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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5/162)


  • 〈 75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꽤나 늦었군. 무슨 일 있었나?”


    “…아니, 그냥 이 녀석을 잡아오느라 늦은 것 뿐이다.”


    쯔르레이의 머리 위에 앉아있는 쥬브쥬브가 뒷발로 등을 긁어댔다. 그 태연자약한 모습에 베르헬트는 살짝 당황했다.

    “잡아왔다기에는 꽤나 친근한 모습인 걸.”

    “아, 어쩌다보니.”


    쯔르레이가 적당히 대답했다. 베르헬트는 물론 그 태도에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빙룡으로 가는 단서를 손에 넣었단 것이니.

     사람은 쥬브쥬브와 함께 다시 동굴을 빠져나왔다. 이미 한번 거쳐온 길이니 만큼 속도는 들어왔을 때보다 빨랐다.

    “눈이 그쳤군.”

    베르헬트의 말대로 바깥은 눈은 그친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침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하고 쯔르레이는 조금 놀랐다. 어젯밤에 현상금 사냥꾼들과 싸웠을 때만해도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쥬브쥬브가 쯔르레이의 머리위에서 내려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받아라.”


    베르헬트가 쯔르레이에게 육포조각을 여럿 건네었다. 그러고보니  남자, 식량을 챙기러 돌아간 거였지. 쯔르레이는 말 없이 받아들고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쯔르레이의 모습일 때는 딱딱한 육포 씹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는데 머리에 깃털이 난 지금은 왠지 모르게 훨씬 씹기가 편했다. 두 사람은 육포를 씹으며 쥬브쥬브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베르헬트는 쥬브쥬브가 움직이면 움직일 수록 되려 더욱 초조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쥬브쥬브가 멈춘 것은  사람이 남은 육포를 모두 해치우고 나서 한참은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일전에 한번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을 과시하고 있는 얼음 골짜기를 보며 쯔르레이가 말했다.


    “빙룡의 골짜기다.”


    “드디어…!”

    쥬브쥬브는 곧장 골짜기 밑을 향해 뛰어내렸다. 쯔르레이가 그걸 보고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고민하는 사이, 베르헬트가 쯔르레이를 잡아 안고는 골짜기 밑을 향해 뛰어내렸다. 불평을 말할 새도 없었다.


    베르헬트는 골짜기 밑에 도착하고 나서야 쯔르레이를 내려주었다. 쯔르레이는 그재서야 베르헬트에게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가?’ 하고 말했지만 베르헬트는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베르헬트는 골짜기 안에 있는 거대한 동굴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진 눈과 얼음 덩어리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쉽게 들여보내줄 생각은 없는거 같군.”

    “무슨…?”

    “골렘이다.”

    베르헬트가 말을 하고는  발자국, 동굴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 눈과 얼음 덩어리들이 곧 쿵쿵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삐걱거리며 스스로를 조립하던 눈덩어리들은 이윽고 동굴 입구를 가릴만큼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 되었다.


    “용의 둥지를 지키는 수호자인가. 쉽게 안내해준다고 하더니 이런 게 있었군.”

    쥬브쥬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솜뭉치를 손에 쥐자 베르헬트가 쯔르레이를 만류하며 자신의 검을 꺼내들었다.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던 베르헬트의 검이었다. 그때는 분명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베르헬트의 검은 지금도  모습은 특별하지 않았으나 강렬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가 하지.”

    조금 망설이던 쯔르레이는 베르헬트의 말대로 뒤로 물러섰다. 골렘은 천천히, 그러나 육중하게 베르헬트를 향해 다가왔다. 골렘의 발걸음 소리가 골짜기 안을 울리고 있었다. 골렘이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얼음 덩어리들이 떨어졌고,  떨어진만큼 골렘의 몸은 다시 얼어붙어 몸집을 불렸다.


    베르헬트는 가만히 거인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곧바로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 베르헬트의 검이 골렘의 몸을 갈랐다. 골렘은 베르헬트의 검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부서졌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금 골렘의 몸을 가르며 헤집기 시작했다.


