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들개들의 진혼가
말을 꺼낸 그 순간, 쯔르레이의 머리 위로 꿀밤이 날아왔다. 쯔르레이를 보고 귀엽다고 얘기했던 여자 용병의 짓이었다. 쯔르레이는 갑작스레 느껴진 충격에 머리를 부여잡고 여자 용병을 노려봤다.
“어른들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귀엽다고 다 봐줄 수 있는 건 아니야.”
지당한 이야기였지만, 쯔르레이를 억지로 잡아온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니었다. 아까는 가만히 있었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여기서 말을 해봐야 더 귀찮아지기만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고 이 자들에게 일일이 존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쯔르레이가 여자 용병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어른? 억지로 어린 아이를 잡아와놓고 하는 말이 우습군. 말버릇이 맘에 드는 아이를 구하려면 저기 저 바깥에서 다시 한명이라도 잡아오지 그래. 유괴범.”
순간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확실했다. 쯔르레이를 귀엽게 봐주던 용병들도 불쾌한 쯔르레이의 말에 얼굴 표정을 굳혔다. 적어도 이들은 진짜 범죄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쾌해할리는 없었으니.
“너, 이 자식, 봐주는 것도 정도가….”
“잠깐! 다들 그만둬. 쯔르레이 너도 진정하고. 실비아, 너도 그만해. 어린애랑 싸워봐야 좋을거 없다.”
싸움이 격화될 여지를 보이자 중재한 것은 아레히였다. 다행히도 여자 용병은 아레히의 코웃음을 치더니 순순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리 화가 날지라도 상대는 어린애였다. 괜히 싸움을 계속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웠다. 반대로 쯔르레이는 여전히 그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쯔르레이를 붙잡고 아레히가 말했다.
“너는 나랑 잠깐 이야기하자. 쯔르레이.”
“흥.”
쯔르레이는 싫다는 듯 한 분위기를 팍팍 풍겨냈지만 아레히의 힘을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아레히는 발걸음 하나 옮기지 않는 쯔르레이를 질질 끌기 시작했다.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그런 아레히의 손길에 이끌려 2층에 있는 방으로 끌려갔다.
술집에 있을 법한 평범한 방이었다. 아레히는 침대에 쯔르레이를 앉히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골랐다. 쯔르레이가 이내 짜증내는 티를 낼 때 쯤이 되어서야 아레히는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부터 얘기해야할까.”
“얘기? 무엇을? 난 너랑 할 얘기가 없는데.”
쯔르레이는 빈정대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었더라면 이미 한참 전에 했을 것이다. 지금와서 더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투르, 미안하다.”
“….”
순간 쯔르레이의 입이 턱 막혔다.
“진작에 사과했어야 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차마 변명할 수도 없지.”
“이미 늦었다는 걸 알고 있다면, 그런 사과 따위는….”
“너를 데리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데리러가지 못하고 나는 도망쳤다. 듄벨 가의 추적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중하느라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았어. 에리히가 있어서 더욱 그랬다. 변명이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래서?”
“그래, 변명일 뿐이지. 내가 너의 믿음을 배신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맹세를 따를 뿐이다.”
“뭐…?”
그 순간 아레히는 작은 단검을 꺼내들었다. 쯔르레이는 순간적으로 경계하였지만 그 단검이 향한 곳은아레히의 손등이었다. 손등을 살짝 찢어버린 단검을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작은 목걸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이전에 쯔르레이가 놓고 갔었던 에메랄드와 송곳니로 이루어진 목걸이였다. 둘의 깨져버린 약속의 증표였다. 이미 바랠대로 바래 더는 빛날 수 없는 에메랄드와 더는 아무 것도 깨물 수 없는 송곳니였다. 아레히가 다시금 그 목걸이에 피를 뿌리며 맹세했다.
“내 목숨은, 너의 것이다. 무슨 일이 있다 할지라도 이 남은 목숨은 너를 위해서 쓰겠어. 설령 네가 원치 않더라도.”
