눌러쓰고 마틴이 가는 길을 따라갔다. 밤이 깜깜해 길이 어두웠지만 마틴이 지닌 횃불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물론 쯔르레이에게는 더 이상 이 정도의 어둠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쉿.”

갑자기 마틴이 멈춰섰다. 마틴은 골목길 쪽으로 쯔르레이와 같이 숨어들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죄인을 호송하는 마차를 끌고 가고 있었다. 이런 어두운 시간에 이동하는 것이 수상한 눈치였다.

“누구지…? 설마 벌써…?”

마틴의 복잡한 얼굴이 보였지만 쯔르레이는 무시했다. 저게 무슨 일이건, 아레히의 일과 어떤 관련이 있건 간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둘은 조용히 골목에 숨어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가자.”

조용히 쯔르레이가 마틴의 뒤를 따랐다.

북쪽 문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문을 지켜야할 경비병들은 없고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을 발견하자마자 실비아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은거야? 시간이 없어 빨리 나가자고.”

“미안, 일이 있었다.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나는 먼저 돌아가야겠어.”

“뭐? 나 혼자 이 꼬맹이 데려가라고?”

“급한 일이 생겼다. 먼저 가지.”

마틴은 아까 본 병사들에 대한  때문일까 쉴 틈도 없이 금세 자리를 비웠다. 결국 실비아와 쯔르레이 단 둘만이 남았다. 실비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쯔르레이를 인도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오는 길에 병사들과 마주쳤다. 죄인을 호송하고 있던 모양이더군.”

“죄인…? 설마.”

실비아 역시 생각할 것이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묻지 않았다. 얘기를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더는 관여할 생각이 없었으니 알 필요도 없었다. 둘은문을 빠져나갔다.

“네가 잡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까. 며칠 간은 같이 행동하라고 얘기 들었어. 물론 나는 딱히 그러고 싶진 않지만….”

“나 또한 그렇다. 굳이 같이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미안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내 맘대로 너를 보내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이대로 돌아갔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알 수 없다고.”

실비아는 확실히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뜻을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생각을 바꿀 여지라도 보였으면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비아는 완고했다. 쯔르레이 역시 괜한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가 따라오는 걸 허락했다.

벨루나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

날이 밝았다. 실비아와 쯔르레이는 밤새 한 숨도 자지 않은 채 걷고 또 걸었다. 최대한 벨루나와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는 할 수 없었다. 실비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전혀 힘든 티를 내지 않는 쯔르레이에게 조금 놀란  했다.

강행군은 날이 밝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추격당하고 있다는 낌새는 느끼지 못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사이에 두 사람에게는 거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실비아는 입을 굳이 가만히 닫고 있는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이미 자신과 한번 싸운 적 있는 어린애일뿐더러, 상황도 상황이니만큼 수다를 떨 생각이 없었고 쯔르레이는 애당초 과묵한 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길을 물어보는 정도의 대화만이 오갔을 뿐이었다.

“잠깐.”

그리고 길 얘기가 아닌 것으로 입이 열린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쯔르레이가 이상을 감지하고 실비아에게 얘기한 것이었다. 하품을 하던 실비아가 그 말에 쯔르레이를 보았다.

“누군가 오고 있다.”

“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추격은 아니다. 반대쪽에서 오고 있어. 꽤나 많다. 말을 타고 있군. 하지만 누군가와 마주친다고 해도 좋을 것 없으니 빗겨가도록 하지.”

“뭐? 그게 사실이야? 어떻게 아는 건데.”
“느껴진다.”

쯔르레이는 더는 설명하지 않고 길을 비틀었다. 실비아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했지만 말하지 않고 그냥 쯔르레이를 따라가기로 했다. 조금 빗겨간다고 해서 일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으니.

쯔르레이가 길을 빗겨가자 얼마 후 정말로 쯔르레이가 가던 쪽에서 말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길은 갈려서 쯔르레이는 그들이 누군지 볼 수 없었지만 확실히 쯔르레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알  있었다.

“정말이잖아? 대체 어떻게 알아챈거야?”

“그냥.”

원체 수다적인 실비아는 이 신기한 상황에 대해 이래저래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해도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더는 답하지 않았고 결국 실비아도 다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쯔르레이의 마음 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어쩐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지? 생각은 의외로 금방 떠올랐다. 그랬다. 콜테르에 들리기 전에 엘핀을 만났을 때였다. 그때도 이렇게 숨어서 말을 끄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말을 끄는 이들이 자신을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알  있었다. 그들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쯔르레이는 어쩐지 그들사이에 엘핀 세이피어스, 그가 있을  같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예지의 영역이었다. 쯔르레이는 어째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수 없었다. 그들의 얼굴 조차 하나 수 없는데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단 말인가.

어찌되었건 간에 그들 사이에 엘핀이 있던 없던 그건 더 이상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은 도망쳤고 더는 이제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그럴 일이 생겨서는 안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쯔르레이는 애써 고개를 돌려 다시금 길을 걸었다.

하루를 꼬박 더 걸어서 벨루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실비아가 말했다.

“어이, 여기서 쉬다가 헤어지자고. 아마도 추격은 다행히 없는 거 같다. 안심해도 될 것 같군.”

그러나 쯔르레이는 실비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쯔르레이는 지금 전혀 피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거리 때문인지 몸 상태가 편하진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또렷하여 쉴 필요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곧바로 헤어지도록 하지. 나는 가겠다.”

“진심이냐? 넌 지금 이틀   숨도 못잤다고. 나야 이런 일이 일상다반사라지만.”

“신경쓰지 않아도 좋다.”

실비아는 조금 고민하는 듯 했다. 아마 이미 늦었겠지만 누군가, 아마 기사로 추정되는 이들이 벨루나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정보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도 빨리 헤어지고 돌아가는 것을 원했다. 그렇지만 바로 그러자고 하기에는 한숨도 자지 않은 쯔르레이가 조금 걱정되었다. 어디까지나 조금.

“나야 그럼 좋다만, 정말로 괜찮은거 맞아? 어린 애가 잠 안자면 키 안큰다. 아마 추격은 없을 테니 괜찮겠지만….”

“상관없다.”

“…그럼 먼저 갈게. 미안.”

“안녕.”

결국 쯔르레이의 강한 요청에 실비아는 쯔르레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뭐 어떡하겠는가. 저런 괴물 같은 칼을 들고다니는 애인데 걱정하는 것도 이상했다. 실비아는 곧바로 등을 돌려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명색이 용병이란 말은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실비아는 금세 쯔르레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