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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71/162)


  • 〈 71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베르헬트의 어처구니 없는 얘기에 쯔르레이가 당황했다. 베르헬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이 깃들어 있는 것도 같았다.


    “금방 내가 착각했단 걸 깨달았지. 사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그 때 여관에서 얘기를 듣고 자리를 비켜준 건 당황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말하고자 하는 게 뭐지? 네가 정의의 기사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어린애를 도와주려하는 건 충분히 정의의,”

    “기사 같긴 하지. 하지만 말이야.  이유가 네가 내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랬다는 거면 이유가 속물적으로 바뀌거든.”


    “뭐…?”


    “내가 만약 정말로 정의의 기사였다면 그저 범죄자를 잡으러 왔다 봉변을 당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괴물인 너를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정의의 기사도 아니고 너도 괴물은 아닌  같군. 그도 그럴게 괴물은 너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거든.”

    “….”


    그제서야 쯔르레이는 자신의 얼굴에 눈물자국이 말라붙어있단 걸 깨달았다. 알몸도 보여줬거늘, 오히려 이 모습이 조금  수치스러웠다. 쯔르레이가 손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 눈물자국을 지워냈다.


    “물론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 의리 따윈 없지. 우리는 만난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 의를 쌓기에 너는 나의 참가를 반갑게 여기지 않았을 테고. 나는 개인적인 이유로 너의 일행에 억지로 끼어들었다.”

    쯔르레이는 혼란스러웠다.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베르헬트의 말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이해도 되지 않고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 쯔르레이에게 베르헬트가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다른 얘기를 해볼까? 나에겐 딸이 한 명 있다.


    “그건 아까 들었다.”


    “그래, 딸.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나의 보물이다. 이름은 미카엘이지.”


    ‘천사 같은 이름이군.’ 하고 속으로 쯔르레이가 비꼬았다. 갑작스러운 딸자랑 얘기를 들어봐야 쯔르레이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베르헬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 죽어가고 있지.”


    평소라면 쯔르레이는 ‘유감이군.’하는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지나치게 시달린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베르헬트의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반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걸 입으로 그대로 내뱉지 않은 게 쯔르레이의 마지막 배려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지. 설마  딸과 내가 닮았다는 진부한 이야기라도 할 생각인가?”


    “딸을 낫게 하려면 용의 심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쯔르레이의 예상과는 다른, 상상 이상으로 엄청난 얘기가 튀어나왔다. 쯔르레이조차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종류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네 말은 설마….”


    “나는 용을 잡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을 찾아야 했지.”


    쯔르레이는 이쯤 되어서야 드디어 베르헬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용을 찾는 일은 고되었다. 무레의 사막에서도 아토그의 수해에서도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알고 있던 정보가 바로 이곳이었다. 골트룬 산맥. 이곳에 눈이 오 시작했다는 걸 듣고 내가 얼마나 환희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무레의 사막, 아토그의 수해. 모두 용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었다. 용에 대해서 도서관에서 정보를 찾던 쯔르레이는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토그의 수해는 쯔르레이가 만나봐야 하는 글룸라라고 하는 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 말은 곧 빙룡 네메시스가 오랜 잠을 끊고 깨어났다는 뜻이니까.”

    베르헬트가 잠시 숨을 골랐다.

    “내가 너에게 끼어든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너는 용을 찾고 있단 얘기를 마치 확신이라도 하듯이 말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는 내 딸만한 어린 아이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낸 것이다. 처음엔 어린 네가 걱정되어서 따라붙었다.  후에는 너에게서 빙룡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결코 인간이 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닌 저주를 보았다. 너를 쫓을 수밖에 없었지.”

    베르헬트의 눈이 희열로 가득찼다.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었다. 무엇을? 쯔르레이는 자신이 말한 것들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히 말했었지.

    쯔르레이는 빙룡의 골짜기를 발견했다.


    “정의의 기사? 우스운 얘기다. 나는 왕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서 수도 없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왕국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나는 내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왕국을 버리고 왔어. 그런데 내가 널 죽인다고? 고작 이런 현상금 사냥꾼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단서를?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베르헬트는 말하고 있었다. 그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위해서 쯔르레이가 필요하다고. 그 말에 쯔르레이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까의 감상적인 얘기 따위보다 더욱 편했다. 베르헬트는 자신을 죽이지 않는다. 그건 자신이 괴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베르헬트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너는 그렇다면 내가 아무런 단서도 없다고 했다면 지금 나를 죽였을 건가?”


    “마이카의 머리는 금발이다. 천사 같이 아름답지.”


    “그게 무슨….”

    “너는 조금 마이카를 닮았어. 그냥 그뿐이다.”

    쯔르레이의 얼굴이 빨개졌다. 아까 누군가를 닮아서 자신을 도와주려고 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제길, 그게 자신의 딸의 얘기였나.

    “헛소리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조금은 기운을 차린거 같군. 죽고 싶다는 생각은 좀 가셨나?”

    “…네가 날 필요로 한다니. 적어도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닌가 보군.”

    두 사람의 관계는 이상했다. 베르헬트는 대놓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쯔르레이를 이용하려고 한다. 쯔르레이는 베르헬트가 자신을 죽여줄거라고 기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관계가 조금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베르헬트가 자신이 괴물임을 부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얘기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쯔르레이의 마음은 변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이용한다는 얘기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쯔르레이는 이제 베르헬트의 목적이 끝날 때까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거면 된다고, 쯔르레이는 마음을 잡았다.


