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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들개들의 진혼가 (102/162)


  • 〈 102화 〉들개들의 진혼가

    잠시 망설이던 류나벨트는 결국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그리 편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죄송합니다.”

    “여전하시네요, 류나.”

    대체 무슨 얘기인지 방 안에 있는 쯔르레이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직접 봤다면 그런 쪽에는 전혀 문외한인 쯔르레이도 눈치챌  있을 정도로 알바디엔의 태도는 노골적이었다. 노골적으로 류나벨트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알바디엔 듄벨은 류나벨트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류나벨트에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구애하고 있었다. 듄벨가의 고문 마법사가 되어 달라는 권유 또한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류나벨트는 알바디엔의 구애를 모두 거절하고 있었지만, 알바디엔은 쉽게 포기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류나벨트를 찾아와 계속해서 사이를 좁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류나벨트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알바디엔의 구애는 전혀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류나벨트는 재차 거절의 말을 꺼냈다.

    “고문 마법사가 되어달라는 얘기라면, 조금 생각을 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뒤의 얘기는 조금 곤란하네요.”


    “또 거절당해버렸네요.”


    “주제 넘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알바디엔님께서는 평범한 인간 여자와 만나는 것이 분명  좋은  일겁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엘프와 인간이 연을 맺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으니까요.”

    “늘 그렇게 말하시는군요. 항상 좋은….”


    “친구 사이로 남는 것이 분명 모두에게 더 좋을 겁니다.”


    “네, 그렇게 말했었죠.”


    언뜻 상냥해보이지만 단호한 거절이었다. 엿듣고 있는 쯔르레이조차 류나벨트가 알바디엔을 남자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느껴지는, 남자에게는 잔인하기까지  대답이었다. 알바디엔에게 불쾌감을 느끼고 있던 쯔르레이조차도 순간적으로 동정심을 가질만한 수준이었다.


    “오늘도 거절당해버렸네요.”

    그러나 알바디엔은 익숙하다는  류나벨트의 거절을 웃어넘겼다. 그 목소리에서 아무런 부정적인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가 존경 받아도 무방할 정도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아직 류나에게 남은 시간은 많으니까, 계속해서 생각해주세요. 언제든지 저의 제안은 유효할 겁니다.”

    “알바디엔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저는 어리니까, 아직은 그런 고민은 안하기로 했어요.”

    “뭐에요 그게, 후훗.”

    류나벨트가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쯔르레이는 알바디엔을 순간 동정해버렸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자신은 저 출발선상에 설 수도 없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를 동정한단 말인가.


    “매번 하던 이야기는 우선 그만하고, 중요한 할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할 말?”


    “제가 이틀 전에도 찾아왔었는데요. 그때는 자리를 비우셨더군요. 꽤나 걱정했습니다.”

    “잠시 마을에 들렀거든요. 아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걱정… 이라고요?”

    류나벨트가 의아함을 드러냈다. 류나벨트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살아온 엘프였고 그에 걸맞은 무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는 알바디엔 역시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숲은 류나벨트의 숲이었다. 이런 곳에서 류나벨트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류나벨트는 걱정의 대상이 될 인물은 아니었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이 쉽게 상대할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이 숲, 가까운 곳에서 흑마법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포탈이 발견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쯔르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다행히도 그 전에 입을 막아서 소리가 새어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쯔르레이의 머릿속은 이미 당황으로 가득찼다. 알바디엔이 얘기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훼손되어서 자세한 것은 조사 중이지만, 거기서 무엇이 튀어나왔을지 알 수 없습니다. 흑마법사의 사역마라던가 마수 같은 것이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류나벨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의 무력이 자신있다고 할지라도 흑마법사는 늘 변수 투성이의 존재였고 엘프와는 완전히 상극인 존재였으니 조심한다고 나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녀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반면 쯔르레이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알바디엔이 꺼내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역마도, 마수도 아니었지만  포탈을 통해서 나온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마수가 나타난다는 위험한 일 같은 것은 생기지 않겠지만, 흑마법사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이 걸리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반드시 숨겨야 했다.


