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1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91/162)


  • 〈 91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죽음…이라고요.”


    “너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존재거라.   울푸레의 울부짖음이 꽤나 듣기 좋았지.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썩어갔으며 바다가 눈물을 흘렸다. 오랜 비원이 망가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비원이라고요…? 나를 갖는 것이 비원?”


    “아니, 거기에 너의 존재라는 것는 의미가 없는 것이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 얘기하는 것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비원인지 뭔지, 내가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변한다는 것이, 세상이 깜빡인다는 것이 무엇인지 단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빙룡의 말은  수가 없었다. 벨투리안도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언성을 높혔다. 벨투리안이 빙룡을 두려워하고 있단  생각하면 이는 꽤나 이변인 장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빙룡은 화내지 않았다.


    “네 존재 이유가 궁금하더냐?”

    빙룡은 다정하게 웃었다.  웃음이 대체 누구를 위해서인지 알 수 없으매, 벨투리안은 그저 떨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다정한 웃음을 가진 채 빙룡이 싸늘한 비수를 꽂았다.

    “당장 얼마 전까지 죽음을 바란 것이 사치스러운 고민이구나.”

    “그, 그걸 어떻게.”


    “내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을 숨길 생각하지 말거라.”


    벨투리안은  말이 없었다. 확실히 빙룡의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죽음을 맞이할 생각을 했으면서 정작 지금 와서는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분노하다니. 마치 사춘기 계집아이마냥 보일 일이었다. 부끄러움에 말을 못잇는 벨투리안이었다.

    물론 벨투리안의 고민이 단순한 사춘기 아이의 것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빙룡 앞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하잘 것 없는 고민과도 같은 것임은 틀림없었다. 자신의 존재이유가 뭐냐니, 그런  빙룡에게 묻는다고 나올 리가 없었다.

    문득 벨투리안에게는 지금까지의 의문보다 더한 의문이 떠올랐다. 이곳에 온 이후로 빙룡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듣지 못한 이야기도 많이 남았다. 그런데 도대체 빙룡은 어떻게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걸까?

    단순히 용이라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빙룡은 자신에게 너무나도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일개 한 인간(물론 인간이 아니라고는 하다만)에게 갖는다고 하기엔 이상  것이었다. 설사 용의 피를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벨투리안이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까? 원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어째서 내 어미에 대한 것 조차 알고 있습니까? 그저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것만이 아닌 것을,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버려진 알에서 태어났다고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분명 자고 있다고 했고 내가 살던 곳은 당신의 영지 또한 아닙니다.”


    “드디어 물어야  것을 묻는구나.”


    빙룡이 드디어 다정한 웃음을 거두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모양새였으나 무언가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벨투리안은  얼굴에 마음이 편해졌다. 오히려 웃는 얼굴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내가 너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지. 그렇지 않더냐.”

    “무슨 말인지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울푸레가 알을 품었다고 들었을 때, 나는 그 알이 영락없이 유벤투스와의 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그 알의 아이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어 그 모습을 보게 된 일은 없었지만, 이렇게 깃털 달린 아이가 태어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빙룡은 천천히 벨투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는 어린 영애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유벤투스는 꽤나 오래 울었어. 울푸레는 그런 유벤투스를 단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고 그와의 아이라고 말하지도 않았지만, 유벤투스는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군.”

    벨투리안은 당황했다. 그래, 분명 자신의 어미가 울푸레라고 한다면(그것이 몹시 끔찍한 일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아비도 따로 있을 것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이 자신의 진짜 아비의 이야기라는 것인가?

    “나는 네가 유벤투스의 아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유벤투스는 울푸레의 아이라는 것만으로도 너를 꽤나 귀이 생각하고 있더군. 그치는 항상 그랬지. 토이카라는 그 반쪽짜리 용한테도 말이지.”


    “실례지만.”

    말을 끊은 것은 물론 벨투리안이었다.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었으니.

    “대체 유벤투스라는 분이 누구십니까?”

    “누구긴 누구겠느냐.”


    아, 드디어 벨투리안은 저 빙룡이 다정한 웃음을 거두고 내민 차가운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마치 인형이 짓는 것마냥 어색한, 그래서 더욱 감정이 돋보이는 표정을 하던 빙룡의 얼굴에서 명백한 감정이 띄워져 있었다.

    “울푸레를 사랑한 유일한 용, 언제나 늙지 않는 뱀.”

    그건 분명

    “그리고 이 나 네메시스의 오라비. 빙룡 유벤투스다.”

    애증이었다.

    ~

    “그가… 내 아버지란 말입니까?”


    “두 번 말하는 것은 좋아하느니라. 나는 네가 유벤투스의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라. 유벤투스한테서 깃털 달린 아이가 태어났을 리가 없지. 그렇지 않느냐?”


    유벤투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네메시스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감정이 실려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벨투리안 조차도 네메시스가 유벤투스에 대해 평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때문에 벨투리안은 말을 삼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가 내 아비라면, 내가 빙룡의 조카가 되는 것인가?

    아쉽게도 벨투리안에게는 그러한 추측을 입에 담을 용기가 없었다. 애당초 빙룡은 그 추측을 부정하고 있던 것이었으니. 그래서 입에 담은 것은 유벤투스에 관한 질문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깃털….”

    “그래, 깃털이다. 깃털 달린 용이  하나 뿐은 아니지만, 유벤투스도 울푸레도 그런 건 달고 다니지 않지. 네가 깃털을 달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더냐?”

    “잘…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느니라.”

    한껏 기대감을 올려놓고는, 빙룡의 대답은 황당하게도 모른다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에게는 빙룡에게 되물을 권리가 없었다. 그럴 용기도 없었고, 웃음을 흘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벨투리안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너에 대해서 알았느냐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이야기거라. 나는, ‘나’는 줄곧 자고 있었노라. 그러나 ‘내’가 자고 있었다는 것이 ‘나’ 전부의 이야기는 아니거라.”


    “무슨…?”

    “용은 자고 있었다. 빙룡 네메시스는 자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 ‘네메이아’는 자고 있지 않았다. 네메이아는 모험가였고, 여전사였다. 네메이아는 우연히 만난 슈라헤의 바르테스와 사랑에 빠졌다. 네메이아는 스스로를 버리고 슈라헤의 일족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메이아는 불임이었다. 그리고 네메이아는 곧 버려진 알을 주웠다.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 자신의 아이로 삼았다. 그러나 네메이아는 혹독한 설산에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없었고, 곧 병에 걸려 사망했다.”

    빙룡이 다시금 다정하게 벨투리안을 쓰다듬었다. 벨투리안은 그 차가운 손길에서 결코 느껴지지 않을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빙룡의 공허한 눈동자에서 느껴지지 않는 감정에 소름이 끼쳤다.

    빙룡은 지금 고백하고 있었다.


    “내 아이에게 나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암사자’라고. 운명이 이끄는 것을 느끼지 않느냐?”


    “대체… 대체… 그게 무슨….”


    “오랜만이구나, 벨투리안.”

    내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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