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5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95/162)


  • 〈 95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베르헬트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벨투리안은 간신히 피해냈지만  뒤를 이어 우트가르드가 파고들었다. 결국 이번은 피할  없었다. 우트가르드의 정권 지르기에 맞은 벨투리안은 배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복통을 애써 무시하며 뒤로 굴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베르헬트와 우트가르드가 보였다.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오지 않는 이유는, 분명 쓸데없는 반항은 그만두라는 의미겠지. 그러나 벨투리안은 받아들일  없었다. 무릎을 잡고 피하느라 뽑을  조차 없었던 솜뭉치를 손에 쥐고 일어선다.

    물론 승산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베르헬트나 우트가르드, 둘이 아닌 하나라고 할지라도 이기는 것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는데  둘을 동시에 상대하라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설사  둘을 어떻게든 물리친다고 할지라도  뒤에는 빙룡이 있다.

    벨투리안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럴 기력이라도 싸움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다. 물론 지금 벨투리안의 태도는 이성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길  없는 싸움이다.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는  가지였다.


    지금이나마 무릎이라도 꿇고 빌던가, 얌전히 빙룡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싸우기를 선택했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되돌릴 수 없는 이유는 용기가 아니었다.

    그건 오기에 가까웠다. 자존심조차 아닌.


    벨투리안은 많은 걸 포기했다.

     배신을 당한 후에는 친구를 포기했다.

    일족에게 버림 받은 후에는 자유를 포기했다.

    흑룡이 일족을 불태운 날에는 복수를 포기했다.

    이런 꼴이 된 자신을 보고  후에는 무엇을 포기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은 오직 단 하나,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것이 그렇게나 큰 욕심이었는가?

    용이니 뭐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욕심 하나, 그저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그 하나 뿐이었다.

     사소한 욕심 하나를 못버려서, 벨투리안은 오기를 부리는 거였다.


    이것마저 포기할 수는 없다고.


    그리고 우트가르드의 주먹질이 다시 날라왔다.

    벨투리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벽으로 날라갔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곧바로  몸이 바스러질 충격이었다.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우트가르드는 잠시간의 숨 고를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바로 벨투리안을 따라와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아까 전까지의 공격은 손대중조차 아니었다는 듯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벨투리안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머리가 흔들려 사고할 수 없었다. 분명 우트가르드가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차이를 직접 체감하는 것은 단순히 알고 있던 것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방금 전까지 집어삼킨 오기를 토해내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다.

    우트가르드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엄청나게 봐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정말 우트가르드가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면 벨투리안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었을 테니까. 우트가르드는 애초에 골렘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보일 정도로 우트가르드는 벨투리안을 엄청나게 두들겨 패고 있었다. 차마 봐주고 있다고 말을 꺼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분명 빙룡의 주문은 ‘죽이지만 말고’ 였다. 우트가르드는 정말로  그대로 죽이지만 않고 있었다.

    어떻게라도 검을 휘둘러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막는 것보다 못막는 것이 훨씬 많았다. 사실 막아낸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그저 되는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우트가르드의 맹공을 살짝 막았을 뿐.


    벨투리안은 무력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런 것을 느끼기에는 너무 큰 차이였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앞에서, 오기 같은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5분이 채 되지 않아 벨투리안은 쓰러졌다. 그나마 뼈는 부러지지 않았다는게 다행이라고 할까. 이런 몸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었을 것이다.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얻어 맞은 벨투리안에게는  상황이 이렇게 다가왔다.


     끝났다고.


    이렇게 되고 나니 허탈했다.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그런 상념을 계속하는 것도 지쳤다. 벨투리안의 세계가 울렸다. 큰 세계라고 할 수는 없겠지. 정말 작은 세계였다. 작은 산과 오직 자신만이 남은 세계. 그 세계에 끼어들어온 거대한 것들을 더는 감당할  없었다.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온 것일까.

    우타가르드가 쓰러진 벨투리안을 안아들었다. 벨투리안에게는 반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손에서 솜뭉치를 놓지 않은 것이 마지막 기력이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빙룡의 인형이 되는 것일까? 우트가르드와 베르헬트처럼?


