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6화 〉들개들의 진혼가 (106/162)



〈 106화 〉들개들의 진혼가

상황을 수습한 것은 마틴이었다. 마틴은 당장 아이를 잡아 아레히의 몸에서 떼어냈고 아레히가 일어날  있도록 도왔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레히는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쯔르레이에게 맞아 조금 부은 얼굴을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아레히는 다른 용병들의 물음에도 일절 대답하지 않은  방을 나갔고 다른 용병들도 대부분 따라나갔다. 남은 것은 마틴과 실비아 뿐이었다. 마틴은 실비아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결국 엉엉 울고 있는 쯔르레이를 달래는 것은실비아의 몫이 되었다. 유일한 여자라는 다분히 성차별적인 이유였지만 실비아도 차마 어쩔  없었다. 실비아는 울다 못해 탈진하기 직전인 쯔르레이를 안아들고 침대에 앉히고는 마틴을 욕했다.

“아아, 제길 애 돌보는 일 같은 건 완전 젬병인데…. 차라리 지가  것이지.”

쯔르레이의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런 모습이 되어서 눈물을 흘린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펑펑 흘린 것은 처음이었다. 평소의 쯔르레이였다면 부끄러워서라도 억지로 눈물을 멈췄겠지만 그 동안 쌓인 억하심정이 폭발하기라도 한 걸까, 쯔르레이 스스로의 의지로는 이미 멈출  없었다.

“저, 그만 울어봐 좀. 무슨 일이 있어? 저 아저씨가  몸이라도 만지든?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 아무튼 간에 진정해봐 좀. 아까 일이라면 내가 사과할 테니까….”

실비아는 필사적으로 쯔르레이를 달래보려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역효과라고 해도 무방했다. 쯔르레이는 더욱 필사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건 숫제 비명에 가까웠다. 서럽디 서러운 그 눈물에 실비아까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아악, 모르겠다. 젠장. 나도 울고 싶네.”

결국 실비아는 쯔르레이의 눈물을 멈추는 것을 포기했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결국 탈진해버린 쯔르레이는 눈물을 멈추고 그대로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실비아가 쓰러진 쯔르레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중얼거렸다.

“나는 애 낳지 말아야지….”

남은 것은 실비아의 한탄 뿐이었다.

~

잠에서 깨어난 쯔르레이를 반긴 것은 이미 반나절이 지나 하늘에 떠오른 달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떠오른 것은 자신이 부린 추태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운 일은, 평소였다면 부끄럽다 못해 수치스럽게 느껴질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이미 식어버린 차가운 분노 뿐이었다.

아레히의 기만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다고 생각했던 분노를 다시금 타오르게 하였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전에 식어버린 불꽃은 한 순간 열화와 같이 타올랐으나 눈물 속에 삼켜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더는 화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가치도 느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은 지금이라도 자신에게 칼이 있다면 그에게 다시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지금 그를 죽인다면(죽일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자신이 이들에게서 살아나갈 수 있을거란 보장도 없었으며 여러 가지 문제만 잔뜩 생기게 된다. 당장의 어리석은 짓은 삼가야했다.

상념에 사로잡힌 쯔르레이를 일깨운 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실비아였다. 실비아는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는 쯔르레이를 보며 말을 걸었다.

“어, 뭐야. 일어났구나, 너.”

쯔르레이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고 뭐라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실비아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쯔르레이는 무시했지만.

“진정했냐? 대체 왜 그렇게 서럽게 운거야? 그 아저씨가 진짜 몸이라도 만졌어?”

“….”

“젠장, 말 한 마디라도 해줘라. 그러다가 그 아저씨 진짜 이상한 취급이라도 받을 거라고. 아, 이건 저녁밥. 깨어나면 먹으라고 갖다준건데 지금 먹으면 되겠다.”

“….”

“진짜 귀염성 하나 없는 애네. 얼굴값이라도  해라….”

“아레히.”

“응?”

“아레히를 불러와.”

~

실비아는  사람을 놔두고 가면서도 못내 불안한지 계속 뒤를 힐끔거렸다. 그렇지만 결국 문은 닫혔고 방 안에 남은 것은 두 사람 뿐이었다. 아레히와 쯔르레이, 아니 아레히와 벨투리안 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멍청한 놈이다. 내가 하루가 지나면 모습이 변한다고 예전에 얘기해뒀을텐데. 내가 변할지도 모르는데 이곳에 냅둬?”

“여관에 머물고 있는 금발 머리의 어린 여자애가 있다는 소문은 여기서도 듣고 있었다…. 그게 너인지는 몰랐지만. 그게 너라면 적어도 지금 모종의 사태로 원래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뒀다.”

아레히의 추리는 정확했다. 쯔르레이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말에 부정하지는 않았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에는 침묵 뿐이었다. 서로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쯔르레이는 싫어서였고, 아레히는 각오가 없어서였다.

