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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4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94/162)



〈 94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벨투리안이 곧장 우트가르드에게 말을 걸려했다. 물론, 빙룡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아직 반나절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벨투리안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트가르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의외인 일이였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여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궁금한게 있습니다.”


“…뭐지?”

“쯔르레이, 라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의 말에 새삼 자신이 이전에 쓰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물론 생하울라의 배신을 확인한 이후 버린 이름이었으니 큰 의미도 없을 거라 생각했었고. 벨투리안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가명… 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이 모습이 되었을 때 쓰던 이름이다.”

“당신이 지었습니까?”


“아니다. 그건  묻는 것이지?”

“…주인님을 만나뵈실 생각인거죠. 당신의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주인님께 말씀드려보십시오.”

의문이 드는 대답이었다.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물었으나 우트가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벨투리안을 안내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우트가르드가 안내한 곳은 세미가 있었던 공동이었다. 그곳에서 빙룡은, 뼈골렘의 잔해를 수습하고 있었다. 빙룡이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면 그에 맞춰 뼈들이 움직여 원래의 형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오오, 왔느냐.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구나. 나는 네가 3년 정도는 고민하지 않을까 생각했거늘.”


“…저는 인간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온터라.”

“곧 무뎌질거라.”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 네가 나에게 가진 것은 오로지 질문 뿐이 아니겠느냐?”


빙룡은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여전히 그 웃음은 인형이 짓는 것처럼 위화감 투성이였다. 빙룡 자신이 한  자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밝힐 때의 인간적인 표정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께서는… 내가 변하는 것이 세계가 깜빡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모습이 변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해할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부디 설명을….”


“거기부터?”


빙룡은 예상 외의 표정을 지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뻔히 벨투리안을 바라보는 그 표정은 방금까지의 표정과는 달리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었는데, 벨투리안조차도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아….”


빙룡은 지금, 벨투리안을 보고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아이가 이런 지진아였을 줄이야.”

순간 벨투리안은 울컥했다. 그건 멍청하다고 벨투리안을 업신여기는 얘기에 대한 화가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빙룡이 자신을 ‘내 아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 것 뿐이었다.


“내 조곤조곤 설명해주리라. 잘듣고 이해해보거라.”


빙룡은 벨투리안이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화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잘숨겼다하더라도 빙룡에게는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만. 빙룡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생각하는 아득한 시간이 흐르기 이전, 너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다. 울푸레가 한심하게 울어재꼈고  울푸레는 종적을 감췄지. 그리고 바르테스가 너를 발견했다. 나는 너를 보고 깨달았지.”

“무엇을 말입니까?”

“[너는 이 세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은 일종의 언령이었다. 강력한 말의 무게가 벨투리안을 덮쳤다. 그것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가 벨투리안을 짓누르는 압박을.

벨투리안이 침음성을 흘렸다. 빙룡은 그런 벨투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톡 짚어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벨투리안의 존재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숨어야 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용의 알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바르테스를 본 순간 너는 작아졌다. 크기를 맞춰줘야 했으니. 그리고 속으로  본질을 속이기 시작했지. 그렇게 너는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갔다. 그 순간을 내가 오래 보지 못했지만은.“

“….”

“그리고 너는 울푸레와 만났다고 했지. 울푸레의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울푸레는 네 의태를 풀어버렸다. 그리고 너는 지금의 상태가 되었지.”

“그건….”

“즉, 너는 지금 살기 위해서 의태를 유지하려는 상태와 네 본질을 되찾으려고 하는 두가지 상태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모습이 반복되는 것이지.”


복잡한 이야기였다. 빙룡의 말대로라면 이 상황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저는 큰 상처를 입으면 강제적으로 이 모습으로 고정 되어버립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 모습으로 있었던 적도 있고요.”

“네가 죽어서야 본말전도가 되니 당연한 것이 아니더냐. 그리고 네가 말한  오랜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채 해를 넘기지 못했을 것 같구나.”

