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1화 〉들개들의 진혼가 (101/162)


  • 〈 101화 〉들개들의 진혼가

    눈물 자국이 목욕탕의 물기에 지워졌을 무렵, 쯔르레이는 각오를 다진 채 뒤를 돌아보았다.

    류나벨트의 나신이 쯔르레이의 눈에 들어섰다. 매혹적인 몸이었다. 옷을 입었을 때도 충분히 그 존재감을 자랑했던 풍만한 가슴이 알몸으로 드러나자 그 파괴력은 더욱 강력했다. 척이나 아름답고, 그만큼 음탕한 몸매였다.

    설사 신께 순결을 맹세한 신관이 보더라도 감히  욕망을 거부할  없을 것 같았다. 하물며 평생을 여자와 인연이 없게 보낸 쯔르레이는 말할 것 조차 없겠지.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쯔르레이에게는 그 아름다운 몸을 감상할 여유도, 순진한 척 연기할 어리석음도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류나벨트의 알몸에 욕정할 수 있는 몸조차도 지금은 갖고 있지 않다.


    그 감촉에 강한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 바로 얼마전이었으나 쯔르레이는 애써  기억을 지워냈다. 더는 그런 것에 휘둘려서는 안됐다. 류나벨트를 위해서라도. 목욕탕이라서 다행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지 않아도 되니까.

    “…떠나겠어…요.”

    “….”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어요.”

    갑작스런 발언에도 불구하고 류나벨트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올게 왔다는 듯, 평온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구나.”


    다행히도 류나벨트는 붙잡지 않았다. 그 말에 쯔르레이는 안도하면서도 서글픔을 느꼈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는 것이다. 류나벨트가 자신을 붙잡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품은 것을. 자신의 나약함이었다. 쯔르레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에 휘둘리지 않았다.

    “몸이 다 낫는대로… 가겠습니다.”

    영원히 이곳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마음을  잡은 것은,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떠나야할 시기를 놓쳐버릴 테니까.


    쯔르레이는 답을 듣지 않은 채 목욕탕에서 나왔다. 류나벨트가 준비해놓은 수건으로 아직 몸을 흠뻑 적시고 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긴 머리에서 최대한 물기를 쭉 짜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류나벨트가 사온 것이었다.


    미안한 일이었다. 류나벨트도 분명 배은망덕하게 생각하겠지. 이 옷들은 오늘 류나벨트가 사온 것이었다. 그리고 옷을 사온 그 날 바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고 말해져도 할 말이 없었다.

    마음을  잡은 것과는 별개로 울적함이 가시지 않았다. 류나벨트가 내어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직 저녁을 먹지는 않았지만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류나벨트라면 분명 저녁을 먹고 자라고 부르겠지. 그때가 되면 자신은 ‘미안해요, 먹고 싶지 않아요.’ 라고 대답해야 할테고.


    그러나  날 류나벨트가 쯔르레이를 찾는 일은 없었다.

    처음이었다.

    이 곳에 온 후로 혼자 잠을 청하는 것은.


    ~

    어젯밤 찾아오지 않은 것은 기우였다는 듯, 류나벨트는 쯔르레이가 눈 떴을   앞에 있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류나벨트는 어제의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처럼 평소처럼 웃으며 쯔르레이를 반겼다. 그 태도에 쯔르레이는 당황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잘잤니?”

    “…응.”

    쯔르레이는 굳이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뒤로는 특별한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평범한 날이었다.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제의 일도 내일의 일도 신경 쓸 것 없는, 평소와 같은 하루였다.


    아침에는 채소밭을 돌보고, 일이 끝나면 식사를 한다. 류나벨트는 엘프어로  책을 읽고 쯔르레이는 옆에 앉아서 조용히 그걸 지켜본다. 가끔 지루하지 않냐고 류나벨트가 입을 열면 쯔르레이는 고개를 흔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쯔르레이는 침대에 눕고 그 옆에서 류나벨트가 앉았다.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어제뿐이었나보다. 류나벨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목소리에 취하듯 쯔르레이가 잠이 들면 비로소 그 하루가 끝이 났다.

    평온했다. 곧 끝날 일상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것이 쯔르레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몸상태는 점점 회복 되고 있었고 앞으로 며칠이면 충분히 떠날 수 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날이 되면 쯔르레이는 지체 없이 길을 떠날 것이다. 고집을 좀 부리면 아직 완전한 회복은 아니니까 조금  시간을 끌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순간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애써 붙잡았다.

    그러나 항상 모든 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늘 그랬듯이.

