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2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2/162)


  • 〈 72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정말 찾은 게 맞는거냐?”


    “흠….”

    쯔르레이가 베르헬트의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분명 제대로 흔적을 남겼을 터인데 흔적을 쫓아가도 골짜기가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쯔르레이의 깃털머리가 움츠러 들었다.


    베르헬트의 얼굴에 살짝 근심이 깃들었다. 쯔르레이 역시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있게 얘기했는데 길을 잃었다는 건 꽤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길을 잃은 거 같다.”

    베르헬트가  한숨을 쉬자 쯔르레이가 변명하듯 말했다.


    “분명 흔적은 잘따라왔는데 길이 보이지 않는 군.”


    “좀 더 잘 기억해보게. 그때와 뭔가 다른건 없나?”


    베르헬트의 말에 쯔르레이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도마뱀을 쫓아갔을 때는 처음부터 길을 잃었다. 산장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돌아가려고 해도 길을 찾을 수 없다가 그 도마뱀을 발견하고 쫓아갔더니 골짜기를 발견했지.”

    “그 도마뱀을 찾아야 하는 건가. 골치 아프군.”

    베르헬트의 얼굴에 낭패감이 깃들었다. 쯔르레이도 별반 다를  없었다. 드디어 길을 찾은 줄 알았는데 그게 눈앞에서 흩어졌으니 그럴만도 했다. 면목이 없는 쯔르레이는 말을 돌렸다.


    “당신은 용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용을 죽이겠다는 이야기인가?”


    “글쎄, 심장이 없는 채로 용이  수 있다면 또 말이 다르겠지만 아마 그렇겠지.”

    쯔르레이는 베르헬트의 말을 듣고 느낀 감정들을 떠올렸다.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 경외, 그리고 비웃음이었다. 분명 그의 포부는 굉장했다. 경외스러웠다. 딸을 위해서 극히 희박한 가능성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선다는 것이.


    하지만 동시에 과연? 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다.  수밖에 없었다. 쯔르레이는 직접 용을 만나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는 용을 만나본 적이 있을까? 그런 절대적인 존재의 앞에서도 과연 베르헬트가 저 말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너는 내가 용을 잡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용을 한번 직접 만났고 그 절대성을 실감했다. 그건 인간이 상대할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상 외로 베르헬트는 선선히 동의했다.

    “그런데도 가는 건가?”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둘 사이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쯔르레이도 베르헬트도  할 말이 있을 수 없었다.일찌감치 용과의 대적을 포기한 쯔르레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궁금했다. 무엇이 그를 이런 싸움에 끼어들게 한 것인지. 쯔르레이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 딸… 마이카라고 했나?”


    “마이카는 애칭이다. 풀네임은 미카엘 베르헬트지.”

    “베르헬트가 성이었나?”

    “그래.  이름은 미켈라 베르헬트다. 이름은 잘쓰지 않지만.”

    “부녀가 모두 천사 같은 이름이군.”


    “그래서  이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마이카에게는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말이야.”


    “…네 딸은 어떤 아이지?”

     말에 베르헬트는 잠시 입을 닫았고 그 모습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이윽고 베르헬트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문을 틀었다. 그 표정은 자신의 딸아이에 대해 얘기한다기에는 위화감이 있는 얼굴이었다.

    “마이카는… 천사 같은 아이지.”


    “그 얘긴 아까도 들었다.”


    “그런데, 겉보기에만 천사 같아.”


    베르헬트의 입에서 진부한 이야기가 나오나 했더니, 전혀 상상도 못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

    “내 딸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싸가지가 없다. 성격이 더러워서 아무도 못건드는데다가 선머슴처럼 하고 다녀서 주변 애들을  때려눕히고 다녔지. 나보고는 아빠라고 절대 안불러준다. 아저씨라고 부르면 양호한 편이고 보통은 늙다리 멍청이 꼰대라고 부른다. 걔랑 얘기하고 있으면 심줄이 타들어가는  같아.”


    쯔르레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베르헬트의 입에서는 엄청난 험담이 쏟아져나왔다.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왔다는 사람에게 나올 법한 얘기는 확실히 아니었다. 한번 입을  베르헬트는 멈추지 않고 딸의 험담을 이어나갔다.

    “나는 자주 딸과 시간을 보내지 못해 그런 시간이 소중하다. 그런데 꼭 내가 같이 저녁을 먹을 수 있는 날이면 친구네 집에 가서 안오는 거야. 한번 같이 밥을 먹어달라고 부탁하니까 홀아비 냄새가 나서 싫다는 군.”