    곧 골렘의 몸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시 합쳐지기 시작했다. 베르헬트는 빠르게 몸을 뒤로 피해 골렘의 몸 속에 갇히지 않았다. 골렘은 이미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을 다시 수립해가고 있었다.


    한번 부서졌다 부활한 골렘은 멀뚱멀뚱히 서있지 않았다. 부활이  끝나기도 전에 골렘은 베르헬트를 향해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거구라고 생각하기 힘든 빠른 몸놀림이었다. 베르헬트는 물론 팔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골렘의 팔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얼음 덩어리들이 날아온 것이다.  영역은 대단히 넓어 쯔르레이가 있는 뒤쪽까지 향해 있었다. 베르헬트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얼음덩어리들은 물론 자신을 피해가는 얼음덩어리들까지 모조리 베어버렸다. 얼음덩어리들이 부서지면서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것 역시 끝은 아니었다. 땅으로 떨어진 얼음 덩어리들이 뭉치기 시작하더니 작은 골렘으로 변한 것이다. 족히 수십은 되어보이는 얼음 골렘들은 베르헬트 뿐만 아니라 쯔르레이에게 까지 공격을 시작했다.


    쯔르레이도 가만 당하고 있을 인물은 아니었다. 곧바로 솜뭉치로 얼음 골렘들을 뭉개기 시작했다. 솜뭉치의 육중한 무게에 얼음 골렘들은 금세 부서졌으나 곧 다시 부활했다.


    베르헬트는 금방 팔을 복구한 거대한 얼음 골렘과 작은 얼음 골렘들에 둘러 쌓여서 싸우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은 채 골렘들을 부숴나가고 있었지만 골렘들은 금세 부활하여 끝이 나지를 않았다.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나가던 둘이  가운데서 등을 대고 마주친 것은 필연이었다. 미처 쯔르레이가 보지 못한, 거대한 얼음 골렘이 날린 얼음 덩어리를 베르헬트가 막아준 것이다. 작은 몸을 자신의 등 뒤에 맞댄 베르헬트가 거대한 얼음 골렘이 던진 작은 얼음 골렘을 부수며 말했다.


    “골렘을 죽이려면 그 몸 안에 있는 핵을 부숴야 한다.”

    “….”

    쯔르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음 골렘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럴 대답을 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  맞았다. 쯔르레이가 대답하지 않아도 베르헬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저 놈은, 핵이 없다. 아까 뒤져봤는데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어.  몸 전체가 평범한 눈과 얼음으로 이뤄져 있었다. 과연 용의 둥지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할까. 평범하게 상대해서는 답이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어떻,  크윽! 해야 하는 거냐.”


    “조금만  버텨봐라. 방법을 강구해보지.”

    말을 마친 베르헬트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골짜기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상대하던 모든 얼음 골렘들이 베르헬트의 검 끝에 바사삭 하고 부서졌다. 쯔르레이가 안도할 새도 없이 베르헬트가 다시 쯔르레이를 안고(“으앗!”) 달리기 시작했다.

    베르헬트는 부활하는 얼음 골렘들을 무시하고 곧장 동굴로 향했다. 그러나 동굴 앞에 도착한 베르헬트는 곧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베르헬트가 혀를 찼다.

    “하나가 아니었나….”


    동굴 안에선 아름답고 가녀린, 푸른 머리의 소녀가 길을 막고 있었다. 메이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소녀의 표정은 지독히도 무기질적이었다. 하얗게 샌 그 눈동자가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알리고 있었다.


    곧 소녀의 팔에서 서릿발이 뿜어져 나왔다. 베르헬트는 쯔르레이를 안은  뒤로 물러섰다. 저건 베어낸다고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뒤에는 얼음 골렘이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헬트는 다시 얼음 골렘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내자 얼음 골렘의 팔이 땅에 부딪혔다. 곧 천지를 흔드는 진동이 찾아왔다. 베르헬트조차 어쩔  없는 공격이었다.

