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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화 〉들개들의 진혼가 (98/162)


  • 〈 98화 〉들개들의 진혼가

    그 날 이후로 쯔르레이는 자연스럽게 류나벨트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물론 그 전이라고 같이 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정한 의미로 같이 생활하게 된 건 그 날부터가 분명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처럼 류나벨트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사했다.

    안녕, 쯔르레이! 오늘도 좋은 아침!


    쯔르레이는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좋은… 아침.


    그렇게 하면 평소처럼 류나벨트가 환하게 웃어준다.


    그러고 나면 류나벨트가 준비한 죽을  숟갈 씩 떠서 호호 불어 먹여준다. 쯔르레이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거부하지 않는다. 입을 벌리고 따뜻하고 알맞게 식은 죽을 받아먹는다. 사실 이미 죽 정도는 혼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됐지만 어쩐지 류나벨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걸어다닐 정도로 회복이 되긴 했지만 아직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내야했기에 꽤나 지루한 시간이 되었다. 그런 쯔르레이를 위해서인지 류나벨트는 대부분의 시간을 쯔르레이의 방에서 같이 보내주었다.

    보통은 류나벨트가 혼자 떠드는 시간이었다.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평범한 일상 얘기를  때도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쯔르레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면 자장가를 불러주었다.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지루함이란 건 오랜 친구와도 같았지만, 이렇게 낯선 것은 처음이었다. 싸늘하고 공허했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류나벨트와 함께 하는 지루함은 푸근하고 따뜻했다.


    가끔은 류나벨트가 책을 들고와서 읽을 때도 있었다. 무슨 책이냐고 묻기도 전에 류나벨트는 책에 대한 이야기 또한 해주곤 했었다. 엘프의 언어로 적혀 있어서 쯔르레이는 읽을 수 없었지만.


    한가로운 일상이었다.


    “여기.”

    “응, 고마워.”


    쯔르레이가 류나벨트에게 과일바구니를 건네주었다. 가벼운 심부름이었다. 집 밖에 있는 작은 창고에서 보존되어있는 과일들을 가져오라는.


    쯔르레이가 평범하게 거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 된 후에 쯔르레이는 류나벨트에게 뭐든 할 일을 달라고 말했다. 은혜갚기였다. 적어도 이렇게 가만히 누워서 식충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쯔르레이의 성향에는 맞지 않았다.

    물론 류나벨트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쯔르레이의 고집에는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류나벨트는 쯔르레이의 몸을 망치지 않는 선에서만 집안일을 좀 도우는 것을 허락하고야 말았다.

    오늘의 점심은 사슴 고기로 만든 스튜와 말린 과일들이었다. 그  류나벨트가 쯔르레이가 가진 것의 세배는  법한 거대한 활을 들고 나가 잡아온 것이었다.


    처음 류나벨트가 사슴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온 것을 보고는 꽤나 놀랐다. 엘프라는 종족은 인간과는 멀리 떨어져 살고 그리 사이가 좋은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쯔르레이 또한 엘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없었으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소문 정도는 들어봤기 때문이다.


    놀라는 쯔르레이의 얼굴을 보고는 류나벨트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랐니? 아 혹시 피 때문에 무서워서 그래?”

    “사슴….”


    “아, 응. 오늘은 사슴이야! 맛있는거 만들어줄 테니 기다리렴?”


    “고기, 먹어?”


     말에 류나벨트는 조금 깔깔대며 웃었다.


    “아, 그런 얘기가 있지. 엘프는 고기를 안먹는다고? 그런 엘프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그런 건 상관 안해. 무서운게 아니었다니 다행이네.”

    사슴은 그대로 류나벨트의 손에 해체되었다. 굉장히 익숙하고 숙련된 솜씨는 확실히 초보자의 것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자신도 돕겠다고 나섰다. 쯔르레이에게 있어서도 동물 해체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나선 것이었지만 류나벨트는 허락하지 않았다.


    “안돼. 해체는 위험하고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야. 옆에서 구경하는 것까진 괜찮지만 도와줄 필요까진 없어.”

    쯔르레이도 괜한 고집을 부리진 않았다. 결국  날 쯔르레이가 도운 것은 과일을 나르고 그릇을 옮기는 정도의 간단한 일 뿐이었다.

    사슴 스튜는 굉장히 맛있었다. 오랫동안 죽과 과일,  전에는 육포 같은 보존 식량만 먹은지가 한참이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맛이었다. 맛이 어떠냐고 묻는 류나벨트의 말에 쯔르레이가 맛있다고 대답했다. 쯔르레이는 알지 못했지만 쯔르레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쯔르레이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한 그릇  줄 수 있냐고 물었지만 과식은 안된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럴 때는 완고한 류나벨트였다.