    “그거…  굉장하군. 몇 살이라고 했지, 딸이?”

    “열 넷일세.”

    “한창 아빠를 싫어한 나이대긴 하군.”

    쯔르레이의 말에 베르헬트가 살짝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로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무튼 싸가지가 없는 것도 나한테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다른 아이들이나 가솔들에게 까지 그러니 문제야. 어렸을 때 엄마를 여의고 오냐오냐 길렀더니 그렇게 자란 모양이야. 내 잘못이지.”


    쯔르레이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를 고민했다. 여기서 똑같이 마이카의 험담에 어울려 주는 게 맞는 반응일까? 하지만 베르헬트는 쯔르레이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번은 다른 귀족가 자제들과 놀다가 거기 남자애를 반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팼다는 군. 이유를 물어보니까 답을 안하더라고. 그래서 상대 아이를 찾아가 물어보니 되려 나한테 사죄를 하더라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나를 욕해서 마이카가 그랬다는 거야.”


    베르헬트가 한숨을 쉬었다.

    “그 날은 그래서 마이카를 혼내지 않았어. 못했다고 해야겠지. 어차피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지만….”


    “흠.”

    “마이카가 병으로 쓰러진지 1년 째 되는 날이었지. 누워있는 그 애한테 내가 약을 찾으러 간다니까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베르헬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얼굴에 보이는 씁쓸한 웃음 사이로는 짙은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네.”

    “돌아가야겠군.”

    “돌아가야지.”

    쯔르레이는 이걸로  대화가 끝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베르헬트가 잠시 조용히 있더니 쯔르레이에게 물었다.

    “자네는 돌아갈 곳이 있나?”

    갑작스런 베르헬트의 물음에 쯔르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돌아갈 곳?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저주를 풀기 위한 것만 생각하고 자신이 살던 곳을 나온 것이니까. 자신이 살던 곳은 처음부터 논외였다. 언젠가 한번 들러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이상 그곳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다음에 떠오른 곳은 서리 갈기 부족이었다. 서리 갈기 부족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곳은 분명 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일으키고 나서 그곳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염치가 없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분명 흔쾌히 자신을 받아주겠지만, 쯔르레이의 마음이 편치 못했다. 무엇보다 생하울라가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쉽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엘핀에게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보았다. 그는 말했다. 원한다면 계속해서 그의 동생으로 살아가도 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의 신뢰를 배신하고 도망쳐 나왔다. 그와는 우정이란 것을 나눴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더는 자신을 신뢰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도망침으로써 아마 그는 꽤나  고초를 겪었을 게 분명했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다시 떠올랐다.

    이래저래 골똘히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대답했다.

    “없는  같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중요한걸세. 그게 나를 붙잡고 넘어질 수 없게 만들어주지.”

    “모르겠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라.”


    “생각해봐.”


    “…저주를 푸는 일만 생각했으니까, 그런  잘모른다. 언제 풀릴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일이고.”

    “기약, 이제는 모르지 않나.”


    “뭐?”

    쯔르레이가 고개를 돌려 베르헬트를 봤다.

    “빙룡과 만나면 네 저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런 얘기였나. 확실히 그 부분은 쯔르레이 역시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거기에 대해 특별히 기대하고 있는 편은 아니었다. 기대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지만, 쯔르레이는 이미 오랜 기대가 빗나갔을 때에 대한 배신감을 잘알고있었다.


    “확신하지 못하는 것에 기대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냐.”

    “그렇다.”


    “그런데, 그런거 나는 하고 있거든.”

    “….”


    “돌아가면 마이카랑 제대로 한번 이야기 나눠볼거야. 마이카가 살아만 줘도 바랄게 없겠지만, 나는 욕심이 많아서 말이지. 다른 집처럼 딸이랑 얘기도 해보고 싶고, 소풍도 같이 가보고 싶어. 아내의 기일에 같이 아내를 보러 가고 싶다.”


    “소박하군.”

    “그러니까 너도 그런거 하나 정도는 생각해두면 좋겠단 거야. 모든 일이 끝난 후에 아무 것도 할  없으면 허무할 테니까. 작은 거라도 좋으니까 말이야.”


    “모르…겠군.”


    쯔르레이는 계속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모르겠다는 말 밖에  게 없었다. 그런데도 베르헬트의 말은 뭔가 쯔르레이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저주가 풀린 후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너무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가까워질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잠깐.”

    베르헬트가 그런 도중 갑자기 쯔르레이의 발걸음을 멈추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혹시 저게, 네가 말한 도마뱀이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