오랜 시간이지나서였다. 어쩌면, 단순히 그렇게 느꼈을 뿐일 수도 있겠다. 결국 먼저 말문을  것은 쯔르레이였다.

“돌아가겠다.”

“안돼.”

아레히에게서 바로 대답이 나왔다.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레히의 단호한 거절에 쯔르레이는 다시금 치솟아 오르는 화를 참고 물었다.

“왜지?”

“너도 어느 정도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지금 위험한 일을 하고 있고, 듄벨 가와 척을 지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와 접촉한 네가 혼자 나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아레히의 대답은 쯔르레이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시간은 한참이나 지체되었는데 또다시 이곳에서 강제로 머물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컸다. 게다가 달거리때문에 지금 당분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상황이지만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없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인 것이다. 어쩌면 다시금 자해하여 이 모습으로 있어야 할지도 모르고.

“나는 시간이 없어.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떠야 한다. 안그래도 발이 묶였는데 네 사정 따윈 알 바 아니다.”

“내 사정 때문이 아니야.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나. 널 위해서 하는 이야기다. 모습이 바뀌는 거라면 어떻게든 숨길  있게 해줄 테니 지금은 이곳에 있어 줘. 목숨이 걸린 이야기다.”

“하, 대체 무슨 일 때문에….”

듄벨가와 척을 졌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미 짐작하고도 남은 것이다. 아레히는 결코 듄벨과 친해지기 어려운 몸이었다. 듄벨의 고명딸을 임신시키고 쫓겨나게 한 장본인이었으니.

 후에 아레히의탈주를 도운 것이 바로 자신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나시아 듄벨, 아레히의 아내는 이미 죽었고 그를 내쫓은 전 듄벨 백작도 지금은 죽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듄벨가와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켰단 말인가? 그에 대한 아레히의 대답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에리히가 잡혀갔다.”

그 말을 꺼내는 아레히의 얼굴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

“네가 듄벨의 주인이 죽었다고 말한 뒤로 조사했다.  말대로 전 듄벨 백작께서 죽었더군.”

아레히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더는 쫓기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오산이었다.”

아레히가 내쉬는 깊은 한숨과 쓰디쓴 회한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벨투리안은 본 적이 없었던. 더는 친구라고 여기지 않는 존재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모습은 과거와의 괴리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

“현 듄벨 백작은 전 듄벨 백작의 장남 아르카딘 듄벨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들, 알바디엔 듄벨이 있지.”

“그들이 에리히를 잡아간 이들이란 건가?”

쯔르레이의 물음에 아레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에리히를 잡아간 건 현 듄벨 백작 아르카딘 듄벨의 동생, 아마티코 듄벨이다.”

“어째서?”

“그는 백작 자리를 노리고 있다. 형과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은 듯 하고.”

“백작 자리를 노리는데 왜 에리히가 필요하지? 같은 백작의 피를 이은 자가 더 많아지면 오히려 그에게 불리한 것 아닌가?”

“희생양이다. 알바디엔 듄벨과 아르카딘 듄벨을 죽이고  범인으로 에리히를 몰아넣는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남는 것은 자기 자신 밖에 없으니.”

복잡한 정치극이었다. 평생을 이런 것과 연관이 없게 살아온 쯔르레이에게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직위때문에 형제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아마도 아레히가 말한 내용 또한 꽤나 간추린 것일테지만쯔르레이에게는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아레히 또한 반박하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아레히가 긍정했다.

“그렇지, 너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너는 그저 내 사정에 휩쓸린 불쌍한 피해자일 뿐이지.”

그 말은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현재의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 그러나 쯔르레이는 그 의미를 무시했다. 대응하지 않았다. 쯔르레이에게 아레히의 이야기는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울림으로 들릴 뿐이었다.

대신 쯔르레이는 다시금 주장했다.

“네 말대로 해줄 수는 없다. 나는 떠나겠어.”

“다시 생각해봐라. 바깥은 정말 위험하다.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곳에 있는게 안전하다. 아마티코의 사병이 널 쫓을거야. 들개들은 위험하다.”

“아니, 너한테서 지켜질 생각 따윈 없다. 아마티코의 사병이 온다고 해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네가 신경 일은 아니다.”

아레히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는 가릴 수 없는 주름살이 보였다. 그래, 그도 나이를 먹은 것이다. 10년 전과는 달리. 그런 아레히의 모습을 보며 쯔르레이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아, 그렇구나, 이제 자신은 그와는 달랐다. 더 이상은 그와는 같은 곳에 있을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의 선은 교차되었고 서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진 선이었을 것이다.

“정말…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거냐?”

“그래.”

아레히는 이마에 손을 대고 고민하더니 잠시 후 그 손을 내리고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내키지는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곳을 벗어나는게 좋을거다. 경비병을 매수해둔 곳이 있다. 오늘 밤 그쪽으로 길을 떠나라. 이 도시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는 거다. 일이 멀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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