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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3/162)


  • 〈 73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베르헬트의 말에 따라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그의 말대로 과연 서릿발이 낀 나무 위에 도마뱀이 있었다. 도마뱀은 아직 두 사람을 눈치채지 못한 듯 여유롭게 누워서 몸을 단장하고 있었다. 여유로운 모습의 도마뱀을 보고 베르헬트가 혀를 찼다.


    “팔자 좋은 녀석이군.”


    “어떻게 하지? 녀석이 움직이는 걸 기다릴까?”


    베르헬트가 쯔르레이의 말에 대답을 하려 했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게 되었다. 눈치를 채서 그런건지 아직은 알 수는 없었지만 도마뱀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마뱀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다른 나무로 뛰어올라갔다.


    급하게 도마뱀을 쫓으려던 쯔르레이를 베르헬트가 제지했다. 도마뱀은 둘을 눈치챈 것은 아니었는지 다른 나무에 올라 몸을 나무에 부비기 시작했다.

    “성급히 굴지 마라.”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마뱀은 계속해서 천천히 이동했고 둘은 도마뱀을 쫓아갔다. 도마뱀이 자리를 멈춘 곳은 어느 한 동굴의 앞이었는데 꽤나 큰 입구였다.  주변을 샅샅이 살폈던 쯔르레이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는게 신기할 정도의 규모였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도마뱀은  빠른 속도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떡하지? 들어갈까?”


    “그러는 수밖에 없겠군.”

     사람은 망설임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가 커다랐던 것과는 달리 동굴 안은 꽤나 좁아서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쯔르레이가 랜턴을 켜들고 앞장섰다.


    동굴 안은 바깥과는 달리 꽤나 따뜻했다. 설산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그 온도에 쯔르레이는 간만에 외투를 벗을  있었다. 동굴 안은 깊었고 도마뱀은 보이지 않았다. 흔적이랄 것도 어두운 동굴 안에서는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둘이 동굴 안에 들어온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동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지형의 동굴인지 알 수도 없었고 랜턴의 미약한 불빛에만 의지해서 나아가는 길이었기에 속도가 느린 것도 감안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쯔르레의 몸이 변한 후로 피로를 훨씬 덜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옷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몸의 상처도 이미  나은 상태였다. 하지만 동굴 안이라 그런지 공기가 희박했고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초월자인 베르헬트는 상태가 훨씬 나았으나 그 역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같았다.


    쯔르레이의 숨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베르헬트가 말했다.

    “잠깐, 공기가 느껴진다.”


    쯔르레이도 느꼈다. 호흡이 방금 전보다 한결 편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베르헬트가 장갑을 벗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어디선가부터 오고 있는 공기의 흐름을 확인했다.


    “확실하군. 이 동굴은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어.”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너나할 것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물론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 조금 빠른 걸음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전과는 달리 확실한 목적지가 생겼으니 발걸음에 확신이 생겼다.

    한참을 더 걸어가자 두 사람은 구멍이 뚫린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구멍은 작아서 쯔르레이 정도의 크기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구멍을 들여다보았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거 낭패로군.”


    “내 몸 정도라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쪽에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어디론가 연결되어 있는 건 확실해. 하지만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는 결코 아니군.”


    “칼로 구멍을 넓히면…  힘이라면 가능하지 않나?”

    “동굴이 무너져서 생매장되는 지름길이다. 이거는… 방법이 없나.”

    그렇게 말하고는 베르헬트가 가방을 열고는 꽤나 긴 길이의 밧줄을 꺼냈다.

    “밧줄?”

    “이걸 네 몸에 묶고 네가 들어가는 거다. 그럼 최소한 떨어지거나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지.”

    “그런가….”

    “안에서 무언가 발견하게 되면 돌아와라.”


    쯔르레이가 직접 몸에 밧줄을 묶어 연결하고 구멍 안으로 들어섰다. 구멍은 꽤나 깊었다. 중간중간 소리를 질러 베르헬트와 소통했지만 곧 그마저도 들리지 않게 되자 밧줄을 흔들어 신호를 전달했다.

    시간이 흘러 밧줄이 한계를 보일 쯤이었다. 쯔르레이가 구멍의 끝에 도착했다. 구멍의 끝은 거대한 공동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공동에 중앙에는 크진 않지만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다. 종유석으로 덮인 천장에서 물이 조금씩 호수로 떨어져 내는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노랫소리  같았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공동을 살펴보던 쯔르레이는  도마뱀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마뱀은 호수 주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도마뱀은 곧 랜턴의 불빛으로 바로 쯔르레이를 눈치채고는 호수 안으로 뛰어들었다.

    쯔르레이는 바로 달려서 도마뱀을 쫓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호수 안으로 뛰어든 도마뱀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낭패감을 느낀 쯔르레이가 호수에 손을 집어넣어보았다. 물은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쯔르레이는 호수 안으로 뛰어들기 위해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만두세요.”

    막 상의를 벗으려 할 무렵에 청량하고 어린 목소리가 쯔르레이에게 들려왔다. 당황한 쯔르레이는 호수 중앙에서 올라오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가 눈을 감고 손에 도마뱀을 얹은 채 쯔르레이를 향하고 있었다.

    “꼬리를 달고 왔구나, 쥬브쥬브.”


    소녀가 도마뱀을 보며 말했다. 도마뱀은 천연덕스럽게 소녀의 손 위에서 꼬리를 내보이며 애교를 부렸다. 소녀가 호수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도마뱀을 놓아주자 도마뱀은 곧 호수 안으로 능숙하게 헤엄을 치며 사라졌다.

    “나는 호수의 요정 쥬느비에브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쥬느비에브라고 이름을 밝힌 소녀가 물었다. 호수의 요정이라, 확실히 인간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잠시 말을 아꼈다. 소녀의 피아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대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러한지는 모를 일이었다. 고민하던 쯔르레이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쯔르레이다.”