    ~

    모든 이야기가 끝난 후 쯔르레이는 겨우 다시 옷을 입었다. 길어진 머리가 익숙치 않아 옷을 입는 데에 방해가 되었다. 낑낑거리며 겨우 옷을  입은 쯔르레이가 화로의 불을 껐다.


    “더 쉬지 않아도 괜찮은가?”


    “더 이상 이 곳에 있고 싶지 않다. 어차피 몸은 벌써  회복되었어.”

    이제는 옷에 가려져서 볼 수 없었지만 쯔르레이의 몸은 벌써 회복을 끝낸 상태였다. 배에 있는 멍자국도  사라졌고 기력도 이미 다시 차올랐다. 움직이는데에 지장은 없었다. 물론 베르헬트가 몸 상태를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는  쯔르레이가 걱정되는 듯 보였다.


    “몸이 회복되었다고 다 능사는 아니다. 네가 정 괜찮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조금은 자신을 아끼는 게 좋을 거다.”

    “이 몸은 어차피 금방 회복된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몸 얘기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나.”

    “흥….”

    쯔르레이가 고집을 부리자 베르헬트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어찌되었건 간에 그도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굳이 자신이 쉬지 않겠다는데 억지로 쉬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사람을 죽인 장소에서 쉽게 쉴 수 있을리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그 머리는 계속 그대로인건가?”


    “이전에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는 며칠 걸려서 돌아갔다고 들었다. 아마 이번에도 비슷하겠지.”


    “그런가. 그럼.”

    “잠깐 소강 상태였지만 눈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위험할 거야.”


    베르헬트와 쯔르레이는  시간을 끌지 않았다.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두막을 떠났다. 쯔르레이는 올 때도 두 사람이었고 갈 때도  사람이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숫자 뿐이었다.

    오두막에서 살아 숨쉬던 두 사람이 떠나자 남은 것은 세 구의 시체 뿐이었다.  구의 시체는 이미 눈발이 거세지기 시작한 이상 당분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확률이 컸다. 추운 날씨 때문에 쉽게 썩지도 못할 것이다.

    그럴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시체의 목이 일어섰다. 일어난 것은 바로 큐빗트의 시체. 아니, 죽었을거라고 생각한 큐빗트였다. 큐빗트는 일어나자마자 약간의 구역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우, 우엑…. 뭐, 뭐야 씨발…. 대체 이게….”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마르코가 먹였던 약이 하필이면 잠시간의 가사상태를 만들어버리는 약이었다는 게, 쯔르레이가 조금 더 일찍 길을 떠났다는 것이 겹쳐서 큐빗트의 목숨을 부지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기적 같지 않앗다.

    “아으, 아으! 씨발 뭐야! 마르코!! 일어나! 아폴리온 씨발! 일어나라고!”

    정신을 차린 큐빗트는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고 누운 채로 욕설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마르코도, 아폴리온도 모두 죽어있었다. 큐빗트는 목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큐빗트가 목숨을 부지한 것은 잠깐의 행운에 불과했다. 큐빗트가 제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고 끔찍한 부상이 있는 이상 얼마 안가 큐빗트가 죽을 것은 분명했다.

    “씨발… 누구 없어?! 아무도 없냐고?!”

    큐빗트의 외침이 울렸다. 하지만 그걸 들을  있는 사람이 지금 있을 리가 없었다. 큐빗트가 자신이 여기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파악하자 공포가 얼굴에 드리웠다.

    “안돼… 이럴 순 없어. 안된다고….”


    “어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러나 놀랍게도 그 외침에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큐빗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큐빗트는 바로 외쳤다.

    “이, 이봐! 나 여기있어! 여깄다고!”

    “안되는데….”

    오두막의 문을 열고 나타난 것은 바로 큐빗트 자신이 납치했던 아이, 세미였다. 큐빗트는 결코 이 아이와 좋은 인연으로 엮인 것도 아니었고 지금 상황을 보면 이 아이가 어떨지 몰랐으나 아마도 멀쩡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큐빗트는 세미에게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꼬, 꼬마야. 나 좀, 나 좀 살려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전부 사과할 테니까…. 부탁이야.”

    하지만 세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큐빗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계속해서 ‘안되는데….’하고 중얼거리는 것이 대답의 전부였다.

    하지만 계속된 큐빗트의 애원에 세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큐빗트는 안심했다. 그래 어린 아이니까 동정심이 있을 것이다. 분명 자신을 구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미의 손에 들린 걸 보자 큐빗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세미의 작은 손에 들린 것은 바로 그에 맞게 앙증맞은 단검이었다.

    “어, 어이 잠깐 기다려.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안된다고요…. 안된다고….”

    “사, 살려줘. 사과할 테니까. 돈! 그래, 돈! 얼마든지 줄 테니까 그만둬!”

    큐빗트는 애원하는 것말고는  수 있는게 없었다. 자신의 몸조차 일으킬 수 없는 이상 자신의 목숨은 저 소녀에게 달려있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세미는 큐빗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했다.


    그리고 끝이었다.


    “사, 살려…! 크악!”


    세미가 단검을 두 손으로 잡고 큐빗트의 심장을 찔렀다. 큐빗트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었다. 곧 큐빗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러니까 안된다고요…. 살아있으면….”


    세미가 음침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거기에 평소 지어보이던 순박한 미소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계속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살아있으면… 쓸 수가 없다고요. 정말….”

    세미가 히죽하고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늦을  했는데 말이야… 딱 맞는 타이밍에 죽어줬어요.”


    무려 재료가 셋이나 있었으니. 아주 즐거웠다.

    “그렇지, 휘리오비치?”
    “그래, 세르미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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