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88/162)


  • 〈 88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힘들어서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벨투리안이 호성을 내질렀다. 세미의 모습은 헤어지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느꼈다. 세미에게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하리만큼 기분나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어라, 아가씨. 꽤나 오랜만이네요! 기운이 넘치는  보니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내셨나봐요!”

    세미는 태연자약하게 안부인사를 건네왔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 인사에 대꾸해줄 만큼 벨투리안은 여유롭지 않았다.

    “네 놈! 네가 분명히 내 어미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겠지?!”

    “빙룡이 벌써 거기까지 입을 열어준 건가요? 꽤 이쁨 받은 모양이네요. 크큭. 네, 맞아… 윽!”


    세미의 말을 끊은 것은 우트가르드였다. 애초부터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는 듯 회복한 몸을 들이밀어 세미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세미의 뒤에서 거대한 얼음 골렘이 일어나 호응하기 시작했다. 세미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생각보다 가뿐하게 공격들을 피해내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세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분명히 세미는 자신에게 어미에 대해 얘기했고, 빙룡은 자신을 우르테가라고 불렀다.


    ‘우르테가’


    슈라헤가 죽인, 자신의 조상이 죽였다고 하는, 울푸레의 딸.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의 어미가 울푸레라고 하는 이야기가 된다. 그걸 대체 어떻게 세미가 알고 있었는지 물어야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잠깐, 난 녀석에게 들을 게 있…!”

    “네 사정은 중요치 않다.”

    우트가르드를 저지하려고 몸을 움직이려는 벨투리안을 베르헬트가 틀어잡았다. 확실히 세미에게 묻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었으나, 빙룡의 가디언들에게는 필요없는 이야기였다.벨투리안이 발버둥치며 움직였지만 베르헬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젠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울푸레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요지부동이었다. 베르헬트는 대꾸도 없이 그저 벨투리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빌어먹을! 세미! 말해라! 내 어미에 대해  알고 있지?!”

    이 순간 벨투리안에게는 세미가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다고 했던 이야기 같은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그저 정보! 자신의 정체와 이 저주의 정체, 그리고 자신의 어미에 관한  뿐이었다.


    하지만 세미도 완전히 회복한 우트가르드의 맹공을 버티기는 힘들었는지 대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또다른 모습인 골렘과 합을 맞춰 공격하는 우트가르드는 이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게다가 온통 얼음으로 뒤덥힌 이 곳이니만큼 지형이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세미는 그 작고 어린 소녀의 모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여 공격을 피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는지 반격을 가하는 모습 같은 것은 보기 힘들었다.

    “크윽… 상성이 안좋다고요. 이런 골렘 같은 놈들은….”


    세미가 작게 불평했다. 불평은 곧장 앞에서 그녀를 공격하던 우트가르드 밖에 듣지 못했다. 우트가르드는 대꾸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세미의 불평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언데드들을 조종하며 어둠의 마력을 이용해 싸우는 마법사들이다.


    하지만 골렘은 영혼이 없고 이 곳에는 준비된 언데드 같은 것들도 없었다. ‘아직은’. 게다가 마법을 쓰는데 시간이 필요한 세미에게 잠깐의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맹공을 가하는 우트가르드는 골렘이 아니다 할지라도 어려운 적이었다. 그럼 점에서 따지면 베르헬트가 더욱 큰 문제였겠지만. 어쨌든 흑마법사인 세미에게 골렘인 우트가르드는 최악의 상대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기에 미리 시체들을 이용해서 박살을 낸 것이었는데 베르헬트의 부활 때문에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시간은 한정되어있었다. 중요한 것은 빙룡이 돌아오기 전에 도망가는 것.빙룡이 ‘눈 감아주는’ 시간 내에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마법조차 쓸 틈이 없는 것은 큰 문제였다. 결국 세미는 억지로 답을 만들어냈다. 아주 잠깐, 피하는 걸 멈추고 손과 입을 움직여 마법을 시전했다.


    그 순간 우트가르드의 골렘이 세미의 몸을 뭉개버렸다.


    벨투리안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정 같은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꽤나 오랜 시간 같이 다녔던 자가 눈 앞에서 그대로 뭉개지는 것은 뜬 눈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세미는 죽지 않았다.


    피가 흐르고 온 몸이 뭉개져 피와 내장이 질질 흐르는 모습으로 세미는 살아있었다. 아니, 그게 과연 살아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세미는 움직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아아… 꽤나 아프다고요…. 이런 무식한 공격은.”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었다. 온 몸이 뭉개진 소녀가 통째로 박살난 입을 연 채로 말을 하는 것은.

    “하지만 덕분에 끝났다.”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동굴이 흔들리고 쿵쿵 거리면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변을 느낀 우트가르드는 곧바로 다시 세미를 향해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맞아주지 않았다. 세미의 찢어지고 뭉개진 배가 그대로 우트가르드를 향해 달라붙어 버린 것이다.


    우트가르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순간 세미가 달라붙은 자신의 몸을 그대로 녹여 떼어내버린 것이다. 세미의 몸에 달라붙었던 우트가르드의 몸은 녹아내려 이미 세미에게 먹히고 있었다.


    우트가르드는 상황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상대는 쉽게 죽지 않는다. 그리고 저 뭉개진 몸이 벌써 조금씩 회복을 하고 있었다. 살점이 다시 붙고 천천히 원래의 형체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속도는 굉장히 더뎠지만 지금처럼 상대가 대응한다면 답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처음에 계속 공격을 피하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저 상태가 쉽게 유지되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본다면…!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을 끄는 것은 세미의 목적이었다.


    순간 날아온 거대한 뼛조각이 우트가르드를 강타했다.


    벨투리안도 베르헬트도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굴의 바깥쪽에서 나타낸 것은… 뭐라고 불러야할까. 과연 그 비참한 모습의 존재를 뭐라고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굳이 말하자면 그건, 우트가르드와 같은 골렘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망자들의 뼈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본다면, 우트가르드에게는 같은 골렘이라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그것은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미가 불러낸 것은 바로 빙룡의 취미로 모아둔 온갖 동물들의 뼈로 만들어낸 골렘이었다. 그리고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이미 죽은지 너무 오래되어 흩어진 영혼들의 잔향.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더러운 모욕이었다.


    우트가르드는 아주 오랜만에 침음성을 흘렸다. 자신을 강타한 뼛조각에는 강한 원념이 담겨있었지만 골렘인 자신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골렘 그 자체였다.


    영혼을 더럽힌다던가, 원념으로 공격한다던가, 흑마법사의 그런 수작들은 골렘인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하게 압도적인 힘이라면 골렘에게도 통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세미가 만들어낸 뼈골렘의 재료는  빙룡이 모아둔 것이다. 그 생전에도 위용을 뽐냈을 수많은 생물들의 시체로 만들어진 골렘은 단순하게 ‘강했다.’


    순수하게 그 안에 담긴 어둠의 힘을 제하더라도 물리적으로 강한게 문제였다. 우트가르드는 곧바로 눈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골렘들을 만들어냈다. 당장은 세미가 문제가 아니었다. 세미를 공격하기에는  뼈골렘을 막아서기도 힘들었다. 우트가르드는 곧장 뼈골렘에게 달려들어 뼈골렘의 공격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세미는 태연하게 피와 내장을 흘리며 베르헬트와 벨투리안에게로 다가왔다. 아직 그녀의 배는 닫혀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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