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6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86/162)


  • 〈 86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벨투리안이 짧은 단검을 손에 쥐었다. 선공은 당연스럽게도 적들의 것이었다.

     더 거대한 몸집의 침입자가 우트가르드를 향해, 그리고 다른 하나의 침입자가 벨투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트가르드는 잠깐 사이에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듯 했지만 여전히 백상의 탓인지 제대로 움직이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싸웠던 아까보단 조금 상태가 나아졌다. 적어도 아까와는 다르게 한명만을 상대하는  또한 다행이었다.


    벨투리안은 조금 체력이 빠진 상태였지만 마냥 쉽게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살벌하게 들어오는 적의 공격을 하나하나 빠지며 틈을 엿보았다. 그런데  다시금 위화감이 드는 걸 깨달았다.

    적의 공격은 분명 살벌했다. 이는 제압을 할 생각은커녕 그대로 자신을 베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살벌함에 비해 빈틈이 너무나도 컸다. 실력을 생각해보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괴리감이었다.


    “쫄래쫄래 그만 피하고 포기하시지.”


    그리고 여전히 그 말에 대해서는 무언가에 대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인형을 상대하고 있는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많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찌를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솜뭉치를 들고 있었으면 모를까 이런 단검으로는 제대로 그걸 노릴 수 없었다. 게다가 한순간이라도 실수한다면 죽는 것은 자신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트가르드의 도움 또한 바라기는 어려웠다. 우트가르드는 상대가 하나로 줄어서인지 그럭저럭 잘버티고 있었지만 이쪽을 도와줄 여유까지는 없는 것이었다.


    결국 완벽한 순간에 적의 빈틈을 노려서 단 한 번에 적을 죽이든 제압하든 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방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벨투리안은 아직 단 한번도 상대의 공격을 맞지 않았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점점 상황이 안좋아지고 있단 것은 자못 명백해보였다. 우트가르드는 상태가 좋지 않았고 벨투리안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반대로 침입자들은 꽤나 몸을 움직였을 텐데도 전혀 지쳐보이지 않았다.


    “크윽….”

    “이제 지치기라도 한 셈이냐.”


    벨투리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을 쓸 시간에 적의 빈틈을 하나라도 노리는  더 중요했다. 그 순간이었다.


    유리가 깨지는  한,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 한 알 듯  듯 한 소리가 동굴에 울려퍼졌다. 우트가르드의 몸  쪽이 부서진 것이다. 그 순간 벨투리안을 상대하고 있던 침입자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다.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저 소리의 정체도 아직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충격에 빠져 움직이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벨투리안은 그저 싸움에 집중한 채 적의 빈틈만을 노리고 있었다. 적이 고개를 돌린 그 순간이 바로 지금까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벨투리안의 짧은 단검이 적의 심장을 꿰뚫었다.

    끝이다.


    단검이 푹 하고 소리를 내며 들어갔다.

    그리고 곧 벨투리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인간의 살을 뚫는 감각이 아니었다.


    케이크를 자르듯 푹신한 감각이 벨투리안의 손을 감싸쥐었다.

    “감히!”

    곧 벨투리안은 칼에 얻어 맞은 채 그대로 날아가버렸다.

    피를 토한  벽에 박힌 벨투리안은 고통으로 제대로  가누기도 힘든 와중에 한가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자신이라고 해도 칼로 후려쳐서 이렇게 날려 벽으로 던지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한 일이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니다. 그럼 무엇? 대체 무엇? 그걸 찌르는 감각은 대체 무슨 감각이었지?

    그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벨투리안은 우트가르드에게 벌어진 일을 볼 수 있었다. 가녀린 우트가르드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그대로 끊어진  반쯤 부서진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곧 이어 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우트가르드를 상대하고 있던 침입자는 후드가 벗겨진 채로 우트가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모습.


    곧 침입자가 뒤를 돌아 벨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야 벨투리안은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들에게 아무런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는가, 그 푹신한 감각은 대체 무엇이었는가, 왜 상대하는 이는 빈틈투성이였고, 심장을 뚫려도 죽지 않았는가.


    답은 간단했다.

     얼굴,

    마르코였다.


    ~


    깨닫고 나서  수 있는 것은 한가지 였다. 무슨 일이든 간에 이 것이 세미, 아니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분명 자신은 아무 힘도 없다고 했을터이지만, 흑마법사의 말은 애당초 믿지 않고 있었다. 무슨 목적인지는   없었지만 죽은 그들의 시체를 이용할  있는 이는 그 밖에 생각나지 않았다.[아님 누구겠어, 멍청한 것.]


    그러나 여러모로 위기인 상황이었다. 우트가르드는 벌써 부서졌고 의식이 있는지도  수 없었다. 자신은 피를 토한 채 쓰러져서 제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설사 움직일 수 있다고 심장을 찔러도 죽지 않는 언데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다행히도 피를 토한 채로 쓰러진 벨투리안을 향해 마르코, 그리고 아마도 아폴리온일 것인 시체가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저 벨투리안을 잡아 우트가르드 옆에 던져놓았을 뿐이다.

    “이 것들은 어떻게 할까?”


    “팔아버리면 되겠지.”


    시체들이 자신이 죽은지조차 모른 채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 모습은 지극히 우스꽝스러웠고 또한 역겨웠다. 하지만 벨투리안은 그저 지켜보는 것말고는 할  있는  없었다. 그 때, 마르코가 백상, 베르헬트를 향해 움직였다.


    곧 벨투리안은 마르코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베르헬트의 시체에서 백상을 뽑아내려는 것이다. 안된다. 그런 짓을 해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지만 해서는 안될거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베르헬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란 말인가.


    저 검에서 깨어난 이후의 베르헬트는 아마도 그 이전의 베르헬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베르헬트는 베르헬트였다. 시체들이 그를 건들게  수는 없었다.


    벨투리안이 미약하게나마 입을 열어 소리쳤다.

    그만둬!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오는 것은 오직 핏물 한줌과 기침 뿐이었다.


    그리고 마르코가 백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아주 손쉽게 빠져나와 마르코의 손에 잠겼다.

    “엄청난 한기로군. 무슨 검이지, 대체?”


    “글쎄요…?”

    “아무튼 챙긴다.”

    마르코는 백상을 마치 자신의 검이라도 되는 것마냥 허릿춤에 차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벨투리안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그리고 벨투리안의 앞에 마르코가 다가오기 직전에.

    뚝 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마르코와 아폴리온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놀랐다. 아니, 놀랐을 것이다. 그들에게 그럴 정신이 남아있었다면.


    얼어붙은 베르헬트의 시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킴에 따라 붙어있던 서릿발들이 떨어지고 얼음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천천히 일으켜진 몸을 살피는 베르헬트는 곧 자신의 몸이 완전히 얼어붙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베르헬트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부서진 우트가르드와 쓰러진 벨투리안, 그리고 그들 앞에 서있는 이들과 그들이 들고 있는 검을 보았다.

    베르헬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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