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92/162)


  • 〈 92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벨투리안의 어머니, 울푸레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던 자.

    네메이아, 아버지가 넴이라고 불렀던 여자.


    벨투리안의 아버지 바르테스가 사랑한 여자.


    아버지는 어머니의 얘기를 자주 하시지는 않으셨다. 아버지는 항상 무뚝뚝했고 웃음기 없는 얼굴만을 아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 어머니의 얘기를 할 때면 그 얼굴에 씁쓸하면서도 행복한, 그런 웃음을 간혹 보여주곤 하였다.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러니까 결혼했겠지.

    그러나 벨투리안에게 어머니의 기억이란 것은 극히 일부의 것이었다. 분명 자신을 사랑해주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할 수 있었다. 아주 어려서 병에 걸렸을  어머니가 병간호를 해준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죽었다.


    몇 살 때였는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아주 어릴 때였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죽었고 다시는 보지 못했다. 얼굴은 더는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없는 종류의 질병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빙룡의 말은 거짓이었다. 진실일 리가 없다.


    자신의 어머니가 용이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떠날 리가 없지 않은가.

    “거짓… 거짓말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거짓이 아니느니라.”


    “당신이 정말로… 내 어머니였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깟 질병 따위, 용의 힘으로 치료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그럴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왜…?”


    “물론 나는 그걸 고칠 수 있는 힘이 있었느니라. 하지만 ‘내’가 왜?”

    “뭐…?”

    “빙룡 ‘네메시스’라면 고칠 수 있었다. 물론이느니라. 그러나 나는 인간 ‘네메이아’였다. 그런데 네메시스가 어째서 네메이아를 고쳐줘야 하지?”

    벨투리안은 대체 빙룡이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그 둘 모두 자신이라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시답잖은 말장난만 하고 있는거지?

    “인간 네메이아가 나였던 것은 분명하거라. 그러나 네메이아는 결코 네메시스가 아니거라. 아주 잠시간의 유희였지. 인간은 인간으로 죽는거다. 그렇기에 네메이아는 인간이었던 것이야.”


    아아, 드디어  수 있었다. 벨투리안은 드디어 빙룡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빙룡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한낱 유희였다고.


    일종의 소꿉장난인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소꿉놀이를 하 듯, 엄마 역할이 되어서 가족 놀이를 하는 것이다. 인간 놀이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벨투리안은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벨투리안의 아버지 또한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저 소꿉놀이의 상대였던 것이다. 자신은 아마, 그 소꿉놀이에 사용되는 아기 인형 정도겠지. 지독한 불쾌함, 허무함이 벨투리안을 덮쳤다.


    “당신이 정말…  어머니라고?”

    “아니거라. 나는  어미가 아니느니라. 네 어미인 건 인간인 ‘네메이아’지. 네메이아가 나의 일부였던 것은 맞으나 그녀는 죽었고 흙으로 사라졌다. 그러니 나는 네 ‘어미’였던 자가 될 수는 있으나 네 어미가  수는 없거라.”

    그 말로 확정지어졌다.

    빙룡 네메시스는, 벨투리안의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빙룡 네메시스의 아들, 같은 것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빙룡 네메시스의 인형 같은 것이다. 잘만들어진, 여자아이들을 위한 소꿉놀이용 인형 장난감.

    그 뿐인 것이다.


    “아니거라.”

    “무엇이 아니란 말씀입니까? 내가 인형이란 것이? 당신이 내 어머니가 아니란 것이? 대체 무엇이요?”


    벨투리안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허무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비록 오래전 죽어없어졌으나 사랑하던 가족이었다. 자신의 출생이 전혀 다른 끔찍한 일이었을지라 하더라도,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조차 아니었다. 존재의미조차  수 없는 자신이었다. 이젠 가족들마저 기만으로 덮어져버렸다. 이런 사실 같은 것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빙룡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바르테스와 만난 것은 꽤나 우연이었다.”


    “…?”

    “바르테스가 잡은 사슴을 뺏으려고 했지. 그  3일을 굶어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거든.


    바르테스는 고기를  나눠줄 테니 칼을 치워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한 손에 칼을 들고 고기를 뜯어먹었지. 아마 거의 대부분은 내가 먹어치웠을 거다.

    떠나려는 나를 잡고 네 아버지가 말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동행하지 않겠소?’ 하고. 미친 얘기였지. 자신한테 칼을 들이민 여자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나도 그 때는 잘모르겠다. 왜 그 얘기를 수락하게 됐는지.


