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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93/162)



〈 93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언뜻 감동적이게 보이는 모자 상봉의 장면은 더는 없었다. 빙룡은 벨투리안을  껴안아준 이후 별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우트가르드는 벨투리안의 방에 남긴 채였다. 한동안  없이 생각하던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에게 말을 걸었다.


“너는… 알고 있었나?”


“지금 주인님과 대화하신 내용에 관해서라면, 아니요. 몰랐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번에 한 말은 질문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저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아 중얼거린 것에 가까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우트가르드는 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대답의 내용은 그다지 충실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벨투리안은 계속해서 우트가르드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우트가르드에게 하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되풀이하는 것에 가까웠다. 우트가르드는 계속해서 답을 했지만 벨투리안이 그걸 제대로 들었는지조차  수 없었다. 들었다 하더라도 크게 의미 있는 이야기 같은 것도 없었다.


답답해진 벨투리안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몸의 상처는 아직 남아있었지만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벨투리안이 우트가르드를 향해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


우트가르드는 말없이 벨투리안을 따랐다. 벨투리안은 순간 따라오지 말라고 입을 열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말한다고 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이다. 빙룡의 충실한 하인인 우트가르드는.

밖을 나서고, 빙룡의 둥지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에는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입구에 가까워지자 한쪽 벽이 허물어진 것을 발견했다. 원래 온갖 동물들의 뼈가 들어있던 곳이었다. 세미가 뼈골렘을 만들기 위해 부숴버린 것이 분명했다.

문득 벨투리안이 궁금해져서 우트가르드에게 물었다.


“이곳에 있던 뼈들은 결국 뭐였던거지?”

“주인님이 평소 모으시던 것들입니다. 한때 주인님의 가디언으로 일했던 자들, 혹은 주인님이 길렀던 것들, 아니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더는  수 없는 멸종된 것들의 뼈입니다.”

“…악취미로군.”


살짝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그렇다면 베르헬트도 언젠가 이곳에 박제된다는 걸까.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빙룡이 자신의 어머니라는사실이.

물론 빙룡은 부정했다. 자신은  때 벨투리안의 어머니였다고 했지만, 더는 아니라고 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용이란 것은, 어찌 이렇게나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인 것인가?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죽음까지 경험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끈을 부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감정은 거짓이 아니라고 한다. 이 어찌나 모순된 이야기인가!


벨투리안에게는 아쉽게도 추억할 어머니와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은 그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에게 어머니를 사랑했던, 사랑받았던 기억이 남아있었더라면 지금 이 상황이 참을 수 없이 끔찍하고,


기뻤을 테니까.

“…지독한 악취미다.”


빙룡은 자신이 더는 벨투리안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했지만 벨투리안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빙룡의 이야기는 네메이아와 네메시스가 같은 사람, 아니 용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빙룡의 사고방식이란 것이.

동굴 밖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뜻밖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헬트가 가만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었는데 우트가르드도 그렇고, 베르헬트도 그렇고, 세상은 벨투리안을 혼자 놔둘 생각이 없나보다.

벨투리안은 더는 어떻게 베르헬트를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평범하게 인사라도 해야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먼저 인기척을 눈치채준 것은 베르헬트였다. 아니, 그라면 이미 한참 전부터 벨투리안의 존재를 느꼈겠지만.

“쯔르레이.”


베르헬트가 벨투리안이 버린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벨투리안은 보지 못했지만 그 순간 우트가르드의 눈매가 살짝 변했다.


“그 이름은 버렸다. 벨투리안이라고 불러라.”


“그런가.”


“…괜, 찮은가?”

“의도를 알  없군. 더 이상 내게 그런 개념이란 것은 의미가 없다.”

대화가 잠깐 끊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벨투리안의 생각이 그가 건네주었던 주머니에 다다랐다. 벨투리안은 베르헬트가 억지로 떠맡긴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자네가 전해주라고 한 그 물건….”


말하던 도중 벨투리안은 말을 잠시 끊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헬트의 눈빛이 너무나 무심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건네주었던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는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벨투리안은 말을 멈추고 주머니 안에 든 것을 꺼내보았다. 흰 날개 모양의 브로치였다. 벨투리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 것은… 뭔가?”


“베르헬트 가문의 인장이다.”


“인장이라고?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알아서 처분하도록.”


어째서 자신에게 맡겼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베르헬트에게는 그때 그 방법 밖에 남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때와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자네의 딸에게 전해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의미 없는 일이다.”

문득 베르헬트가 빤히 벨투리안을 쳐다보았다. 베르헬트의 대답에 말을 잃었던 벨투리안은 살짝 당황했다. 베르헬트의 시선은 곧 떨어졌다. 곧 베르헬트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착각이었나보군.”


“…무엇이?”

“너와 내 딸이 닮았다는 것.”


쓴 웃음이라도 지어줬으면 좋았으련만.

“지금 보니 하나도 닮지 않았어.”

베르헬트는 그 말을 끝으로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벨투리안은 베르헬트를 잡을까 고민했지만, 그를 붙잡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없었기에 결국 손만 살짝 뻗었다 내릴 뿐이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벨투리안이 생각에 잠겼다. 베르헬트가 보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평범한 눈산이 보일 뿐이었다. 온통 하얗게 뒤덮인 나무들뿐이었다. 우트가르드는 그런 벨투리안을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고 날은 어두워지기를 준비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시간까지 계속해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벨투리안은 결국 다시 동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생각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빙룡을 보게 된다면 무슨 얼굴을 해야할지, 무슨 얼굴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르헬트와 말을 해보고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결국 베르헬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이 그의 마지막 부탁, 불러야 한다면 유언인 것을 들어주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베르헬트는 살아있는데도, 그것을 유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속죄인 것일까?   없었다.


그건 결국 자신이 다시금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지금 당장  수는 없겠지. 수해에 가야한다. 그리고 석양이 지지 않는 전장으로 가야 한다. 생하울라가 꾸미는 일도 밝혀내야 했고 저주, 아니 저주가 아니라고 했던가. 어쨌든 간에 이 몸에서 벗어날 방법도 찾아야 했다.


벨투리안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빙룡조차도 풀 수 없다고 했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자신의 친어미라고 하는 자, 울푸레를 찾는다면….


생각만 해도 두렵고, 끔찍한 얘기였지만 울푸레를 만난다면 뭔가 바뀔지도 몰랐다.


이제 다시 이곳을 떠나야할 시간이었다. 이곳에 머무른 것은 짧은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또한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빙룡에게 가야겠다.

아직 듣지 못한 것, 이해할  없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것에 관해서 제대로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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