    흔들리는 땅 덩어리에서는 서있는 것 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하물며 공격을 피하는 것은 더욱 그랬다. 얼음 골렘과 소녀는 진동 같은 것에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공격을 가했다. 골렘은 계속해서 땅을 내리치기 시작했고 소녀의 서릿발이 베르헬트를 노리고 날아왔다. 곧 베르헬트도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베르헬트가 신음을 흘렸다. 기어코 소녀의 서릿발에 팔이 닿은 것이다. 만약 혼자였다면 설사 아무리 소녀의 공격이 매서웠을지라도 피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쯔르레이를 안고 움직이는 탓에 몸놀림이 둔해진 탓에 공격에 맞았다. 그렇다고 쯔르레이를 놓을 수도 없는 것이 이미 포위된 상황에서 베르헬트면 모를까 쯔르레이 혼자서 저들을 막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베르헬트는 선택해야 했다.


    “괜찮나?”

    “아아, 별거 아니다. 그나저나 곤란하군. 이런데서 시간이 끌릴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내려줘도 괜찮다. 혼자 버틸 수 있어.”

    베르헬트는 쯔르레이의 말에 고민했다. 쯔르레이의 말은 허세나 다름없었다. 상대를 쓰러트릴  있다면야 쯔르레이의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쓰러지지 않는 적을 상대로 장기전을 가는 것은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최악의 구도였다.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이대로는 소강상태에 빠져 둘의 체력만 빠지게 된다. 베르헬트가 쯔르레이를 내려주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쯔르레이는 정말 오랜만에 땅에 발을 디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골렘을 상대로 시간을 끌도록 하지. 그 사이에 저걸 어떻게든 해결해.”

    베르헬트가 쯔르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쯔르레이가 골렘 앞에 서자 골렘은 다시 작은 얼음 골렘들과 합쳐져 더욱 거대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확실히 쯔르레이에게는 그게 더 버거울 것이다. 똑똑한 놈이었다.

    쯔르레이는 빠르게 달려나가면서 골렘의 팔을 피했다. 요리조리 움직이며 최대한 골렘을 베르헬트에게서 멀리 떼어놓았다. 비록 골렘이 결코 느리지 않았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지금 쯔르레이의 신체능력은 평소보다 월등히 높았다. 공격해오는 골렘의 팔과 발을 한웅큼 차이로 간신히 피하면서 종종 골렘의 사지를 부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다. 물론 금방 다시 재생되었지만.

    베르헬트는 소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쯔르레이 뿐 아니라 이쪽도 상성이 좋지는 못했다. 소녀에게서 쏟아지는 서릿발은 검으로 벤다고 해서 파훼할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었고 소녀에게 접근할라치면 금세 얼음 장벽이 가로막았다.

    그러나 초월자는 상성 같은 것에 굴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쯔르레이가 골렘의 팔을 부순 그 순간이었다.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작은 빈틈에 곧바로 베르헬트가 치고 들어갔다. 빠르게 소녀의 몸을 얼음 장벽이 감쌌지만 베르헬트의 검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베르헬트의 검이 얼음장벽과 하나가 되듯이 얼어붙은 채로 뚫고 들어갔다. 검에서는 강렬한 한기가 뿜어져나왔다. 검에 닿은 소녀의 몸조차 얼어붙을 정도로. 소녀의 얼굴이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을 띄었다. 그것은 분명 ‘당황’이었다.


    소녀는 곧바로 자신의 팔을 떼어내 뒤로 도망쳤다. 아쉽게도 베르헬트의 검은 소녀의 팔을 자르는데에 그쳐야했다. 소녀의 떨어진 팔은 곧 물로 녹아내렸다.

    “너, 이 검이 뭔지 알아보는 군.”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녀의 팔은 어느샌가 벌써 다시 자라있었다. 베르헬트는 그 모습에서 답을 깨달았다. 곧바로 달려들어가 소녀의 다리를 베어냈다. 베르헬트의 검이 한기를 뿜는 순간마다 소녀는 멈칫하며 고장난 인형처럼 동작을 멈추었다. 금세 주변의 얼음으로 소녀는 몸을 재생시켰지만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베르헬트는 계속해서 소녀의 몸을 보고 확신했다.


    이 녀석이 골렘의 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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