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87/162)


  • 〈 87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화가 난다.”

    짧은 침묵  베르헬트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것은 감정을 잃은 이가 불렀다기에는 지독히도 어색한 분노의 노래였다.


    “증오스럽구나. 붉은 피가 내 눈을 더럽히고 눈조차 얼리는 추위가  가슴을 덮는구나.”

    “끝도 없이 불타오르는 선혈의 분노가 나를 뒤덮고 열기가 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 정도로 데운다.”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증오가 나를 뒤삼키고 분노가 나를 타오르게 한다.”

    그 입에서 나오는 증오의 노래는 놀랍도록 정적이었다. 그가 정말 분노하고 있다고는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 느낌에 베르헬트가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놀랍도록 아무렇지도 않구나.”

    “끝 없는 분노가 차가운 파도에 씻겨나가고 열렬한 증오는 얼어붙어 그대로 부서져 가루로 흩날리는 구나.”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마치 인형이 된  같은 기분이다.”


    짧은 독백이 끝을 내렸다. 그 사이 베르헬트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마르코와 아폴리온, 그리고 우트가르드와 벨투리안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베르헬트의 압력에 눌린 것이라기엔 기이할 정도로 베르헬트에게는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곧 시체들이 입을 열었다.

    “무슨 개소리야…?”


    목소리는 컸지만 여전히  말에는 어떠한 영혼도 담겨 있지 않았다. 똑같이 영혼을 잃은 남자에게는 그것이 너무 쉽게 느껴졌다. 아니,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는 시체들이구나. 아니면  내가 시체인가? 그건 더는 중요하지 않겠구나.”


    마르코와 아폴리온의 시체들은 그대로 가만히 베르헬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흰소리를 더는 들어주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베르헬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벨투리안은 놀라서 소리쳤다.


    “안돼!”


    벨투리안의 걱정도 당연했다. 자신과 우트가르드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었다. 시체들의 전투력은 생전을 훨씬 웃돌았다. 갓 깨어난 베르헬트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시체들의 선전은 거기까지였다.

    베르헬트는 적의 돌진을 아주 가볍게 피하고는 마르코의 손을 붙잡아 버렸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시체들의 싸움은 사실상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르헬트는 마르코를 붙잡은 채로 그대로 휘둘러 그대로 아폴리온에게 던져버렸다. 마르코의 체중을 이기지 못한 아폴리온은 그대로 쓰러졌고  잠깐 사이에 베르헬트는 곧장 마르코의 허리춤에서 백상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베었다.


    단 한순간이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우트가르드와 벨투리안을 그렇게나 고전시켰던 두 시체의 목이 동시에 떨어졌다. 허무한 결말이었다. 시체는 시체로 돌아갔다.

    “덧없구나.”


    하지만 아직 갈 길을 잃은 시체는 하나  남아있었다. 베르헬트의 표정은 지독한 무표정이었다.

    그가 잃은 것이 표정은 아니었을진데.

    목이 잘린 시체들은 다행히도 다시 일어나거나 한다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빠른 속도로 썩어가기 시작했다. 결코 시체가 썩을 일이 없는 이 동토에서도 흑마법의 최후가 예외없이 다가온 것이었다. 시체들은 썩어서 결국 천천히 가루로 흩날리더니 이내 곧 사라져버렸다.

    벨투리안의 심정은 복잡했다. 그들과는 결코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 것도 아니었다. 악연이었고 심지어 자신이 죽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움직이고 다시 죽는 걸 보는 것은 꽤나 마음에 큰 흔들림을 가져왔다. [웃기지도 않아. 한심한 것.]

    하지만 벨투리안은 이내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적어도 가만히 상념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완전히 털어버릴 수는 없다지만 우선 마음 한 구석에 치워버렸다. 베르헬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럴 지도 몰랐다.

    벨투리안은 아픈 몸을 일켰다. 그리고는 시체들이 있던 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베르헬트를 향해서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평범하게 안부를 물어볼까. 괜찮나?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떤가? 하고 농담이라도 던져봐야 할까.
    그러나 그의 안부를 물으려던 벨투리안은 곧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베르헬트의 얼굴은 지독히도 무표정했다. 아무런 감정의 파편조차도 느낄  없는 얼굴이었고 벨투리안은 대체 그런 얼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수 없었다. 벨투리안을 바라보던 베르헬트의 눈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바라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벨투리안을 두고 베르헬트는 말 한마디 하나 건네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박살난 우트가르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트가르드는 그런 베르헬트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었다. 그런 우트가르드를 향해 베르헬트가 대뜸 백상을 들어올렸다.


    벨투리안에게는 막을 힘이 없었다. 잠깐 소리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베르헬트는 백상을 휘둘렀다. 우트가르드의 목이 몸통과 이별을 고했다.

    “어째서!”

    우트가르드의 박살난 몸이 곧 가루로 변해 사라졌다. 도대체 왜 같은 빙룡의 수호자가 된 베르헬트가 우트가르드를 해치는가. 벨투리안은 지나치게 빠르고 이해할  없는 전개에 당황하여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그러나 곧 벨투리안은 입을 벌리고 우트가르드를, 우트가르드의 목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트가르드의 잘린 목으로부터 천천히 얼음으로  신체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습은 신비롭다기보다는 그로테스크하고 징그러웠다.

    “이, 이건.”

    “백상의 저주를 되돌렸다.”

    베르헬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이건 친절인 것일까? 그에게도 감정이 남은 것일까? 사실 그는 알려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것은 일말의 메아리일까. 벨투리안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자라난 몸은  이전의 우트가르드의 신체를 그대로 본따고 있었다. 곧 완전히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간 우트가르드가 눈을 뜨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베르헬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평소와 완전히 같은 무기질적임이 느껴져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당신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미켈라 베르헬트.”

    우트가르드는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는지 전혀 느낄  없는 목소리로 베르헬트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러나 베르헬트의 대답 역시 만만치 않았다.

    “네 처분은 빙룡께서 정할 것이다.”

    “물론 그 분의 뜻대로.”

    어색하고 위화감드는 장면이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명의 사람으로 존재하던 베르헬트는 죽었고 이제 남은 것은 빙룡의 인형인 베르헬트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형이  다른 빙룡의 인형과 마치 처음부터 서로 수호자였던 것처럼 대화하고 있었다. 거기엔 인사조차 없었다.  둘은 차분하게 서로의 안부가 아닌 처벌을 얘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닌 것 같군요. 침입자는 이들이 끝이 아닙니다.”


    “안쪽이군.”

    그들은 곧바로 또다른 침입자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대한 상의 같은 것은 없었다. 우트가르드는 곧바로 안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멍하니 이 지독히도 연극  같은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벨투리안은 곧 자신의 몸이 들리는 걸 깨달았다.

    베르헬트가 자신을 들어올린 것이었다. 일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베르헬트에게는 더 이상 같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발버둥 칠 힘도 없었고 그럴 몸상태도 아니었다. 또 다른 침입자의 존재에 대해서 불평하고 싶었다.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얌전히 베르헬트에게 업힌 채 그대로 그들과 길을 같이 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곧 전에 벨투리안이 하늘을 보고 우르테가로 변했던 그곳에도착했다. 그리고 곧 벨투리안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멍하던 정신을 확 깨울 수밖에 없는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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