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는 고전하고 있었다. 상대는 무한히 재생하는 골렘인데다, 체급 차이도 심각했다. 작은 쯔르레이는 간신히 공격을 계속 피하고 있었고, 간간히 공격을 성공하기도 했지만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일 뿐, 큰 의미는 없었다.
골렘은 거대한 몸체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날렵했다. 멍청하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쯔르레이의 움직임에 맞춰서 공격하는 거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우선은 최대한 베르헬트와 소녀의 곁에서 골렘을 떼어놓기 위해 달렸다. 다행히 골렘은 쯔르레이를 잘따라와주었지만 그 사이에 쯔르레이가 골렘의 팔에 뭉게질뻔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힘싸움을 하면 진다. 골렘의 공격을 막아서는 건 불가능했다.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반면에 골렘은 맞아도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금방 회복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결코 이길 수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분투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골렘을 유인했다. 골렘은 이미 세 번 팔이 부서졌고 두 번은 한쪽 다리가 무너졌다. 골렘이 팔을 휘둘러 날리는 얼음덩이들을 미처 전부 피하지 못해 이미 상처를 좀 입었지만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그러나 ‘분투’했다는 것은 결코 이겼다는 뜻이 아니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쯔르레이가 골렘의 팔을 네 번째로 부쉈을 때 였다. 부숴진 팔의 잔해가 쯔르레이에게로 떨어졌다. 바로 위에서 떨어진 눈덩이들을 쯔르레이는 피하지 못했다. 곧 엄청난 속도로 떨어진 눈덩이들이 다시 골렘을 향해 달라붙었다. 쯔르레이와 함께.
쯔르레이는 골렘의 팔에 잡혔다. 꼼짝없이 얼음 손에 갇혀버린 쯔르레이는 격하게 발버둥쳤지만 어림도 없었다. 점점 조여오는 골렘의 손에 쯔르레이가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이익…!”
동시에 베르헬트와 소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베르헬트는 철저하게 소녀를 몰아붙였다. 소녀 역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얼음장벽은 너무나도 쉽게 베르헬트의 검 끝에 무너졌고 서릿발은 맞지 않았다. 한기를 내뿜었지만 베르헬트의 검이 내뿜는 한기에 되려 잡아먹혔다.
소녀의 몸이 계속해서 재생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베르헬트의 검의 한기가 소녀의 재생을 틀어막은 것이다. 소녀는 이미 양 팔을 잃고 팔 끝은 얼어붙어 있었다. 소녀는 그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베르헬트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저 검! 검이 문제였다. 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소녀가 몸을 떨었다. 결코 얼어붙을리 없는 자신의 몸을 얼리는, 그야말로 극한의 차가움이었다. 소녀는 이미 저 검의 정체에 대해서 짐작하고 있었다. 저 검이 있는 한, 애초에 이것은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둥지를 지키는 것이 수호자의 사명이요, 긍지였다. 자신이 부서져 한낱 눈과 얼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설 수 없었다. 베르헬트가 소녀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소녀는 천천히 얼어붙어가면서 미소를 지었다. 곧 어린 소녀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베르헬트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미소의 의미는 분명했다.
‘하나는 잡았다.’
뒤에서는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고 있는 골렘이 쯔르레이를 잡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골렘의 팔이 쯔르레이를 뭉게는 것과 베르헬트의 검이 소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 누가 더 빠를지는 명확해보였다. 베르헬트가 표정을 찌푸렸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골렘도 베르헬트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 둘이 절명의 소리를 내뱉기 직전이었다.
[그만.]
베르헬트도 소녀도 모두 멈추었다. 골렘의 손에서 힘없이 쯔르레이가 떨어졌고 소녀가 얼어붙는 것도 끝났다. 골렘은 순식간에 무너져 다시 평범한 눈덩이로 돌아갔다. 소녀의 얼어붙은 몸이 녹고 잘린 팔이 다시 자라났다. 그건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에게로 불어왔다.
[들어와라.]
베르헬트의 표정에 비장함이 감돌았다. 베르헬트는 소녀에게서 검을 뽑고 쯔르레이를 챙겼다. 쯔르레이는 간신히 의식은 잃지 않고 있었지만 쿨럭이며 피를 토했다.
“괜찮은가?”
“…그럭저럭.”
물론 베르헬트는 쯔르레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베르헬트는 쯔르레이를 강제로 안고 동굴로 향했다. 쯔르레이는 저항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들지 않았다.
