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몸에 대한 것을 바로 알아채는 것은 예상 내의 일이다. 호수의 요정이라는 쥬느비에브도 바로 알아본 것을 용이 못알아볼리 없었다. 그러나 당황하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몸이 떨려왔다. 떨리는 몸을 억지로 붙잡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나는 울푸레의 후손, 용사냥꾼의 일족 슈라헤의 마지막 생존자입니다.”
빙룡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설사 무슨 반응을 보였더라 하더라도 과연 쯔르레이가 그걸 알아챌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것이 되려 쯔르레이의 긴장을 덜어주었다.
쯔르레이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일족에서 받은 명을 따라 생 산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깨달았습니다. 무언가에 의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나의 또 다른 일족들이 사라졌다는 것을요. 그리고 나는 급히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빙룡의 눈이 작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우트가르드만이 주인의 변화를 눈치채고 작게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고요한 날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산맥 위를 뒤덮을만큼 거대한 용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쯔르레이가 작게 벅찬 숨을 내쉬었다.
“검은색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났다. 쯔르레이는 더는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입을 열어 숨을 토해내려하자 목이 메인 듯 말은 나오지 않고 가슴이 시리듯이 아팠다.
그러나 빙룡은 재촉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빙룡은 아주 짧은 이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전부터 이미.
쯔르레이가 고통스레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고 베르헬트는 조용히 쯔르레이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빙룡만이 초연히 그 자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고, 또는 수십일이 지난 것도 같았다. 고요한 눈공기 속에서 빙룡의 시종이 그 작은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작은 커튼으로 빙룡의 앞을 가렸다. 전혀 가려지지 않았지만은.
빙룡이 살짝 고개를 움직여 쯔르레이를 바라보았다. 쯔르레이는 처음으로 빙룡의 시선을 제대로 마주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세로로 찢어진 거대한 동공은 그 크기만으로도 쯔르레이를 족히 넘는 수준이었다. 쯔르레이는 가슴을 옥죄던 고통이 사라지고 온 몸에 지독한 공포가 새겨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낯설지 않은 기분이었다.
[학이 말하되, 작은 뱀은 맛이 없도다.]
빙룡이 돌연 말했다.
그리고 세상을 눌러앉듯 느껴지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괴리감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은 쯔르레이와 베르헬트는 이윽고 이 거대한 공동을 차지하던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던 공포도, 온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압박감도, 마치 세상의 역사에 자신을 강제로 씌워넣는 듯하던 존재감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갑작스레 강한 호흡곤란을 느꼈다.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쿨럭거리던 둘은 곧 다시 호흡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사라진 것만큼이나 갑작스레 다시 돌아왔다.
“치워라, 우트가르드.”
그리고 곧 두 사람은 아름다운, 아니, 아름답다기보다는 아직 여린 목소리의 미성이 귀에 박히듯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곧 쯔르레이는 작은 커튼을 몸에 두른, 쯔르레이보다 조금 큰 키일까, 아직 작은 어린 아이를 보았다.
얼음 같이 투명하고 긴 머리카락에 그 눈은 마치 텅 비어있어서 손을 대면 그대로 통과할 것 같은 빛을 띄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이 어린 아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른 척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무겁게 눌러앉던 존재감을 가진 것이 이런 작고 여린 것으로 변했다는 괴리감에.
아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빙룡에게서 눈을 떼고 그 옆의 작은 빙룡의 시종에게 눈을 돌린느 것 같은 일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묻혀 그 순간 존재조차 할 수 없던 것에게는.
그러나 지금은 마치 돌멩이를 쳐다보듯이 쉬웠다. 우트가르드는 그 손에 어린 아이의 옷으로 보이는 옷가지들을 들고 서있었다. 그러나 방금 어린 아이의 말에 순순히 옷을 든 채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모습을 취하는 것은. 얼마만이더냐? 금붕어가 어항을 깨고 나와 지렁이의 몸을 취하는 것은? 유쾌하도다. 그러나 차악하구나. 어찌 그러더냐? 노란 병아리야. 이 모습이 허경한 듯 하더냐? 새총에 맞은 딱따구리 같은 낯바닥이구나.”
말과는 달리 쯔르레이의 얼굴을 창백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인간은 대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쯔르레이 또한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도망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어리석은 반복일 뿐이었다.
적어도 아까와는 달랐다. 고통도 두려움도 압박감도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앞에 있는 것은 빙룡이 아니라 작은 어린 아이였다. 우습게도 자신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그 둘의 본질을 알고 있기에 쉽사리 입을 열기 힘들 뿐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쯔르레이는 자신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에 순간 놀랐다. 잠깐 사이에 목소리가 마치 하루종일 소리를 내지른 것처럼 쉬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시간은 아니었다.
“당… 신은 빙룡 네메시스가 맞습니까?”
“그대도 알고 있을 것이야, 병아리야. 묵종하는 것은 그리 좋은 태도가 아님을 인정하지. 허나 확실한 진실을 타도하는 것 또한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야. 가끔은 복종이 미덕이고 부자유가 진실일 때가 있는 법이지. 그래 내가 빙룡 네메시스네. 조금 수다스럽고 생각했나? 옆의 큰 것은 얼굴이 살짝 질색했구나.”
빙룡 네메시스가 보여주는 인간의 얼굴이란 것은 여전히 전혀 반응을 알 수 없게 무표정했으나, 그 입만큼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마치 말이란 것을 처음 배운 어린 아이처럼 빙룡은 입을 계속해서 열어재꼈다. 용의 모습일 때 결코 열리지 않던 입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말의 무게에 짓밟힌다는 것은 참으로 개도한 일이로다. 늘 새로이 지평을 확대하는 것은 참 지끈하고 기통한 일일지어다. 그래, 가끔은 숨을 참지말고 내쉬어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때가 필요한 법이지.”
“기다리게나, 어미새가 먹이를 토해내는 것을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굴종하며 기다리게나. 아직은 말이야. 잠시간 내가 말의 자유를 느리고 있을 때말이다. 비천하고 미개하며 또한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불쾌하고 쾌락적인 일이라네. 가끔은 이 어린 언어를 사용하매 늙어가는 것을 보는 안락함을 느끼고 싶어.”
“아, 이 얼굴은 늘 생각하되 참 허기지군. 그렇지 않나? 투명한 눈이라는 건 징그러운 것이야. 이 눈은 늘 네들을 반사하지. 병아리는 무엇을 보았나? 아무 것도 보지 못했구나. 그럴만도 하지. 너는 텅 비었으니까.”
“무엇이 비었느냐고? 네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냐. 그런 것이야. 누가 봐도 그럴 것이야. 세상은 텅 빈 존재들만 있는 어항이거든. 그래 내가 너무 많이 떠들었나? 아직은 짧아. 하지만 기다려주는 이들을 위해 조금은 일찍 전개하도록 하지. 그래, 내가 빙룡 네메시스네. 혹시 아니면 그것의 파편이거나.”
“무엇이 궁금하더냐? 병아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