아레히는 오래 전에 깨어진 맹세를 다시금 입에 담았다. 그리고 피로 다시금 맹약을 갱신했다. 이제야말로 진짜 드디어 목걸이에 담긴 그 의미를 되살릴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맹세의 말은 쯔르레이에게 닿지 않았다. 아레히가 피 흘리는 손으로 건넨 목걸이는 쯔르레이에게 닿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그 손을 쳐내며 입을 열었다.
드물게도 쯔르레이는 떨고 있었다.
“…지마라.”
“뭐?”
“웃기지 말라고 했다!”
쯔르레이는, 아니 벨투리안은 분노했다.
이 분노만큼은 온전히 벨투리안의 것이었다.
10년이란 시간을 버림 받은 채 혼자서 추방 당해 살았다. 아직 믿음이란 것을 잃기 전까지는 그래도 좀 버틸만 했다. 그때는 희망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진짜 고통은 드디어 자신이 버려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터였다. 자신은 버려졌고 이제 혼자였다.
가장 믿었던 이였다. 가장 믿었던 친구였다. 가장 믿었던 형제였다.
그리고 그 형제가 나를 버렸다.
일족에게서도 형제에게서도 버려진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벨투리안은 그 순간 자신이 영원히 혼자임을 깨달았다.
생하울라의 편지에서 느꼈던 배신감이 더욱 컸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이미 가장 소중했던 이에게 버림받았다. 일족에게서 버림받았다. 그리고 겨우 다시금 모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을 준 이에게 벨투리안은 그 때 다시 한번 더 버림 받았던 것이다.
차라리 애초에 구하러 와준다는, 그런 약속 같은 것 하지말고 가지 그랬나. 그랬다면 그렇게 기다리지도 않았을텐데. 애초에 그럼 각오했을텐데. 모두에게 버림 받는 것을 각오했을텐데.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왜 자신을 데리러 와준다고 말을 했나.
그런 믿음 따위 없었다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을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이미 깨져버린 맹약 같은 것을 다시 짓거린다니.
우습기 그지 없었다.
벨투리안의 분노는 정당했다. 기실 단순한 분노 정도도 아니었다. 이미 벨투리안의 안에서 그 분노는 증오로 승화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증오를 내비치지 않고 떠났던 것은 이미 그런 것은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복수와 증오, 분노의 정당성 같은 것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이렇게도 사람을 기만한다면, 자신을 조롱한다면,
그 10년간을 비웃는다면.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쯔르레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살의였다.
아레히를 죽이고 싶었다. 지금만큼은[그럼 해버려.].
불행히도 지금 그에게는 검이 없었다.
그래서 쯔르레이는 그저 맨 몸으로 달려들었다. 체중을 모두 실은 일격에 아레히가 쓰러졌다. 그리고 쯔르레이는 쓰러진 아레히의 몸에 올라타 아레히를 주먹으로 마구 패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렇게… 나를 버리고서!”
아레히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쯔르레이가 힘을 실어 때리는 주먹질을 그냥 받고 있었다. 사실,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어린 몸의 한계였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성적으로는 이런게 아프지도 않을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걸 떠올리기엔 분노가 너무 컸다.
“나를 버려놓고는… 약속을 깨놓고는….”
그러나 아레히가 쓰러질 때의 소리 때문에 이미 아래층에서 용병들은 무슨 소란인가 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레히도 쯔르레이도 주변의 시선 같은 걸 신경 쓸 여지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 용병들이 계단을 오르는 소리 따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쯔르레이의 주먹질을 맞고 있는 아레히는 곧 자신의 얼굴이 젖는 것을 느꼈다. 쯔르레이의 눈에서 떨어지는 그것을 눈물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지독하고 너무나 괴로운 것이었다.
“아레히씨! 무슨 일입니까?!”
소란을 듣고 올라온 용병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표현해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쯔르레이는 이내 아레히의 몸 위에서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레히는 위로할 수도 없었다. 더는 미안하다고도 할 수 없었고, 맹세의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안아줄 수도 없고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그것이 곧, 벨투리안을 가장 크게 상처입히는 것일 테니.
그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