    ~

    쯔르레이가 잊고 있었던 이들이 다시 찾아온 것은 점심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때 쯔르레이는 류나벨트가 부탁한 심부름을 위해 잠깐 밖에 나와있었다.  밖에 놓인 창고에서 물건 하나를 가져다 달라는 사소한 심부름이었다. 작은 상자를 들고 집 안으로 돌아가려는 쯔르레이에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딱 봐도 귀족의 자제로 보이는 청년과 두명의 기사였다. 청년의 얼굴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너는 누구지?”


     목소리를 듣고 쯔르레이는 그가 전에 찾아와서 류나벨트를 류나라고 불렀던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도망치듯 숨었다. 그런 쯔르레이의 모습을 본 류나벨트는 의아해하다 곧이어 들리는 똑똑 소리에 상황을 눈치챈 듯 했다.

    “어서와요.”

    “안녕하십니까, 류나.”


    “들어와요.”

    남자는 그대로 류나벨트의 집으로 들어왔다. 다른 두 명의 기사는 그대로 바깥에 남았다. 류나벨트도 권유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흠흠, 오랜만입니다.”


    “그렇네요.”


    류나벨트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에 조금 얼굴을 붉힌 남자는 곧장 쯔르레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방금 이 집으로 들어간 아이를 보았는데….”

    “사정이 있어서 잠시 제가 돌보는 아이에요.”


    “아, 그렇군. 혹시 나에게도 소개해주시지 않겠어요?”

    남자는 사실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좋은 대화 소재라고 생각한  같았다. 류나벨트가 빙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는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쯔르레이가 있는 장소였다. 쯔르레이는 류나벨트의 시선을 느끼고는 결국 앞으로 나섰다.


    남자는 쯔르레이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조금 감탄하고 말았다. 아직 어리지만 굉장한 미모였다.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된다면 분명 류나벨트와도 견줄 수 있을만한 미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그런 감탄은 쯔르레이에게 있어서는 기분 나쁜 반응일 뿐이었다. 그럭저럭 익숙해지긴 했다만 여전히 맘에 들지는 않았다. 남자가 말했다.

    “굉장히 예쁜 아이군요.”


    “…감사합니다.”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직 이 남자와 류나벨트와의 관계를 제대로 모르는데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쯔르레이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나는, 알바디엔 듄벨이라고 한단다. 꼬마 아가씨의 이름은?”

    쯔르레이가 표정을 찌푸렸다. 아주 살짝. 분명 이곳이 듄벨의 영지라고 류나벨트가 말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이 영지의 주인, 듄벨 백작의 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옛 친구였던 아레히가 사랑했던 여자와 피가 이어진 이일테고. 갑작스레 떠오른 과거의 이야기에 생각이 좀 어지러웠다. 낯이 익은 이유는 이것이었나. 에리히의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꽤나 닮은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이 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곧이곧대로 말해도 될지 걱정이었다. 자신은 과거 엘핀과 함께 지냈을 때 이미 이 이름을 쓴 적이 있었다. 가능성은 낮지만 어딘가에서 자신의 얘기를 들었을지도 몰랐다.

    “투르에요.”

    쯔르레이는 결국 조금 이름을 바꿔 말했다. 이전에도 사용했던 애칭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자신이 특정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지만 투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었다. 쉽게 눈치챌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쯔르레이의 생각대로 알바디엔이 쯔르레이의 정체를 눈치채는 일은 없었다.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한걸까, 그냥 조금 웃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 후 쯔르레이는 그냥 들러리였을 뿐이었다. 알바디엔과 류나벨트는 친한 친구처럼 잡담을 이어나갔고 쯔르레이는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쯔르레이는 양해를 구하고 뒤로 빠졌다.

    자신이 있어도 의미가 없다는 판단 하에 빠진 것이지만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류나벨트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류나벨트가 알바디엔에게 웃어주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기에도 알바디엔은 류나벨트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다. 류나벨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를 싫어하는  같지는 않아보였다. 어린애와도 같은 질투에 쯔르레이 자신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리에서 빠졌다고는 해도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류나벨트의 집은 작고 나무로 되어있어 방음이 그렇게 잘되는 곳은 아니었다. 딱히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쯔르레이에게는 둘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하잘 것 없는 잡담이 오간 이후였다. 둘 사이에서 잠시간의 침묵이 감돌더니 알바디엔이 입을 열었다.


    “전에 권유 드린 것은, 생각해보셨습니까?”


    “…듄벨 가의 고문 마법사가 되어달라는 얘기, 말씀인가요.”

    “그것말고도요.”

    방 안에 들어가 있는 쯔르레이는 알 수 없었지만 류나벨트에게서 난처한 얼굴이 떠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