빙룡의 말이 맞았다.


“세계란 것은 아주 바쁜 게으름뱅이라,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잠시 네가 보인다고 하여 곧바로 손을 쥐지 않는 것이라.”

“그런… 것이군요.”


“그런 것이여라.”

벨투리안은 빙룡의 말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것은  수 있었다. 알수록 느껴지는 것은 막막함뿐이었지만. 그러나 빙룡의 말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었다. 모습의 변화에 따라오는 가장 큰 부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무엇이더냐?”

“그저 본질을 숨기기 위해서라면, 어째서 내가 이런 모습임에도 원래는 남자의 모습을 취한 것입니까? 성별을 바꿔 숨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까?”

“아니다. 성별을 바꿀 필요 같은 것은 없었다. 네가 남자로 태어난  이유는 간단하거라.”


빙룡이 포근히 웃었다.

“내가 남자아이가 갖고 싶었거든.”

벨투리안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너의 본질이 암컷일 거라고 까지는 나도 알 수 없었으니.  부분은 불가항력이거라.”

빙룡은 변명하 듯 덧붙였지만 벨투리안에게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 이성적으로는 빙룡의 말이 맞는 것을   있었다. 이것이 빙룡의 잘못도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은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없었다. 용들이란 것은 어찌 이렇게 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재단해버리는 건지.


“그럼  인생은… 당신의 그런 바람 하나 때문에 이렇게 망가진 것입니까?”


“아가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죠.”

순간 빙룡의 얼굴이 씁쓸함이 스쳐갔다. 그러나 벨투리안의 눈이 쫓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빙룡은 금세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래, 맞거라. 나는  어미가 될 수 없다. 네 어미는 이미 죽어 흙이 되었고 여기 남은 것은 그저 한 마리의 용일지니.”

“그렇다면, 더는 저를 당신의 아이 취급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그것을 원하느냐?”


“네. 제 어머니는 아주 오래 전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인간이고, 저 또한 인간입니다. 비록 이런 꼴이 되었을지언정,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당신은 당신이 제 어미가 아니라하면서 저를 당신의 아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모순입니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다. 벨투리안이 말을 내뱉은 순간, 바뀌는 빙룡의 기운을 느꼈어야 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거라.”

빙룡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벨투리안에게는 빙룡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빙룡의 얼굴에는 싸늘한 분노가 차있었다. 벨투리안은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들어야할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더 들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런 말을 내뱉고 나서 그걸 들을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벨투리안 역시 고개를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작별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르헬트의 참격이 벨투리안의 뒤를 갈랐다.

“크윽, 무슨…?!”

하지만 태평스레 질문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아니었다. 베르헬트 뿐만 아니라 우트가르드 또한 벨투리안의 옆구리를 노리고 공격해온 것이다. 또다시 간발의 차로 피한 벨투리안이 외쳤다.


“무슨 짓입니까?!”


외침은 물론 빙룡에게 닿았다. 베르헬트도, 우트가르드도, 모두 빙룡의 수하이다. 그들은 오직 빙룡의 명에만 움직이는 존재. 당연히 이 일도 빙룡이 시킨게 분명했다. 빙룡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대답했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더는 너를 아이 취급하지 말아달라고.”

“그건…!”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그 감정만큼은 진실이었다고.”

“그게…!”

우트가르드와 베르헬트의 공격은 점점 치밀해져갔다. 벨투리안으로서는 피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러니, 더는 네가 그 특권을 바라지 않는다면 어쩔  없거라.”

빙룡이 뚜벅뚜벅 동굴의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내 아이가 아니니, 더는 배려해줄 필요도 없지 않느냐?”

그제서야 빙룡은 고개를 돌렸다.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빙룡의 표정이 보였다. 그건 눈치채지 않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강렬한 욕망을 담고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밖에.”

용은,


욕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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