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그… 얘기는 정말인가? 정말 편지에 그렇게 써져 있는건가?”
“저에게는 거짓을 말하는 기능은 탑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 혹은 제가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의 선고였다.
우트가르드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얼굴이 농담이었습니다. 하고 웃으며 답해주는 비현실적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매정했다.
고통스럽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마을로 돌아가 생하울라를 붙잡고 묻고 싶었다. 이 편지의 얘기가 사실이냐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게 사실이냐고.
너와 나는 친구가 아니었냐고.
그러나 너무 늦었다. 너무 오랜 길을 걸어왔다.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대체 너는 내게 왜 이름을 지어준 것일까. 문득 잊고 있었던 자신의, 아니 그 몸의 이름의 뜻이 떠올랐다.
쯔르레이의 뜻은 종달새였다.
자신의 이름을 지어주고는 서로 암사자와 종달새라니, 하며 웃지 않았던가.
쯔르레이, 황금 종달새, 울푸레, 우르테가.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더는 모른 척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우트가르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어쩌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바보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르테가는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은 확실해졌다. 생하울라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생하울라는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이제는 왜? 라며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생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던 쯔르레이에게서 어떤 강렬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건 배신감도 증오도 분노도 우정도, 그리고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오기였다. 아이의 떼쓰기와 다를 바가 없는 아주 철없고 어린 그런 감정.
그냥 네 맘대로 두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아주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어린 애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몸은 참으로 그런 생각에 맞는 몸이 아니었는가?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몸도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죽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순순히 죽어주지 않겠다.
네가 무엇을 원했던, 무엇을 노리던 간에 결코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좋다. 네가 원하는 대로 길을 따라가주마.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이 어리석은 것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 길의 끝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네가 바래던 그 무언가가 아닐 무언가가.
생하울라.
기다려라.
이 내가 갈 것이다.
쯔르레이가 아닌 벨투리안이.
생하울라가 지어준 그 이름을 버리며 벨투리안이 말했다.
~
하루가 지나 정신을 추스린 벨투리안이 일어나서 처음 살핀 것은 역시 자신의 모습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깃털과 비늘이 가라앉아 평범한 인간 소녀의 모습이었다. 자신이 이전까지 쯔르레이라고 칭했던 모습이었다.
앞으로 더는 그 이름을 쓸 일이 오지 않겠지.
“일어나셨나요.”
벨투리안을 반겨준 것은 우트가르드였다. 고저 없는 인형의 목소리가 차게 벨투리안의 귀를 때렸다. 문가를 바라보자 눈을 감은 채 문에 기대어 서있는 우트가르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 일어났다. 잠을 자고 있었다면 미안하군.”
“골렘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이 깨기를 기다렸을 뿐.”
여전히 우트가르드는 쌀쌀맞았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히 자신에게 악감정을 가진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벨투리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설령 악의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신경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빙룡님을 뵐 수 있는가?”
“주인님은 오늘 출타 중이십니다. 아주 잠깐 후에 돌아오실 겁니다.”
벨투리안은 지체없이 바로 빙룡과 만날 수 있음을 물었지만 우트가르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빙룡이 아주 오랫 동안 자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무엇보다 용과 인간의 시간 감각이 극히 다름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언제쯤 빙룡이 돌아올지가 걱정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말한 잠깐은 길어도 이틀이 채 지나지 않을 테니.”
“그래, 고맙다.”
다행히 우트가르드는 그런 벨투리안의 생각을 알아채고 바로 대답해주었다. 덕분에 벨투리안은 한시름 걱정을 놓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빙룡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건 익숙한 일이었다.
벨투리안은 생각했다.
과연 이후에 수해의 마녀 글룸라를 찾아가는 것은 옳은 일인가?
생하울라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어제 깨달았다. 그러나 글룸라의 편지에는 그런 내용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물론 무언가 그 둘만이 알 수 있는 암호로 자신을 죽이라고 전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굳이 강철부리 부족에게로 보내는 편지를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만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일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리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상기하고 있어야 했다.
결국 벨투리안은 고민 끝에 글룸라를 찾아가기로 정했다. 적어도 생하울라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아내야 할테고 그 길은 함정임과 동시에 단서인 것이니, 도망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하울라는 자신이 이 편지를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들려보냈을 것이다. 만약 무슨 일을 벌이기로 정했다면 암호를 쓰기보단 직접적으로 전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룸라 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확률이 낮았다.
글룸라를 찾아가자. 그리고 그 후 강철부리 부족에게로 향하자. 물론 편지를 그대로 전해줄 생각은 없었다. 생하울라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 두 번째 과제였다. 물론 첫 번째는 이 몸에 담긴 저주를 푸는 것이지만….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우르테가라는 이름의 무게가,
나 자신의 정체가,
이 몸에 담긴 의미를.
아니, 물론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이렇게나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실을.
우르테가. 울푸레의 마지막 딸.
슈라헤가 죽여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아직 태어나지 못한 자’
그게 나라고?
분명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도
아무렇지 않은 걸까?
마치 어제는 비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그 때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 몸이 변해 깃털이 솟고 비늘이 돋아날 때는, 끔찍했고 충격적이었다. 단순히 몸의 격통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했고 미치도록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그저 과거의 개울가에서 돌을 던지던 시절의 이야기만큼이나 덧없고 사소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자신은 그 중요한 일들을 잊고 멍하니 있었는가.
생하울라에 대해서 분노할 적에 이 모든 일에 대해서 혼란을 느끼지는 않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우르테가인가?
나는 쯔르레이인가?
아니다, 나는 벨투리안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울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공허한 소리의 울림만이 가슴을 흔들었다.
그 흔들림은 너무 미약해서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벨투리안은 다시금 깊은 상념에 빠질 것만 같았다.
“손님이 왔군요.”
벨투리안의 생각을 끊은 것은 우트가르드의 조용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