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3화 〉들개들의 진혼가 (103/162)


  • 〈 103화 〉들개들의 진혼가

    밤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쯔르레이의 말돌리기는 효과가 있었고 류나벨트가 포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류나벨트가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 얘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지, 그도 아니면 그저 모르는 척 해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그것이 한계라는  알고 있었다. 몸이  낫는 대로 떠난다고 했지만 포탈이 발견된 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무리였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길을 떠나야 했다.

    이제 더는 남은 미련 조차도 없었다. 아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더는 그 미련에 의미 같은 것은 없었다.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그런 첫사랑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을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작게 고개를 내민 새싹을 쯔르레이는 조심스레 짓밟았다. 작은 발에 밟힌 새싹이 꺼지는 일은 없었으나 고개를 숙이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평소와 같은 밤이 흘러갔다.

    류나벨트가 포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없었다. 조곤조곤한 그녀의 목소리가 쯔르레이를 귀를 휘감았고 곧 쯔르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걸 확인한 류나벨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쯔르레이의 잠긴 눈이 다시 뜨이기까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다. 일어난 쯔르레이는 조용히 짐을 챙겼다. 곧바로 집을 나설 생각은 아니었다. 아직, 류나벨트가 잠에 빠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기고 검을 등에  쯔르레이가 침대에 앉아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그 시간 동안 방을 둘러보았다. 며칠간 자신이 지냈던 방을  훑어보고 마지막 시선은 류나벨트가 앉아있던 의자에게로 향했다. 마지막 시간이 끝났다. 조금 길었으면 좋으련만, 시간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소리가 안나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닫았다. 눈 앞에는 류나벨트의 방문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하는 그런 마음이 발을 당겼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이내 뿌리치고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문을 앞두고 쯔르레이가 잠시 멈춰섰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쯔르레이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더는 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쯔르레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엘프의 집을 떠났다.

    달이 밝은 밤은 아니었다.

    ~

    처음 내딛는 발걸음 속에 숨길  없는 느릿함이 묻어져 나왔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 머뭇거림은 사라지고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잊기를 바란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잊어야 할 것이다.


    남자의 이름에서,  곳이 듄벨의 영지라는 것은 이미 알아차렸다. 듄벨의 영지라면 원래 자신이 있던 슈라헤 산맥의 바로 밑에서 얼마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던 곳이었다. 꽤나 긴 시간을 들여 목표한 수해에 도착하기까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와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숨이 나올 만한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마냥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빠르게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은. 가방에서 낡은 지도를 펼쳐들었다. 시간 상으로 따지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오랜만에 보게 되는 기분이었다.

    듄벨의 영지는 숲이 가득한 곳이다. 당장 지금 류나벨트의 숲을 빠져나가는 것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후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숲 속에서 보내야할 것이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아야하는 쯔르레이에게 이는 상당히 유리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적이 있던 영지이다. 그때는  숲을 들르지는 않았지만 나가면 곧 제대로  길을 찾을  있을 것이다. 듄벨, 그러고보면 자신을 버렸던  친구가 생각이 난다.


    아레히에게는 분명 전해주었다. 듄벨의 주인, 이 전 듄벨 백작의 사망을.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슨 선택을 했을까.


    전 듄벨 백작은 이전까지 아레히의 죽음을 원하고, 그에 대한 암살자를 여럿 보내고 있었으며 아레히의 목에는 현상금까지 걸려있었다. 에리히 역시 살려서 잡으라는 얘기는 있었으나 현상금이 걸린 것은 매한가지엿다. 그러나 전 듄벨 백작이 죽었으니 더는 아레히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물론 아레히에 대한 감정이 좋지는 않겠지만 현 듄벨 백작의 성품이라면 그의 누이가 사랑했던 남자를 쉽사리 죽일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레히는 선택할 수 있겠지. 에리히를, 백작가의 피를 이은 귀족으로 자라나게 할지, 아니면 슈라헤의 혈통을 잇는 사냥꾼으로 키울지를.


    물론 슈라헤가 멸망한 지금와서 아레히가 후자의 선택을 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설사 귀족을 선택하지 않더라도 슈라헤를 계승하지는 않겠지. 어쩌면 지금 이미 이 영지에 그와 에리히가 와있을지도 모를 이야기이다.

    그러나 더는 그것은 쯔르레이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쯔르레이는 이미 그와의 연을 끊었고  둘을 이어줄 슈라헤라는 일족마저 사라졌다. 하물며 밝혀진 이야기에 따르자면 쯔르레이는 인간조차 아니었다. 더는 충격을 받을만한 정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무심한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흘이 지났고 처음으로  바깥의 빛을 마주했다. 사흘 째 되는 날에 쯔르레이는 벨투리안의 몸으로 돌아왔다. 벨투리안은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피로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나흘이나 쉴 틈 없이 걸었으면 지칠만도 한데 전혀 그럴 기미가 없는 것이다.  상태도 완벽하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나 벨투리안은 감흥이 없었다. 이제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더는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피로를 느끼지 않는 정도야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몸이 변하는 것에 비하면.


    숲의 끝자락에서 벗어나자 보이는 것은 듄벨 영지의 가장  도시인 벨루나였다.  곳을 통과하지 않더라도 영지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그렇게 한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미 오랜 시간을 낭비한 벨투리안은 더는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벨루나를 통과하여 나갈 것이다.


    물론 벨투리안에게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 세미와 같이 다녔을 때 그의 도움으로 만든 가짜 신분증이 있었다. 자신에게 현상금이 걸려있기 때문에 들킨다면 당연히 들어갈  없겠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다행히도 벨투리안은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수도와는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벨투리안의 현상 수배 정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빠르게 이 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오늘  다시 쯔르레이의 몸으로 돌아갈 테니 여관에서 몸을 숨길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적어도 이틀.

