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80/162)


  • 〈 80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피가 흐르지도 않았고, 푹하고 사람의 형체가 무너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지를 뻗은 채 누운 베르헬트의 가슴을 백상이 뚫고 나와있었고 그 중심으로 서서히 흰서리가 끼고 있었다. 베르헬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렸고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다. 이미 의식은 없는 듯 베르헬트에게는 아무런 신음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쯔르레이에게 묶인 구속이 풀렸다. 쯔르레이는 갑자기 풀려나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검에 박힌 채 흰서리가 끼어 죽어가는 베르헬트를 보며 주머니를 쥔 손을 꽉 쥐어잡았다.


    죽어가는 베르헬트, 아니 분명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깨어난다면 베르헬트는 과거의 베르헬트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겠지.

    베르헬트에게 정 같은 건 없었다. 의리 또한 없었다. 그와의 관계는 그저 이익관계였을 뿐이었다. 정을 쌓을 시간도, 의리를 쌓을만한 일도 없었던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했다.

    그와 길을 함께한 것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원하던 때에 그가 자신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빙룡을 찾기 위한 길로 이용햇고, 자신은 생을 연명할 기회로써 그를 이용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렇게 가슴이 시린 이유는 뭘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쯔르레이는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엘핀과 함께 지냈을 때, 너무 빠르게 정을 들이는 법을 배워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병아리야, 아파보이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운  다가오는 빙룡에게 쯔르레이는 아무런 대답도  수 없었다.

    “그는… 베르헬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게야. 곧 정신을 차리고 계약을 이행하겠지.”

    “이런… 방법 밖에 없었던 걸까….”


    이는 질문이 아닌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빙룡은 대답하였다. 그것이 결코 쯔르레이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을 대답임을 암에도 불구하고.

    “방법이야 많았노라.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걸 찾기에는 남은 시간이 아해에게는 너무 짧았을 뿐이니라. 하필이면 그가 찾은 방법이 이 몸임이 희극일지라, 기억하지 않아도 좋거라. 세상에는 얼마든지 대가 없는 일이 있으니라. 그러나 이 천 것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질투가 많아 대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거라.”

    쯔르레이에게는 분노를 토할 기력도, 용기도 없었다. 무력감을 느낄  빙룡의 뻔뻔한 이야기에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더는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쯔르레이는 그저 두려웠을 뿐이다. 이미 한번 죽음을 기대한 몸임에도.


    “병아리는 지쳤구나. 조금 쉬어라. 얘기는 나중으로 미루고자 할지니.”


    빙룡은 그런 쯔르레이를 조롱하듯이 휴식을 권했다. 이것이 과연 정말 조롱인지, 아니면 빙룡에 대한 악감정이 쌓인 쯔르레이의 편협적인 시선인지는   없었다.

    빙룡은 천천히 더 깊은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갔고 이윽고 쯔르레이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것은 얼어붙은 베르헬트와 쯔르레이 그리고 우트가르드 뿐이었다. 다리가 풀려 일어나기 힘든 쯔르레이의 옆에 우트가르드가 와 섰다. 우트가르드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일어나려는 쯔르레이를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그저 무표정하게 가만히 쯔르레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제대로 일어선 쯔르레이에게 우트가르드는 고개를 살짝 틀어 동굴 안으로 가리키고는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는 뜻임이 명백했지만 메이드의 태도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건방진 태도였다. 물론, 빙룡의 시종을 인간의 잣대로 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왕궁에서 살았던 시절이 길었던걸까.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조금 낯설었다.

    우트가르드는 힘이 없는 쯔르레이에게 배려 따위를 보여주지 않았다. 빠른 걸음걸이로 그대로 걸어가는 우트가르드를 쯔르레이는 그저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우트가르드는 동굴 안에 뚫려 있는 하나의 방을 쯔르레이에게 안내해주었다.


    대체 동굴 속에 어떻게 이런 방을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방이었다. 왕궁에서 봤던 르베니의 방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우트가르드는 쯔르레이가 방에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는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순간 당황한 쯔르레이는 갇혔나 싶어서 다시 문을 열어보았지만 문은 평범하게 열렸다. 우트가르드는 이미 사라진 상황이었다.


    지친 쯔르레이는 방 한 구석에 놓여진 거대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옷을 벗고 정돈을 한다던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침대는 지금까지 누워본 그 어떤 침대보다도 푹신하고 이불은 보들보들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베르헬트에 관한 일, 저주에 관한 얘기, 대체 누군지 알 수 없는 자신의 어미에 대한 것까지. 그러나 곧 쯔르레이는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육체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미 이 육체는 한계까지 피곤했다. 그러나 지금 피곤한 것은 육체가 아니었다. 머리가, 아니 가슴이 너무나도 피곤했다. 더 이상은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고뇌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 비어지지 않는 머리를 어거지로 비웠다.

    눈을 감자 세상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쯔르레이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날씨였습니다. 너무나도 고요한 하늘에 작은 쯔르레이는 공포를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윽고 구름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검은 구름들이 쯔르레이의 날개를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왔다.

    [나의 종달새야, 어딜 그리 급히 가는거니.]


    아, 어리고 약한 쯔르레이가 하늘에게 고했습니다. 검은 용이 나를 쫓아와요. 부디 나를 숨겨주세요.


    그러자 흰 구름들이 검은 구름을 무르고 쯔르레이에게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구름으로 된 날개를 달고 쯔르레이가 멀리 멀리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이제 안개비가 쯔르레이의 날개를 적셨습니다. 쯔르레이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다가와 쯔르레이를 안으며 말했습니다.


    [가여운 종달새야, 여기에 네가 몸을 뉘일 따뜻한 둥지가 있단다. 그곳에는 햇빛이 너를 반기며 바닷가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단다.]


    아, 공포에 떠는 가녀린 쯔르레이가 태양에게 고했습니다. 검은 용이 나를 잡았어요. 부디 나를 날려주세요.

    그러자 태양이 아름다운 햇빛을 내리쬐 쯔르레이의 날개를 말려주었습니다. 젖은 날개가 마른 쯔르레이는 곧장 검은 용에게서 벗어나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이제 천둥번개가 쯔르레이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길이 막힌 쯔르레이의 위로 검은 용이 천둥번개를 막으며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종달새야, 나의 둥지로 오렴. 거기에는 네가 좋아하는 황금이 가득하며 아름다운 무희들이 너를 위해 춤을 출거란다. 그리고 그들 중 너보다 아름다운 이는 아무도 없을 거란다.]

    아, 조용히 눈물 흘리는 쯔르레이가 바다에게 고했습니다. 검은 용이 저를 둘러싸고 있어요. 부디 저에게 길을 열어주세요.

    그러자 바다가 물을 갈라 길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쯔르레이는 검은 용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다시금 떠나갔습니다.


    이윽고 쯔르레이는 아름다운 둥지에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집에 도착했습니다. 쯔르레이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검은 용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나의 종달새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데려가겠다.]


    아아, 그곳은 쯔르레이의 둥지가 아니었습니다. 검은 용이 종달새를 위해 꾸며둔 둥지였습니다. 이제는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검은 용이 종달새를 껴안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쎄게 껴안은 것일까요,

    종달새는 품 안에서 죽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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