    우리는 꽤 오랫동안 같이 다녔어.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지. 어느 날 그가 말하더군. ‘나는 곧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오.’ 나는 아쉽지만 즐거웠다고 대답했지. 그런데 그가 말했어. ‘같이 가주겠소?’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곧 알아차렸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 말에 내가 알았다고 대답한 이유를.”

    “….”

    네메시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엄청나게 추운 설산으로 들어가게 됐지. 거의 매일 네 아버지를 욕했단다. 이렇게 추운 곳으로 데려왔다고.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배타적인데다가 음식도 맛없어. 그리고 네 아버지는 더럽게 무뚝뚝하고. 로맨틱함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남자였지. 심지어 일족의 규칙인지 뭔지 때문에 나와 바르테스의 아이는 사생아 취급을 받는다고 했지.”

    “그럼 왜….”


    “그러게 말이야. 네 생각처럼 소꿉놀이였다면 그건 참 엄청나게 재미없는 소꿉놀이였지.”

    빙룡은 웃었다. 그건 아까까지 짓고 있었던 다정한 미소와는 다른 조금 유쾌한 얼굴의 미소였다. 그러나 빙룡의 그 미소는 곧 자조적인 얼굴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런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 8년이었나… 마을에는 이미 내가 불임이라는 얘기가 확실히 돌고 있었지. 내 아이가 사생아가 될 일은 애초에 없었던 거야. 생길 일이 없었으니.”


    벨투리안은 당황스러웠다. 빙룡 네메시스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분명히 단순한 소꿉놀이가 아니었던가? 빙룡은 마치 정말로 감정이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은둔생활을 시작했단다. 그때쯤이었지. 내가 정체불명의 폐병에 걸린 것이. 하긴 그렇게 추운 곳에 갑자기 와서 살기 시작했으니 오히려 병에 걸린 것이 너무 늦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지. 그런데 어느 날, 바르테스가 작은 알을 가져왔단다.”

    “그… 알이….”


    “그래, 바로 너였단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거라. 이것은 용의 알이라고. 바르테스가 이것을 가져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말투가 바뀌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치 정말로 인간이 말하던 것처럼 평범하게 말하던 빙룡은 다시금 이상한 말투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전혀 위화감을 못느끼고 있던 벨투리안은 그제서야 네메시스가 평범하게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알을 품었단다. 바르테스는 날 보고 안타까워했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지. 그리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알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고.”

    빙룡이 똑바로 벨투리안을 보았다.

    “네가 태어났단다.”


    어쩐지 벨투리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는 바르테스를 닮았단다. 처음 발견한 자가 그였기 때문이겠지. 마을에는 지금까지 내가 임신한 것을 숨기고 은둔했던 거로 밝혔고. 어차피 신경 쓰는 사람도 크게 없었지만 말이야. 나는 그제서야 내 아이를 가질  있었지.”


    그제서야 빙룡은 뭔가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빙룡의 얼굴이란 것은 전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를 하는 빙룡의 표정은 풍부하고 인간적이라서 오히려 더욱 이해할  없었다.

    “너는 평범한 인간처럼 자랐다. 처음에 걱정하던 바르테스도 결국 너를 받아들였지. 나는 너를 애지중지 키웠고 너는 결코 이상한 모습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를 만나서 행복했단다.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루는 네가 열병에 걸려 앓아누웠지. 그때는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내가 차라리 대신 아파주고 싶어했단다. 밤새 끓어오르는 열을 식혀주고 손을 잡아주었단다. 너의 작은 손이 내 손을 마치 마지막 동앗줄이라도 되느냥 붙잡았지. 네가 다 낫고 나서야 나는 제대로 잠을  수 있었단다.”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병이 악화되었단다. 아직 어린 너는 상황도 모른 채 내 손을 붙잡고 울었지.”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로 너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단다. 비록 내 배 아파서 낳은 아이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너를 사랑했단다. 하지만 나에게는 방도가 없었고 나는 결국 바르테스에게 너를 부탁한 채 갈 수밖에 없었지.”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죽었단다.”
    [그리고 나로 돌아왔느니라.]

    네메시스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한동안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먼저 입을  것은 의외로 네메시스였다.

    “네 말대로 그건 분명 소꿉놀이였다. 심지어 재미도 없었지. 분명 너는 인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 어머니는 분명 죽었지. 그러나,”

    네메시스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는 벨투리안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천천히 벨투리안을 껴안고 입을 열었다.

    “그 감정은 분명 있었고 그 삶은 진짜였느니라.”

    벨투리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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