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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8/162)


  • 〈 78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는 머뭇거렸다. 무엇을 물어봐야 할까.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머뭇거리는 걸까. 어쩌면 빙룡에게서도 답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쯔르레이는 또다시 절망할 수 밖에 없어서일까?

    머뭇거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는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빙룡이 마음을 돌리기 전에 쯔르레이는 빨리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나는… 흑룡의 저주로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 저주를 풀 수 있습니까?”


    빙룡은 잠시 말이 없었다. 뻔히 쯔르레이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텅 빈 듯한 눈을 쳐다보게 된 쯔르레이는 순간 저 눈 속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쯔르레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빙룡의 투명한 목소리가 쯔르레이의 귓가를 때릴 때였다.

    “나는 너에게 세 가지 답을 줄 수 있다네. 그러나 아마  가지 모두 자네가 기다리던 대답은 아닐 거라고 생각되는 군.”

    “무엇이든 좋습니다. 사소한 단서라도 괜찮습니다. 부디 답을 내려주시길.”


    빙룡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시 내뱉었다. 한숨이었다. 그것에 어떤 의미가 담긴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숨에 공기가 좀 더 차가워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록 한숨만이 늘을 이야기지만 원한다면 들려주도록 하지, 경청하려무나.”


    [첫째, 네 몸이 변한 것은 저주가 아니다.


    둘째, 나는 네 그것을 풀 수 없다.

    셋째, 네 어미는 살아있는 것이 맞다.]


    쯔르레이는 따귀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고,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익숙한 절망이 찾아왔다. 그러나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놀라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당신은 마음을 읽을  있습니까? 저는 제 어미에 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쯔르레이가 세미를 죽이지 않고 이곳까지 데려왔던 것이 바로 그 이야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저주가 어미의 죄악과 관련이 있다고 세미가 말했고, 그 진위여부를 밝히기위해서 빙룡을 찾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세미는 지금  곳에 없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녀의 진위여부를 밝힐 수 없기에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런 쯔르레이는 곧바로 어떻게 빙룡이 그걸 알 수 있었는지 물었지만 빙룡은 딴소리로 대답했다.

    “병아리야, 어린 얘기를 하는구나. 네가 병아리라면 닭이 있지 않겠느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끌끌끌… 답답한 병아리구나.  더 깃털을 날리며 생각해보려무나.”

    빙룡의 그 말에 쯔르레이는 답답함에 속이 탔지만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마치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닫혔기 때문이다. 쯔르레이는 입을 열어보려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자 병아리 얘기는 잠시 그만하고 그 쪽의 큰 것과 한번 얘기해볼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더냐,  것아.”

    빙룡은 고개를 들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베르헬트가 천천히 빙룡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내 이름은 미켈라 베르헬트, 왕국 아라곤에 충성을 맹세한 빙해 기사단의 단장이오. 그러나 당신 앞에서 이런 하잘것없는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베르헬트가, 조용히 검을 들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미카엘 베르헬트의 아버지인 미켈라 베르헬트일 뿐이오.”

    쯔르레이는 경악했다. 베르헬트가 용의 심장을 노리고 이곳에 왔다는 것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압도적인 존재를 보고서도 그럴 용기가 남아있다는 것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설마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무찌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걸까?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얕은 생각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는 빙룡이었다. 결코 이렇게 쉽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할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애초에 약점이 있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러나 다행히도 베르헬트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검은 든 베르헬트는 그 검을 그대로 땅바닥에 꽂아버렸다. 베르헬트의 검은 마치 이 얼어붙은 땅과 하나되듯이 꽂혀들어갔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쯔르레이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것을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입이 지금은 없었다.


    “이 검, 알고 있겠지.”

    “네 검이 이 비루먹은 육신의 비늘 한 조각이라는 것은 이 대지에 네가 발걸음을 찍은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큰 것아.”


    놀란 것은 쯔르레이뿐이었다. 오직 이 자리에서 쯔르레이만이 몰랐던 사실인 듯, 우트가르드 역시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베르헬트와 검을 맞댄 시점에서 이미 검의 정체를 눈치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내  마이카가 지금 알 수 없는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나는 그 병의 치료제가 용의 심장이란 것을 듣고 당신을 죽여 그 심장을 가지러 왔소.”

    이번에야말로 쯔르레이는 놀라서 앞으로 몸을 뛰쳐나가려고 했다. 미친 짓이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무언가 강한 억제력이 쯔르레이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쯔르레이에게서 나오는 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뿐이었다.

    “재밌구나, 그 포부를 지금 밝히는 것은 네가 결코 그럴 수 없단 것을 알고 있어서 일 것이야. 그렇지 않나,  것아.”

    “처음에는 분명 그런 생각이었지.”


    베르헬트가 답지 않게 쓴웃음을 지었다.

    “이 검, 왕국 아라곤의 비보, 드래곤 슬레이어, 서리거인이 연마한 용살검, 백상. 솔직히 말하자면  검이 있더라면 적어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소.”

    “현명한 아해로다. 네 검의 전 주인은 아해가 아홉은 되어야 간신히 검을 맞댈  있는 실력자였다.”

    “그렇소, 인정하겠소. 나는 당신을 이길  없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제안, 아니 부탁을 하려 하오.”

    “듣지 않아도 보이는 구나.”


    “이 검을 드리겠소. 당신의 심장의 일부를 내어주시오.”

    쯔르레이는 이제와서는 발버둥 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소리였다. 저것과 당신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 둘 모두 어느 것이 더 용의 화를 돋굴지 알 수 없을만큼 얼토당토 않는 소리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베르헬트의 말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었다.

    “당신의 크기를 보고 생각했소. 설사  내가 당신을 죽이고 심장을 취해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 딸이 절반은커녕 십분지일이라도 제대로 먹을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런 거대한 크기라면 아주 작은, 극히 일부분이라도 괜찮소. 한 인간이 먹을 정도의 양을 받아갈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추측했소.”

    베르헬트는 당당하게 말했지만 그 또한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갖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그 후 보여준 빙룡의 반응은 놀라웠다.

    “하하하하…!”

    여태 무표정했던 빙룡이 소리를 내어서 깔깔대며 웃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베르헬트도 쯔르레이도, 심지어 우트가르드조차 얼이 빠져서 빙룡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생애 일백 팔십만번의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하기를 지겹게 느끼는 동안에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보는구나. 세상에 너 같은 인간이  생애에 수십명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기회를 얻은 자는 네가 처음이려니. 유벤투스가 말한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야.”

    가장 먼저 당황을 추스린 것은 베르헬트였다. 우트가르드가  주인을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베르헬트는 다시금 입을 놀렸다.


    “내 얘기는 결코 제안 같은게 아니오. 간청이지. 나에게는 그저 당신에게 부탁하는  밖에 답이 없으니까.”

    “그래, 큰 것아. 네 당돌함에 축배를 올리며 한 그릇 대답을 올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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