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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화 〉들개들의 진혼가 (97/162)


  • 〈 97화 〉들개들의 진혼가

    뚜벅, 뚜벅


    빙룡이 천천히, 한 박자 한 박자 맞춰가며 주위를 걸었다.


    그런 빙룡을 보며 우트가르드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면 베르헬트는 미동도 하지 않은  그대로 무표정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빙룡은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렇군. 그렇게 된 일이거라.”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인 우트가르드에게서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말에 여전히 고저는 없었다. 그러나 우트가르드가 자신의 실책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보였다. 멀쩡하게 서있는 베르헬트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런 우트가르드를 빙룡은 질책하지 않았지만 일어나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쥐새끼가 재밌는 짓을 하고 갔군.”


    “어차피 알고 있던 것 아닌가.”

    중얼거리는 빙룡을 향해 베르헬트가 말했다. 제 주인에게 꺼내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무례했지만 빙룡은 지적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그 뼛조각들, 당장 얼마 전에 당신이 만진 것이 아니었는가.  흑마법사 꼬마가 건드렸다면 그걸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똑똑한 아이구나.”

    빙룡이 웃었다.

    “유쾌한 아이야.”

    베르헬트를 향한 그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 이상 제대로 된 감정이란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적했다가 빙룡의 변덕에 죽을 거란 걱정 또한 없었다. 다행히 빙룡은 화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틀렸구나, 아이야. 아쉽게도 나는 모르는 일이었노라.”


    “….”


    베르헬트는 침묵했다. 믿기 힘든 얘기였다. 초월자라 한들 결국 인간, 한낱 흑마법사가 벌여둔 술수를 빙룡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빙룡은 정말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이진 않았다.

    “울푸레의 꼬리가 재밌는 짓을 했군. 어차피 아가야  자리에서 잡았어도 곧 빠져나갔을 것이랴, 놔두긴 했다만.”


    빙룡은 말했다.  말은 즉, 벨투리안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고도 일부러 막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베르헬트와 우트가르드에게 내린 명령과 상반되어 있었지만 둘은 지적하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주인님.”

    “그래, 무슨 할 말이 있더냐.”


    빙룡에게 말을 건 것은 뜻밖에도 우트가르드였다. 우트가르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우르테가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만.”


    “무엇이더냐?”

    “우르테가님께서, 쯔르레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습니다.”


     순간 빙룡의 눈빛이 변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다시금 벨투리안과 이야기할 때처럼 표정이 돌아왔다. 그 표정은 분명, 당혹감이었다. 어째서 고작 이름 따위에 빙룡이 그런 표정을 짓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거지?”

    “그건 듣지 못했습니다.”


    “재밌는 일이거라….”

    빙룡은 다시금 표정을 감추고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빙룡은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마실이라도 나가봐야겠군.”

    ~


    여자는 가능한  아이의 곁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아이가 일어날 때 곁에 아무도 없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했다. 다행히 아이는 꽤나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한번 정신을 차린 후에 다시 의식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지만 여자가 보기에도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분명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의 바램이 헛되지 않았던 듯, 결국 아이는 눈을 떴다. 그때에도 여전히,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벨투리안은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윽고 눈을 뜬 벨투리안에게는 아름다운 녹색빛 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벨투리안이 마른 성대로 성긴 목소리를 내었다.


    “여…긴.”

    “일어났구나.”


    여자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벨투리안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저 여자의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벨투리안은 곧 여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위화감을 깨달았다.


    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야 누구라도 알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녹색빛 머리는 잎사귀 같이 색채가 있었고 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상냥하게 벨투리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의 눈길을 끈 것은 그런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 결코 숨길 수 없는 강렬한 특징이 여자에게는 있었다.


    길고 뾰족한 귀.


    결코 인간에게는 달려있을 수 없는 것,

    여자는 엘프였다.


    ~

    “내 이름은 류나벨트라고 한단다.”


    여자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류나벨트는 참으로 헌신적인 인간, 아니 엘프였다. 처음 말을 꺼낸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는 벨투리안에게 핀잔 한마디 주지 않은  열심히 그를 간호해준 것이다.

    벨투리안 역시 입을 닫은 것 외에는 순종적으로 류나벨트를 따랐다. 사실 따랐다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다. 벨투리안이 할 일이라고는 류나벨트가 주는 약을 먹고, 류나벨트가 먹여주는 죽을 얌전히 받아먹은 것 뿐이니까. 약이 무언가 이상한 것일거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 맞겠지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벨투리안은 충분히 순종적인 것이었다. 평소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먹이주듯, 류나벨트가 떠주는 죽을  입  입 받아먹는 일 같은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벨투리안에게는 그럴 힘도 마음도 없었다.


