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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9/162)


  • 〈 79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그리고는 빙룡은 그 조막만한 손가락을 세 개 들어올리고는 말했다.

    “아니, 세 그릇.”

    빙룡의 말에 갑작스레 베르헬트의 용살검 백상이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의 의지를 따라 응하듯이.

    “첫 그릇은  딸이다.”

    “마이카…?”

    “네 말대로  비늘 한 조각만을 받고  심장의 일부를 내어주겠노라.”


    “아무런 조건도 없다고?”

    베르헬트는 당연히 마냥 좋다고 반기지 않았다.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데 이유가 없을 리가 없었다. 베르헬트의 반문에 빙룡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초월자도 아닌 어린 인간이 용의 심장을 견딜 수 있을는지? 내 심장을 먹으면 두 가지 길이 있겠지. 병은 낫되 온 몸이 얼어붙어 죽거나, 살아나되 아무런 감정도 목적도 없는 나의 얼음 인형이 되거나.”


    빙룡의 눈사위가 우트가르드를 가리켰다. 우트가르드는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그대로 있을뿐이었다.


    빙룡의 말에 베르헬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은 즉슨, 용의 심장을 갖고 돌아간다 할지라도 마이카를 온전하게 낫게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쉽사리 절망하는 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가지 그릇이 있다고 했지.”

    “그래,큰 것아. 똑똑하구나. 두 번째 그릇을 들을테냐?”

    “들려주시오.”


    “두 번째 그릇은 더욱 더 간단하지. 네가 날 죽이고 그 심장을 꺼내 가는 것이다.”


    베르헬트는 침묵했다.  번째 이야기는 조롱이었다.


    “주인이 없는 용의 심장은 아무런 영향도 없는 철저한 영약 덩어리지. 비록 얼어붙어 죽는 길은 피할  없되 운이 좋으면 멀쩡하게 살아나고 강력한 힘까지 손에 넣을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나를 죽일 수 있어야겠지만 말이야.”


    베르헬트는 한숨을 쉴 여유조차 없었다. 적어도 용을 죽인다면 마이카가 온전하게 살아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용은 전의 이 백상의 주인이 대체 어떻게 죽였던건지 의문이  정도로 거대하고 강인한 존재였다.

    베르헬트는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적으로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자신이 용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설사 죽이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마이카가 온전하게 살아날지는  수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베르헬트가 침음성을 흘리며 마지막 대답에 희망을 걸었다.


    “…세 번째를 들려주시오.”


    “간단하다. 네 심장에 그 검을 찔러넣어라.”


    “나를 조롱하는 것이오?”


    “어리석구나, 아가야. 너는 내게 조롱당할 가치가 없느니라. 나는 그저 너에게 계약을 제안하는 것이다.”


    “계약?”


    그리하야 빙룡은 비로소 도달했다는 듯이. 아까 전에 지었던 웃음보다 더욱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미소를 지었다. 베르헬트는 그제서야 아까의 웃음은 사악한 것도 뭣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악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그건 적어도  정도의 미소는 되어야 했다.
    “기꺼이, 네가 내 비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른다면, 네 영혼이 얼어붙고 감정은 죽으며 행복조차 복속되며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에 통탄하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베르헬트는 침묵했다. 빙룡의 이어질 말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하면 네 딸은 살아날 것이다. 강제로 주어진 대가 없는 초월자의 삶을 살게 되겠지만 감정을 잃지도 않을 것이며 족쇄를 차지도 않을 것이고 인형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내 딸이 치를 심장의 대가를 내가 치르란 뜻이로군.”

    “똑똑하구나 큰 것아.”

    베르헬트가 조용히 아주 잠시간의 시간을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나 매력적이었나?”


    그의 말에 나온 것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 농담의 낌새는 결코 웃음기가 담겨있지 않았다.

    “여전히 당돌하구나, 나는 고결한 인간을 싫어한다. 그네들은 사명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기에 망설임 없이 내게 검을 들이대지. 그러나 나는 이기적인 인간을 좋아한다. 네놈처럼 오직 자신의 딸만을 위해서 나라를 버린 인간 같은 이들을 말이지.”

    베르헬트는 침묵했다. 아무리 그라도 더는 농담을 이어나갈 기세를 가지진 못한 것 같았다.


    “내 비늘을 갖고, 딸을 위해서 용을 잡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허해줄 나라가 있을 리가 없겠지. 그런 왕이 있다면 기꺼이 그를 광인이라고 부르겠네.”

    “내가 그 계약을 받아들인다면 내 딸은 분명히 낫는 것이겠지?”

    베르헬트의 말에 쯔르레이가 입을 열어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는 결코 베르헬트에게 닿지 않았다. 이번에는 빙룡이 손을 써서 막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베르헬트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


    “내 이름,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걸고 맹세하지.”

    그 순간 이 계약은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용의 이름, 존재를 걸고 맹세함은 결코 깨어질 수 없으며 깨지는 순간 존재를 잃어버려 평생을 방황하게 되는 영혼의 소멸보다 더욱 끔찍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너는  계약을 받아들인 순간,  계약을 행했음을 후회하고, 네 딸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평생 내 곁에서 존재해야 한다.”

    지독한 악취미였다.

    딸을 위해 스스로를 바치는 계약의 대가란 그런 것이었다. 딸을 구했음에도 기뻐하지 못하고, 더 이상 딸을 사랑할 수 없으며 스스로가 딸을 구한 것조차 후회하게 만드는 그것은, 계약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베르헬트가 잠시 내리떨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쯔르레이를 보았다. 지긋이 쯔르레이를 바라보던 베르헬트에게 쯔르레이가 욕설을 내뱉었다.  어리석은 선택을 되돌리기 위한 발버둥이었지만 그리 의미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러니까 좀 더, 마이카와 닮아보이는 군.”

    “이 바보 자식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나.”

    “웃기지마. 절대 안들어 줄 거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그런 쯔르레이의 말을 무시하고는 품을 뒤져 무언가가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그리고는 빙룡에게 붙들려 움직일  없는 쯔르레이의 손에 그걸 얹어주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왕국 아라곤에 들러서 마이카에게 이걸 전해주게. 내 이름을 대고 이걸 보여준다면 들여보내  거야. 그리고는… 내가 죽었다고 전해주게나.”

    “안들어준다고 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마웠다. 잠시뿐이지만 덕분에 마이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부디 네 저주가 풀릴 수 있기를 기원하겠네.”


    베르헬트가 백상을 들고 다시금 쯔르레이를 등지며 빙룡 앞에 섰다.

    “계약은 확실히… 이행해야 할 것이오.”

    “물론이다, 내 ‘것’아. 나는  것에게는 관대하느니라.”


    “구체적으로  딸을 어떻게 낫게 해줄 것인지 말해주시오.”

    “네가 나의 비늘로  심장을 찌른  뽑아져 나온  심장을 먹일 것이다. 더 이상, 너에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지.”

    “그럼… 분명히  딸이 낫는 것이겠지?”

    “이 몸은 거짓말을 못하느니라.”


    더 이상은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베르헬트는 백상을 들었다. 그 검은 스스로를 찌르기에는 지나치게 길어 스스로를 찌를 수 없었다. 베르헬트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그대로 땅바닥에 꽂아버렸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받아들이 듯이 검을 받았다.

    땅바닥에 꽂힌  검을 향해서 베르헬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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