아까까지 죽기 살기로 싸웠던 소녀는 공손하게 두 사람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다시 무표정하게 바뀌었고 그 태도에서는 방금까지 싸웠던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처음으로 듣는 소녀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그러나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느낌이 물씬 흘러나왔다. 베르헬트는 순순히 소녀를 따라갔다. 쯔르레이는 아무래도 조금 꺼려졌으나 베르헬트에게 안긴 상태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온통 얼음으로 된 동굴은 크고 넓었다. 베르헬트의 발자국 소리가 동굴 전체에 뚜벅뚜벅하고 울렸다. 반면 소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얼음 동굴의 벽에는 수많은 동물들의 뼈가 박제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인간의 것도 있었다.
“악취미군.”
베르헬트의 중얼거림에 쯔르레이도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악취미였다. 온갖 알 수 없는 동물들과 인간의 뼈가 전시된 벽은 보는 이에게 섬뜩한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소녀의 안내에 따라 베르헬트는 꽤나 오랜 시간을 걸어나갔다. 소녀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고 걸음을 늦추는 일도 없었다. 중간에 쯔르레이가 이만 괜찮다고 고집을 부려서 베르헬트의 품에서 내려온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앞서 나가던 소녀가 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그림자가 얼음벽에 비쳤다.
동굴 전체에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모두의 귓가에 속삭이듯이 다가왔다. 새는 침묵하고, 용은 울었다.
[오랜,]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밤이 있었다.]
쯔르레이는 과거 이미 용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러했다. 두려움, 이라는 단순한 단어로는 감히 쉽게 표현할 수 없는 심연을 건드는 공포, 그리고 무기력함. 강제로 이해되는, 이해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란 것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긴 동화 속에서 나올 시간이구나.]
빙룡 네메시스가 그곳에 있었다.
~
[용이란 것이, 한낱 전설 속의, 동화 속의 이야기가 된지 오랜 시간이 되었다.]
아까 상대했던 골렘과는 비교도 안되게 거대한 몸집이었다. 그러나 빙룡은 유려했다. 이미 한 번 용을 본 적이 있는 쯔르레이는 그렇게 느꼈다. 울푸레는, 마찬가지로 거대했지만 좀 더 둔중한 모습이었다면 네메시스는 그보다는 좀 더 가늘고 유려한 곡선의 형태였다. 얼음으로 빚은듯한 비늘에 둘러쌓인 거대한 용의 모습은 아름다웠으나 감히 그러하다고 표현하기 힘든 서늘함이 느껴졌다.
[신화의 시대가 끝났다. 다섯 개의 달이 죽고 여덟 개의 별이 태어난 이래, 전설을 현실 속으로 끄집어낸 이들이여, 무엇을 원해 검은 해와 달을 내려 깊은 바다의 꽃을 뜯고 사막의 눈물을 삼켰는가?]
네메시스는 베르헬트와 쯔르레이를 보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향해 머리를 돌린 채 있을 뿐이었다. 네메시스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뜻을 쉬이 짐작하기 어려운 흰소리 뿐이었다. 애당초 과연 저게 베르헬트와 쯔르레이에게 하는 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걸 입으로 꺼내기에 쯔르레이는 이미 겁에 질려 있는 상태였고 베르헬트 또한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용의 이야기를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것도 버거웠다.
[세상은 좀 더 늙었으며 비는 그칠 생각을 않는다. 녹슨 저울의 한쪽에 매달려 발버둥치는 이의 모습은 고결하며 바람은 죽음을 편들지 않는다.]
다행히도 네메시스의 뜻을 알 수 없는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었다. 빙룡의 거대한 어깨가 고개를 축 숙였다. 그리고는 거대한 그 두 눈을 돌려 소녀에게로 향했다.
[우트가르드.]
“네, 주인님.”
네메시스가 자신의 수호자를 불렀다. 베르헬트가 상대했던 골렘 소녀의 이름은 아무래도 우트가르드인 듯했다. 우트가르드가 공손하게 자세를 취하며 주인을 받들었다.
[이 몸이 잠에 든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느냐.]
“백 아흔 다섯 개의 해가 졌습니다. 일곱 개의 달이 떠오르고 다섯 개의 별이 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리 길진 않았군.]
용에게도 표정이란 것이 존재하는지 쯔르레이는 알지 못했다. 너무나 거대한 그 몸집 때문에 설사 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계속해서 용의 얼굴을 살폈다.
[하여 노란 것은 무엇을 위하여 고배를 들었는가? ]
네메시스가 용건을 물은 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 시간은 결코 길지는 않았으나 그 사이에는 고요한 침묵 뿐이었다. 쯔르레이는 네메시스가 지칭하는 것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쯔르레이는 차마 먼저 말을 꺼낼 용기는 없었던 탓에 빙룡이 먼저 말을 건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과연 이런 존재와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 뿐이었다. 개미가 인간과 대화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쯔르레이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당신은… 울푸레를 아십니까?”
[네 몸에 흐르는 그 피의 주인, 추악한 발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