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들개들의 진혼가
달거리가 끝나기까지 장장 3일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한번 나빠진 몸 상태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컨디션은 여전히 안좋았고 몸을 움직이는데에도 위화감이 느껴졌다. 물론 훨씬 더 상태가 안좋을 때도 여행을 했었으니 이 정도 상태가 도시를 나갈 것을 막는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문제라면 이 모습으로 혼자서 도시를 나가는 것을 경비병이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벨투리안으로 돌아가 멀쩡하게 나가거나 이 모습 그대로 몰래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동태를 살피러 나간 쯔르레이는 갑작스레 경비가 삼엄해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리마다 경비병이 즐비했고 도시를 나가는 이들을 더욱 철저하게 검문하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순진한 척 경비병에게 다가가 물었다.
“경비병 아저씨, 무슨 일이 있나요?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요?”
“음? 음…. 꼬마는 알 것 없단다.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지만 애써 부끄러움을 숨기고 그런 행세를 한 것 치고 얻은 것은 없었다. 몇 번 다른 경비병에게도 시전해보았지만 비슷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여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등에 매단 후드를 다시 뒤집어 썼다. 쯔르레이의 외모는 눈에 띄어서 벌써부터 여관에 어린 여자아이가 혼자 머물고 있단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쯔르레이 역시 그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빨리 떠나야 했다.
그 순간 쯔르레이는 골목으로 들어가 숨었다. 처음 본 순간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 놈이 확실했다. 쯔르레이가 아는 몇 안되는 얼굴 중 한 사람이 거리에서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건 좀도둑 불타르 세너맨이었다.
‘왜 녀석이 이곳에?’
그와는 나쁘지 않은 인연으로 엮인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때 콜테르에서 불타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큰 곤혹을 겪었겠지. 그때 불타르는 큰 돈을 포기하고 순수한 선의로 자신을 도와주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지금에 와서 잘모르는 사람을 믿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도와준 것은 분명했지만 또다시 자신을 도와줄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쯔르레이는 골목길을 따라 조용히 몸을 숨겨 이동했다. 그러나 골목길에 들어간 것은 괜한 긁어부스럼이었다.
“뭐냐, 이 녀석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결국 사단을 냈다. 기척을 제대로 숨기지 못해 사람에게 들키게 된 것이다. 쯔르레이가 목격한 것은 모두 후드를 뒤집어 쓴 채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골목길에서 저런 차림으로 대화하고 있는 이들이 결코 멀쩡한 사람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바로 걸음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사람들 역시 도망치는 쯔르레이를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곧바로 그 중에 키가 가장 큰 사람이 쯔르레이를 쫓았다. 쯔르레이는 어째서인지 그의 몸길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아무리 쯔르레이가 상태가 안좋지 않더라도 그냥 쉽게 잡힐 인물은 아니었다.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면 결국 어지간한 사람들은 따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 역시 보통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쯔르레이가 도망치는 방향을 정확하게 찝어 쫓고 있었다. 상대가 혼자이니 차라리 싸워서 쓰러트릴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당연하게도 솜뭉치는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경비병에게 동향을 물어보러 나왔을 뿐이니 괜한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던 것 때문이다. 그것이 지금 불타르와 만나게 된 것과 겹쳐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멈춰선 것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였다. 길을 잘모르는 것이 독이 되었다. 뒤에는 키가 큰 후드를 쓴 사람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침을 꼴깍 삼키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잡았군. 쥐새끼 같은 놈….”
그리고 어째서 왜 낯익은 기분이 들었는지 쯔르레이는 곧 알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잊을 수 없는 그 기척. 아아, 오늘은 어찌된 일일까. 옛 인연을 두 번이나 보는 일이 생길 줄이야.
듄벨가의 영지니만큼 생각을 못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당황했을 뿐. 쯔르레이는 조용히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상대는 그 얼굴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부자연스럽게도 남자가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져 그 모습이 드러났다.
“너, 너는…!”
“오랜만이구나.”
아레히 오바드. 낯익은 얼굴이 쯔르레이를 반겼다.
~
둘 사이에서 불편한 정적이 잠시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레히였다.
“너, 대체 여긴 어떻게…. 아니, 그보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낸거냐. 괜찮은거냐? 빌어먹을…! 네가 그렇게 떠난 이후 내가 어땠는지….”