    “일간에서는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 그 초월자와 관계되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얼마 전에 세이피어스 경과 르로망샤 경에게 토벌되었다고 하니까요.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

    익숙한 이름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그런가, 휘리오비치가 죽었는가. 마지막으로 본 세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때 당시에는 애초에 세미가 거짓말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거짓말이 아니라 한다면 때마침 휘리오비치가 죽고 세미에게 힘이 계승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류나벨트와 알바디엔은 계속해서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쯔르레이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엿들었지만 따로 밝혀진 것이 없는지 중요한 이야기는 더 나오지 않았다. 둘의 이야기가 끝난 건 꽤나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럼, 그 아이, 투르라고 했던가요? 안부라도 전해주십시오.”

    “그래요. 잘가요, 알바디엔.”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알바디엔이 돌아간게 확인이 되어서야 쯔르레이는 방에서 나왔다. 나왔지만, 얼굴은 여전히 흙빛인 상황이었다. 류나벨트는 똑똑했다. 자신이 흑마법사의 포탈에서 나왔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에서 류나벨트가 방에서 나온 쯔르레이를 보며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쯔르레이가 말을 가로챘다.

    “치, 친한가요?”

    엉뚱한 이야기였다. 말에 담긴 의미는 분명했다. 류나벨트가 알바디엔과 무슨 사이냐는 이야기였다. 류나벨트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생각나는 것을 아무거나 말해버린 것이다.

    “으, 응? 알바디엔 말이야?”

    쯔르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류나벨트는 순순히 쯔르레이의 생각대로 넘어가주었다. 임시방편일 뿐이지만.


    “친구… 정도라고 보면 될까. 굳이 친하냐 아니냐를 따진다면 친한 편에 가깝겠지?”


    “…어떻게 만났나요.”

    “너랑 비슷해. 5년쯤 전인가… 숲에서 길을 잃은 알바디엔을 도와줬거든. 그 뒤로 종종 찾아오곤 한단다.”

    비슷하다는  말이 쯔르레이의 가슴을 살짝 할퀴고 지나갔다. 물론 알고 있었다. 류나벨트가 쯔르레이를 도와준 이유는 단순한 선의, 결코 쯔르레이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쯔르레이의 마음을 더욱 흔든 것이 아니었는가. 하지만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선의가 쯔르레이 말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공평하게 나눠졌다는  생각하면 가슴이 쓰린 것이다.

    “그는… 류나벨트를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응? 아하하하하. 조숙하구나, 쯔르레이.”

    머리를 쓰다듬는 류나벨트의 손길에 쯔르레이는 얼굴을 조금 붉혔다. 어째서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류나벨트가 알바디엔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까 전 엿들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굳이 다시  이야기를 꺼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결국 류나벨트가 무슨 표정으로 그 말을 했는지  수 없었다.


    “류나벨트도… 그를 좋아하나요?”

    쯔르레이는 궁금했다. 무슨 표정으로 류나벨트가 말을 꺼낼지. 말을 꺼낸 직후 쯔르레이는 후회했지만 이미 꺼낸 말은 다시 주워삼킬  없었다.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류나벨트는 쯔르레이가 전혀 생각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부끄럽다는 표정도 아니었고 싫어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류나벨트는 정말로 순수하게 무리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쯔르레이의 눈에 뾰족하고 길게 나있는 류나벨트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게, 알바디엔은 19살이니까.”

    쯔르레이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한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금까지 알바디엔에게 느낀 불쾌감도 질투도 동정심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나랑 400살 넘게 차이나는 어린애한테 연애 감정을 가지는 건 역시  힘들어서 말이야.”

    류나벨트는 알바디엔을 남자로 보지 않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알바디엔 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사귄다면, 나보다 연상이 좋지 않을까….”

    류나벨트에게 있어서는 인간 전체가, 어린애나 마찬가지인 것이었다.


    쯔르레이는 애당초 자신의 질투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것에 안도해야할지, 자신에게 아무런 가능성도 없다는 것에 낙담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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