    어떤 자유의지도 갖지 못한 채 빙룡이 말하는대로 움직이며 사랑하며 증오하는 그런 인형이?

    우트가르드의 등에 업힌  끌려가는 벨투리안의 손에 쥐인 솜뭉치가 바닥에 쓸렸다. 더는 솜뭉치를 쥐고 있을 힘, 아니 마음조차 꺾인 순간 그 손은  이상 검을 쥐지 못했다. 천천히 손에서 솜뭉치가 떨어졌다.

    그리고 솜뭉치가 떨어지자 거대한 충격이 동굴을 덮쳤다.


    “크윽?!”


    우트가르드가 밑에서부터 퍼지는 충격에 당황하여 곧바로 자리를 이탈했다. 떨어진 솜뭉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멀리서 지켜보던 베르헬트조차도  힘을 쉽사리 버틸 수 없었는지 벽을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벨투리안의 눈에는 솜뭉치를 중심으로 천천히 공간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트가르드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얼린 채 버텼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은 상정 외의 것이었다. 우트가르드의 몸을 이루고 있는 얼음조차 쩌적하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벨투리안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벨투리안의 몸을 얼려 자신과 붙여서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얼음이 깨지고 벨투리안의 몸이 솜뭉치에게로 끌려갔다.

    우트가르드는 곧바로 얼음밧줄을 만들어 벨투리안을 잡아챘지만 우트가르드가 당기는 힘보다 솜뭉치가 끌어당기는 힘이 더 강했다. 그리고 벨투리안이 결국 솜뭉치에 도달하였고 우연이라고 하긴 어색하게 벨투리안의 손에 솜뭉치가 쥐어졌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모든 것을 끌어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대신 모든 것을 짓누르는  한 중력이 동굴을 덮었다. 솜뭉치가 웅웅거리며 강하게 진동하고 그 진동에 맞춰 대지가 울렸다.


    베르헬트와 우트가르드는 곧장 땅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버티는 것이 가능한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베르헬트는 어떻게든 팔로 땅을 밀어내며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간신히 고개를 드는 정도가 한계였고, 우트가르드는 저항조차 하지 못한  이미 온 몸이 부서지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멀쩡한 것은 오직 벨투리안 뿐이었다. 공간 자체가 왜곡 될 정도의 강력한 중력은 벨투리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벨투리안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미 한번 꺾인 벨투리안의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도망간다고 해도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다음에는 빙룡이 나를 쫓을텐데? 도망칠 수는 있는 것일까?

    싸움의 시작 전부터 이미 출구로 가는 길은 얼음으로 막혀버렸다.  중력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없었다. 벨투리안은 그저 솜뭉치를 든 채 의미없이 몇 걸음 걸었을 뿐이었다. 그 걸음에 도망을 친다는 적극적인 의도 같은 것은 없었다. 애시당초 벨투리안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었다.

    그리고 벨투리안은 곧 넘어졌다.

    지금 이 공간 전체에 가해지는 중력의 힘 때문에 얼음이 녹아 물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끄러진 벨투리안이 도착한 곳은 세미가 만들었던 뼈골렘의 흔적이었다. 이미 절반 쯤은 빙룡의 손에 의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지만, 벨투리안과 대화하느라 그대로 남은 것들이 있었다.

    벨투리안이 멍하니 거대한 뼛더미들을 올려보았다. 그 행동에 큰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벨투리안이 거대한 뼈에 살며시 손을 뻗어보았다.


    그리고  순간 작은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간신히 벨투리안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크기였다. 벨투리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의문도 갖지 않았다. 그저 구멍을 지나갈 뿐이었다.

    벨투리안이 구멍을 지나자 동굴에 가해지던 중력은 그대로 사라졌다. 베르헬트는 곧장 일어나 워프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뒤를 돌아보는 벨투리안과 베르헬트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베르헬트의 손이 닫기 직전, 워프게이트의 문은 닫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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