    벨투리안은 곧바로 당장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다. 전에 입던 옷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우선은 옷이었다. 혼자서 어린 아이가 입을 법한 옷을 구매하는 모습은 상당히 수상해보였지만 옷가게 주인은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옷을 사고 난 후에는 여행에 필요한 소모품들을 좀 챙기고는 여관을 찾기로 했다. 식료품은 아무래도 하루를 강제로 여관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니 마지막 날 출발하기 전에 사기로 했다. 여관을 찾을 때 쯤에는 이미 해가 조금씩 지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혹시 몰라 여관에 자신과 자신의 딸, 두 사람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자신이 쯔르레이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활동할 수 있게 미리 얘기를 한 것이었다. 이것은 세미와 같이 다닐 적 배워둔 방법이었다. 나이가 좀 되보이는 여자인 여관 주인은 보이지 않는 딸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 듯 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버렸다. 이후에 쯔르레이의 모습으로 나온다 하더라도 여관 주인은 아마 자기가 못보는 사이에 방에 들어갔을 거라고 여길 것이었다.


    여관에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주문했다. 식사는 방에서 하겠다고 하고 식사를 받아 방에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후에는 졸음이 몰려왔다. 지금까지 꽤나 강행군을 해서인가, 피로가 몰려온게 분명했다. 문을 잠그고 몸을 정리한 후 그대로 누워서 잠을 청했다.  수마가 몰려왔다.


    벨투리안은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 꿈 같은 것은 하나도 꾸지 않은, 그런 깊은 잠이었다.


    그리고 벨투리안, 아니 쯔르레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밝은 해가 떠오른 이후였다.

    쯔르레이는 곧장 자신이 변했다는 걸 눈치채고 당황했다. 양쪽의 모습을 오갈 때 단 한 번도 자신이 깨어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깨어난 것이다. 벨투리안의 옷을 입고 잤기 때문에 어린 몸에 어른의 옷이 우스꽝스럽게 걸쳐져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또다른 무언가의 징조일까?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 이대로 평생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 또한 떠올랐다. 문득, 쯔르레이는 아랫도리가 축축한 걸 느꼈다.


    헐렁한 벨투리안의 가죽 바지 안이 젖어있다는 것을 느낄  있었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새어나온 붉은 색 핏물을 발견했다.

    아무리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달거리였다.


    쯔르레이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처음 자신의 달거리를 본 어린 소녀의 반응처럼 보일 수도 있었지만 실은 그와는 한참 거리가 떨어져있었다. 이 몸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왕궁에 있었을  이미 파악했었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와서는 이 몸이 자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더는 대수롭지 않게 여길  없었다. 점점 자신이 완전한 ‘쯔르레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생리 또한 몸에 강한 충격을 주는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영지를 떠나야 하는데, 이 모습으로 계속 고정되어 있는다면 나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이제 자신의 몸이 변할지 안변할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혀있었다. 적어도 이런 상태라면 달거리가 멈추기 전에 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태로 몰래 나간다 할지라도 몸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아랫 배가 아프고 쿡쿡 쑤셔왔다. 당연하지만 쯔르레이는 여자가 생리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도 전혀 모르는 것이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아픈 배를 쥐어잡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방에서 나섰다. 그 작은 두 손에는 침대 시트가 붙잡혀 있었다.


    카운터에 가니 생전 처음보는 금발머리의 소녀가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내려오는  본 여관 주인이 놀라 말했다.

    “에구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야, 너는 누구니?”

    “어제… 아빠랑 같이 들어온….”


     말에 여관 주인은 벨투리안을 떠올린 듯 알아서 대답을 해주었다. 쯔르레이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아니, 그 양반 딸이라고? 허참 내가 분명 들어가는   기억이 없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너 설마….”

    “아랫도리에서 막… 피가 나오고… 배가 아파요.”

    여관 주인은


    “아이구, 맙소사 달거리구나. 느이 아빠는 상황이 이런데 대체 어디에 있다냐?”


    “아빠는 밤에 나갔어요….


    “첫 달거리니? 아니, 일단 이리로 오렴.”

    다행히도 여관 주인은 혼자서 첫 달거리를 맞은 어린 아이에게 보여줄 충분한 자비심을 가진 듯 성심성의껏 쯔르레이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씻는 걸 도와주고 아랫도리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막을 천 또한 구해주었다. 옷을 갈아입은 후에 다시 피로 젖어버린 옷을 세탁하는 것 또한 거리낌 없이 해주었다(벨투리안의 옷은 천으로 대충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동안 애를 놔두고 혼자 나가버린 쯔르레이의 아빠, 벨투리안을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 아빠라는 인간이 애가 이러고 있는데, 어딜 가서 쯧쯧….”

    쯔르레이가 아빠가 상당히 늦게 돌아올 것 같다고 말하자 여관 주인은 아예 아빠가 애를 버리고 도망간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까지 시작했다. 다행히도 그 의심은 그대로 놔두고 간, 사실은 애초에 가져가지도 않은 돈을 보고 걷혔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했다.

    여관 주인은 고맙게도 누워서 쉬는 쯔르레이에게 죽까지 해서 갖다주었는데, 그 뒤로는 퉁명스럽게 자신이 도와준 모든 일에 값을 매겨 전해주었다. 그러나 여관 주인이 도와준 일은 분명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쯔르레이는 군말하지 않고 조금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돈을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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