    점심을 다 먹고 난  하늘을 보며 류나벨트가 말했다 오늘은 비가  것 같아. 과연  말대로 그 날 밤에는 비가 왔다. 폭우, 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꽤나 거센 비가 내렸다. 쯔르레이의 방에서도 빗방울 소리가 우수수 들려왔다. 간간히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 또한 귓가에 울렸다.


    창문을 통해 내리는 비구름을 바라보던 쯔르레이에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들어올 사람은 류나벨트 밖에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게 류나벨트의 손에는 배게가 하나 들려있었다. 잠옷 차림의 류나벨트에게 쯔르레이가 물었다.


    “배게…?”


    “응, 사실 내가 천둥번개를 무서워 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같이 자줄 수 있을까?”


    하지만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류나벨트의 얼굴에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뻔한 배려였다. 아마도 쯔르레이가 천둥번개를 무서워 할지도 모르니까 와준 것이 분명했다. 물론 쯔르레이는 천둥번개 같은 것을 전혀 무서워 하지 않았지만 류나벨트의 뻔한 배려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쯔르레이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응… 괜찮아.”


    “고마워!”


    류나벨트는 곧장 쯔르레이의 침대 위로 파고들었다. 다행히도 침대는 넓었고 두 사람이 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나벨트는 쯔르레이의 곁에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쯔르레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 가까워.”

    “괜찮잔아. 이 정도는.”

    쯔르레이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류나벨트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밀어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거세게 저항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류나벨트의 품을 받아들였다. 류나벨트는 평소와는 달리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자장가도 불러주기 전이었다. 아마도 아침에 사냥을 다녀와 피곤했었나 보다.


    쯔르레이는 왠지 아쉬움을 느꼈다. 이 곳에 온 후로는 항상 류나벨트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었다. 자신이 분명 어린애는 아니었지만 류나벨트의 자장가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쯔르레이도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였다. 류나벨트가 갑자기 쯔르레이를 꽉 껴안았다. 잠꼬대였다. 당황한 쯔르레이는 류나벨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강하게 붙잡은 류나벨트의 손에서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그래보여도 류나벨트는 꽤나 힘이 강했다.


    안겨지는 것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냥 무시하고 잠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쯔르레이가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풍만한 감촉이 문제였다.


    류나벨트의 가슴이었다.


    당연하게도 류나벨트는 쯔르레이를 평범한 여자애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쯔르레이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거대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만약 류나벨트가 자고 있지 않았더라면 분명 이 새빨간 얼굴이 들켰을 것이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함에도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쯔르레이는 당황하였다.


    이전에도 분명 류나벨트에게 안긴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멀쩡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지금의 쯔르레이에게 류나벨트의 가슴은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비록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지만 대부분의 생을 남자로 살아온 인간이었다. 남자에게 이런 감촉은 결코 의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심지어 쯔르레이는 평생 여자와 접촉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가장 가깝게 지낸 여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 세미와 공주 르베니였던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자신의 몸까지 포함하더라도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라는 생명체가 완전히 어린애들 밖에 없던 쯔르레이에게 풍만한 성인 여성의 감촉은 상상할 수도 없는 파괴력이었다. 심지어 류나벨트의 그것은 분면 평범한 여자의 것보다도 훨씬 커다랬다.

    그러나 지금 쯔르레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단순한 부끄러움 뿐은 아니었다.

    거기에 섞인 감정은 자괴감과 두려움, 죄책감이었다.


    그래, 자신은 결코 평범한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다. 본 모습은 분명한 남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속인  이렇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 새삼 쯔르레이의 가슴을 찌른 것이다.


    심지어 순수하고 선한 의도로 자신을 도와준 은인에게 음심마저 품어버렸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 쯔르레이 스스로를 결벽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이런 일에서만큼은 적어도 깨끗함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쯔르레이는 두려웠다. 만일 자신의 본모습을 들켜버린다면 류나벨트가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지가 두려웠다. 무엇보다 언젠가 자신이 다시금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쯔르레이는 지쳐 있었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 허락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의 운명에는 안식이 허락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자신이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쯔르레이는 결코 도망칠 수 없었다. 그의 운명으로부터.


    “우응….”


    류나벨트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쯔르레이는 그녀가 일어날까봐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잠꼬대였는지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움직임 때문에 다시금 거대한 가슴의 감촉이 쯔르레이의 품으로 전달되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쯔르레이가 이 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단순히 힘의 문제 말고도 쯔르레이 스스로가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이중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그랬다.

    류나벨트의 품은 달콤했고 벗어나기 힘든 함정 같았다.

    결국 그 날 쯔르레이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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