    류나벨트는 확실히 상냥한 엘프였다. 연고도 없는 수상한 아이를 그저 우연히 마주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치료해주고 돌봐주는 것을 보면. 말을 하지 않는 벨투리안이 답답했을만도 한데, 그녀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가끔 무언가 물어보기도 했지만 벨투리안이 대답하지 않아도 그저 살며시 웃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제대로 잠 못이루는 벨투리안을 위해 밤마다 어린애들이 들을 법한 동화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물론 벨투리안에게는 흥미 없는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혼자 잠들 때보다는 더 잠이 잘오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았다.


    류나벨트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벨투리안에게 해주었다. 자신이 어디에 쓰러져서 류나벨트에게 발견되었는지 처음 상태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류나벨트는 이곳이 듄벨 가의 영지의 끝에 있는 숲이라고 하였다. 듄벨의 영지라면 과거 자신이 아레히를 찾기 위해 들렸던 곳이다. 그렇게 힘들게 수해를 향해 갔거늘, 훨씬 이전으로 돌아와버렸다. 그렇지만 벨투리안은 낙담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와서는 뭐가 어찌되든 간에 좋았다.

    그 날은 해가 쨍쨍한 날이었다. 창문에 쳐둔 커튼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벨투리안에게로 비쳐들어왔다. 끼이익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류나벨트가 햇살을 받으며 벨투리안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평소와 같은  그릇이 들려있었다. 류나벨트가 침대의 곁에 앉아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구나, 그렇지?”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류나벨트에게는 확실히 들렸다.

    “…좋은… 아침.”


    그 순간 류나벨트의 표정은 참으로 볼만한 것이었다. 약간의 놀람, 그리고 곧 이어지는 기쁨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류나벨트는 벨투리안을 꽉 껴안았다.

    “그래! 좋은 아침이야!”

    순간적으로 벨투리안은 류나벨트를 밀칠 뻔 했다. 그 껴안음에서 과거 빙룡이 자신을 껴안던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달랐다.  모두, 껴안는 것 자체는 따뜻했지만 류나벨트는 뭔가 달랐다.

    빙룡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벨투리안은 이내 곧 류나벨트를 마주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기뻐하는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어색한 손길이었지만 류나벨트는 충분히 기뻐했다.

    그 뒤로 류나벨트와 벨투리안은 급격하게 친해졌다. 아니, 친해졌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벨투리안은 여전히 말수가 없는 아이였고, 자신의 이름조차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류나벨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된 반응도 대답도 없던 지금까지와는 확실히 달랐다. 류나벨트가 무언가 물어보면 고개를 흔들어 대답해주었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잡아주지 않던 류나벨트의 손을 다시 잡아주기도 했다. 가끔은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류나벨트의 말에 대답해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벨투리안이 혼자서 일어설 수 있게 된 날이었다.


    “몸 상태가 많이 괜찮아졌어. 응, 아직은 조금 더 치료해야하지만 처음보단 훨씬 괜찮아. 다행이다!”

    “….”

    “그래도 이제 겨우 걸을  있을 정도니까 무리는 하면 안돼. 알았지?”


    “…네.”

    류나벨트가 빙그레 웃었다. 작은 목소리에 짧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이 대답해줄 때면 류나벨트는 항상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 웃음 때문일까, 충동적으로 벨투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


    “응?”

    “ㅂ…쯔르레이.”


    어째서 벨투리안이라는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일까. 버렸다고 생각한 이름이었는데도 순간 떠오른 것은 쯔르레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 생각할 시간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류나벨트가 바로 벨투리안, 아니 쯔르레이를 껴안은 것이었다.

    “응, 그래! 고마워! 알려줘서! 쯔르레이! 안녕! 다시 소개할게. 내 이름은 류나벨트야. 쯔르레이, 만나서 반가워!”


    류나벨트는 정말  몸으로 기뻐했다. 안겨진 그 몸에서 느껴졌다. 그녀의 행복한 마음이. 쯔르레이는 이름에 대해 고민할 새도 없이, 류나벨트를 마주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응… 안녕. 류나벨트.”


    “응!”

    저번처럼 어색하게 쯔르레이가 류나벨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류나벨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을 거라는 것만큼은 알  없었다.

    쯔르레이가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 순간 그 자신의 얼굴에도 조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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