“말이 길군. 나는 너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고 했을텐데. 내가 어떻게 지낸지 그것이 중요한가?”
“망할 놈! 그래, 친구가 아니라고?”
아레히의 얼굴에서 얼핏 상처받은 듯한 모습이 나왔다. 그마저도 쯔르레이에게는 위선적으로 보였으나 곧 쯔르레이는 그 아레히의 손에 그대로 붙들리게 되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네 말대로 해주는거다. 친구가 아니라고 했으니, 너와 난 아무런 상관도 없는거니 원래 하던대로 하는거다.”
“날 잡아간다는 뜻이냐?”
“어디 팔아넘길지도 모르지.”
아레히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쯔르레이는 그런 아레히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아레히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아레히를 더는 친구로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그가 결코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는 것이다. 쯔르레이는 얌전히 그의 손에 붙들린 채로 움직였다.
아레히는 골목길의 복잡한 길을 여러 곳 번갈아다니면서 어딘가로 향하더니 끝내는 낡고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얼핏 평범한 술집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평범해보이지 않았다. 겉보기 차림으로 쉽사리 그들이 용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용병질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쯔르레이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에 담지는 않았다. 아레히가 무엇을 하든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으니.
용병들은 아레히와 쯔르레이를 보고 곧장 입을 열었다.
“아레히씨! 잡았군요.”
“뭐하는 쥐새끼였던거야? 설마 계획이 들통난건 아니겠지?”
“계획?”
쯔르레이가 반문했다. 꾀꼬리 같은 여린 목소리에 용병들의 얼굴이 살짝, 당황으로 물들었다.
“여자아이였나….”
아레히는 그대로 용병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가서 의자를 끌어내더니 쯔르레이를 강제로 앉혔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아,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거 같다. 이아이는 내가 아는 아이라고.”
“아레히씨가 아는 아이라고요? 설마”
그 말을 하는 용병의 얼굴은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아레히를 찾았던 마을에서 보았던 마틴이라는 이름의 용병이었다. 마틴은 분명 쯔르레이의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반신반의하는 얼굴이 곧 기억을 떠올린 듯 명확해졌다.
아레히가 강제로 쯔르레이의 후드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퉁명스런 표정의 쯔르레이의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고 용병들은 침묵했다.
“그래, 내가 찾고 있던 아이다.”
“쯔르레이.”
침묵이 풀리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용병들은 곧 떠들썩하니 여러 가지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이다. 대부분은 쯔르레이의 외모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왓, 이 아이가 형님의 조카딸이라고요? 이렇게 이쁘다는 소리는 안하지않았습니까?”
“아레히씨가 그렇게 찾던 아이가 이 아이란 말입니까?”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귀엽네”
마지막의 대사는 술집 내에서 유일하게존재하던 여자 용병의 것이었다. 그 말에 쯔르레이의 얼굴이 불쾌감으로 물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따져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쯔르레이가 고개를 돌려 아레히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카딸이란 건 무슨 소리지?”
“벨투리안은 내 형제나 마찬가지니, 넌 내 조카딸이 되는 셈이지.”
그 뻔뻔스런 아레히의 말에 쯔르레이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 나, 아니 아버지를 그렇게 배신해놓고는 무슨….”
“그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고. 아무튼, 우리 얘기를 엿들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해였던 것 같다. 이 아이는 아무 것도 몰라. 단순히 불량배들을 만난 줄 알고 도망쳤다는군.”
쯔르레이가 비꼬았다.
“불량배가 맞는 거 같은데.”
그러자 용병들 사이에서 박장대소가 퍼져나왔다. 아무래도 용병들 사이에서는 이미 귀여운 꼬마애 이미지로 잡히기라도 한 건지 딱히 불쾌감을 드러내는 이도 없었다.
“하하, 그 말이 맞지. 우리들 하는 짓이 불량배랑 다를 게 뭐가 있다고.”
“꼬마 아가씨가 아주 똑똑하구만 그래.”
쯔르레이는 멍청하게 여기서 나는 꼬마가 아니라고 항변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발돋움하는 어린애처럼 보여 더욱 귀여워보일거란 것 쯤은 안봐도 알 수 있었다. 대신 쯔르레이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나는 언제 보내줄거지? 오해가 풀렸다면 더는 잡혀있을 이유도 없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