    쯔르레이의 이름을 들은 쥬느비에브 눈에 띄게 안색을 찌푸렸다.

    “악취미적인 이름이군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무슨 이유로 제 호수에 온 건지를 물은 것입니다.”


    “…나는 아까  손에 있던  도마뱀을 쫓아 이곳으로 왔다.”


    “쥬브쥬브를? 어째서?”


    “전날,  도마뱀이 내게 길을 안내했다.”

    그러자 호수의 요정, 쥬느비에브의 안색이 흐려졌다.


    “당신은 ‘용사냥꾼’의 일족이로군요.”

    그러자 놀란 것은 쯔르레이였다. 쯔르레이가 이미 오래 전에 이름의 가치를 잃어버린 일족임을 호수의 요정은 곧바로 알아챈 것이었다. 심지어 이 몸은 벨투리안의 것이 아님에도.

    “어떻게 알았지?”

    “쥬브쥬브는 빙룡으로의 길 안내를 맡고 있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 피에 담긴 깊은 용에 대한 절망을. 슈라헤는 오래전에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용의 피를 갈망합니다. 당신 또한 예외는 아니에요. 쥬브쥬브는 당신에게 담긴  바램을 읽었을 뿐입니다.”

    쥬느비에브의 말투에는 숨길  없는 강한 경멸이 묻어나왔다. 쯔르레이는 그런 태도에 의아해하면서도 의문을 묻지 않을  없었다.

    “나는…  몸은 슈라헤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알 수 있는 건가?”

    쯔르레이의 말에 쥬느비에브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윽고 눈을 열었다.  눈은 깊은 심해의 바닷빛을 보는 것 같이 파랗고 또 파랬다. 그러나 쯔르레이를 바라보던 쥬느비에브의 표정은 곧 두려움에 질려 그 선명한 색을 잊어버렸다.


    “뭐지?”

    “당신… 슈라헤가 아니군…! 이렇게나 지독하게 짙은 피는 본 적이 없어. 너는 무엇이냐. 너는….”


    쥬느비에브가 굉장히 두려운 것을,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것을 말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곧 쯔르레이는 쥬느비에브의 말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은 항상 쯔르레이에게 비명을 지르게 한다. 쥬느비에브는 마치 비명처럼 질렀다.

    “너는 울푸레의 무엇이냐?”


    “울푸레라고? 울푸레를 아느냐?”

    “모를 리가 있겠는가! 고귀한 검은 용, 애끓는 비명의 주둥아리, 재앙을 조각하는 울푸레!”


    거기까지는 쯔르레이도 이미 알고 있는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쥬느비에브가 얘기하는 것은 쯔르레이가  한번도 듣지 못한, 그리고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끔찍한 이름이었다.


    “용사냥꾼의 어미!”

    “뭐, 뭐라고?”


    쥬느비에브의 안색은 이미 공포로 질려있었으나 동시에 분노로 가득했다. 당황하는 쯔르레이를 향해 쥬느비에브가 소리쳤다.

    “정녕 모르느냐. 슈라헤가 울푸레의 자식들임을? 울푸레의 피를 이은 자들이 죽인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울푸레가 조각한 가장 천박한 재앙이 바로 슈라헤의 이름이었음을!”

    쥬느비에브가 탄식하듯 지껄였다.

    “그러나 네 몸은… 슈라헤가 아니구나…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어.  몸은 이미…. 울푸레의 피로 더럽혀져 있구나.”


    “그게 무슨 소리지?”


    “어찌하여 모르느냐?  몸의 피가 이보다도 끔찍할  없게 더러운 것을. 아아, 황금색 깃털이 검은 비늘에 감싸인  모습이 참으로 역겹구나, 역겨워! 내 눈을 뜨면 안되었어. 이 눈에 너무나 더러운 것을 담았구나….”

    “의미 모를 소리는 그만하고 설명을 해라!”

    쯔르레이 또한 분노하여 외쳤다. 쥬느비에브의 얘기는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하며 쯔르레이에게 분노를 토해내는 쥬느비에브의 태도에 쯔르레이 역시 화가 차올랐다. 무엇보다 대체 울푸레가 슈라헤의 어미라는 것은 무슨 얘기인지 쯔르레이는 꼭 들어야만 했다.

    “그래. 듣고 싶다면 들려주마. 무엇이 궁금하더냐?”

    쥬느비에브는 예상 외로 순순히 응했다. 그 표정에 담긴 경멸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쯔르레이는 무시했다. 쯔르레이는 무엇을 물어야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가장 먼저 물어볼 건 그것이었다.


    “울푸레가 슈라헤의 어미라는 건 무슨 소리지?”

    쥬느비에브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감미로운 목소리가 공동에 울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섀아크리파 이스토리아가 살아있는 모든 인간을 학살하기 시작했을 때, 엘토리아 아르페지나가 그를 막아섰을 때, 인간이 희생과 자비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아주 오래 전이었다.

    울푸레가 울었다.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태해 자신을 죽이러 온 용사를 겁간하였다.

    울푸레 스스로가 100년을 품어 태어난 그 아이의 몸에는  대신 불꽃이 흘렀고 용의 피가  자리를 차지했다. 아이는 태생부터 용에 대한 증오를 안고 태어났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용을 죽여라! 용을 죽여라! 울푸레는 스스로의 비늘을 뽑아 아이의 검을 만들고 갑옷을 입혔다.

    아이는 용을 죽이기 위해 살았다. 그리고 아이의 아이도 그랬다. 자신의 어미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역겨운 일족이여.

    그  아이의 이름이 바로 ‘슈라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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