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가 멍하니 아폴리온의 시체를 바라보는 사이, 오두막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연 것은 베르헬트였다. 베르헬트는 명백하게 느껴지는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고 더욱 빠르게 흔적을 쫓아 달려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자신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상이었다. 쯔르레이는 한 남자에게 검을 꽂은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가 마치 깃털이 가득한 날개처럼 길게 자라있는 쯔르레이의 모습은 결코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르헬트에게도 차마 뭐라 말을 잇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죽어버린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남자는 반쯤 몸이 뭉개져 있었고 한 여자는 몸의 뼈가 반절은 부러져 있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베르헬트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왔나?”
베르헬트의 중얼거림을 듣고 쯔르레이가 그를 불렀다. 힘 없는 목소리였다. 베르헬트는 아마도 이 참상의 원인일 게 분명할 쯔르레이를 검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그 가리킴에 확신은 없었다.
“무슨 일이지?”
“설명이라도 필요한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네.”
베르헬트의 표정이 누가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쯔르레이는 그걸 보며 조금 웃었다.
“…필요하다.”
“그저 괴물이 인간을 사냥했을 뿐이다. 어린애 동화책에 나오는 것 처럼.”
“제대로 설명해라.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생각은 없어.”
“말하고 나면, 그 뒤는?”
베르헬트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에 쯔르레이는 그럼 그렇다는 듯 질문을 이어나갔다.
“나를 벨 건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래, 그럴 줄 알았지. 무엇보다 당신은 오지랖 넓은 정의의 기사니까 이런 괴물에게 줄 자비 같은 건 없겠지. 안그런가?”
쯔르레이는 지쳤다. 그게 속마음이었다. 하루하루 번걸아가며 변하는 이 괴물 같은 몸뚱이도, 아무런 기약도 없이 계속해야 하는 이 여행도. 모든 게 다 짜증나고 지겨웠다. 왜 하필 자신만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그만하고 싶다.’
슈라헤 산맥에 있었던 자신의 오두막집이 떠올랐다. 그리웠다. 비록 마을에서 감시 받아 자유 같은 건 없었지만 하루하루 변하지 않고 흘러가던 일상이 그리웠다. 유리히가 생각났다. 자신의 친구였던 아레히의 형이자 자신의 또다른 친구. 생하울라도 엘핀도 아닌, 유리히가 그리웠다.
유리히가 어느 날 술을 가져온 날이 생각났다. 술은 처음이었고 벨투리안은 금방 취하고 말았다. 유리히는 웃으면서 계속 술을 권했고 자신은 계속 따라마셨다. 서로 완전히 취해서 아레히의 험담을 했을 때는 결국 끝내 둘 다 웃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추방이 끝난다면 그를 위해 일할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자신의 미래였다. 이런 모습이 되는 게 아니라.
저주 같은 것과는 일절 관련 없던 시절이 그리웠다. 평범하게 자고 일어나면 아침이 시작되고 어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언젠가는 다시 일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던, 잃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그 평범했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누가 끝내주면 좋을 텐데.’
사실 어쩌면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베르헬트가 저 검을 들고 자신을 찌르면 그 모든 게 끝나는 것이다. 베르헬트는 조용히 검을 들어올렸다. 쯔르레이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심했다. 그래, 이제 다 끝나는 거다. 이 고통스러운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그래, 베어라.”
“웃기는 소리.”
쿵! 하는 소리가 쯔르레이의 머리에 울려퍼졌다. 쯔르레이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사람, 지금 날 때린건가?
베르헬트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네 생각대로 할 줄 알았으면 오산이다. 나는 그렇게 바보가 아니야. 순순히 네 자살을 도와줄 생각 따윈 없다.”
고통에 신음하던 쯔르레이가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자살이라니, 난…!”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 모든 걸 포기한 자의 자포자기라고 불러줄까, 그럼?”
“으윽….”
베르헬트는 억지로 쯔르레이를 끌고는 자리에 앉혔다. 머리를 푹 숙인 쯔르레이의 얼굴을 억지로 들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람을 죽이고 나서 충격에 빠져 있는 걸 보고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잔인하지는 않다. 진짜 괴물은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는 놈 얘기겠지.”
그 말에 쯔르레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자신이 충격을 받은 것은 이 모습 때문이었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었다. 이미 사람을 죽여본 적도 있었다. 죽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분명히 죽었음이 분명한, 과거의 휘리엘을 공격했던 암살자를 떠올렸다.
“사람을 죽인 거로 충격 받은게 아니다.”
“정말?”
“물론.”
“하지만 내 눈에는 네가 거짓말을 하는 걸로 보인다.”
“….”
그 말에 쯔르레이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베르헬트는 분명 거짓말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쯔르레이는 이전에 몇 번 그를 실험하는 질문도 해봤지만 그는 정확했다. 그의 앞에선 거짓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이, 자신이 충격 받은 게 아니라는 게 거짓말이라고?
“나는 네가 믿고 있다면 그게 설사 거짓이라고 해도 가려낼 수 없다. 만능이 아니야. 하지만 너는 이미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는 거 같군.”
“….”
“그럼 이제 무슨 일인지 들어보도록 할까.”
베르헬트는 쯔르레이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쯔르레이에게 더는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 다른 화제로 넘어간 것이다. 쯔르레이는 잠시 망설이다 지금까지의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세미를 두고 사냥을 하러 갔다.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데, 어떤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고 그 도마뱀을 쫓아가니 빙룡의 골짜기를 발견했다.”
“발견했다고?!”
베르헬트가 말을 끊었다. 그는 명백히 놀란 표정으로 쯔르레이를 바라며 더욱 설명하기를 원하는 듯 했지만 쯔르레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 뒤로 이 곳으로 돌아오니까 세미가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나왔더니 곧바로 나에게 화살이 날라왔다. 화살을 막고 화살이 날라온 방향으로 적을 찾았다. 거기에 갔더니 이 놈이 있었지.”
쯔르레이가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절명해 있는 아폴리온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르헬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현상금 사냥꾼이라고 했다.”
“현상금 사냥꾼?”
“나는 이전에 볼타르 왕국 왕궁의 성벽을 부순 적이 있다. 그래서 현상금이 붙었다는 군.”
“하, 대단하군. 범죄자였다니.”
기가 차다는 듯 웃는 베르헬트의 모습에 쯔르레이는 불안해졌지만 괜히 지적하지는 않았다. 쯔르레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 놈은 바로 제압했지만 그 후에 남은 두 사람의 협공은 막지 못하고 붙잡혔다. 정신을 차리고 난 후에는 세미와 같이 오두막 안에 묶여 있었고.”
“풀려난 방법은 말 안해도 알겠군.”
“네 말대로 모습이 변하고 밧줄이 풀렸다. 하지만 그 뒤에 곧바로 붙잡혔고 그때 세미가 놈에게 몸을 부딪혀서 잠깐 풀려났지. 밖으로 도망간 뒤에 쫓아오는 저 여자를 제압했지만 그 후에 추위 때문에 정신이 나간 사이에 저 커다란 녀석에게 잡혔고 그 뒤로 엄청나게 맞았다.”
“멍자국이 보이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다.”
쯔르레이는 그제서야 순간 자신이 알몸으로 그를 대응하고 있단 걸 깨달았다. 새삼 부끄러울 것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쯔르레이는 길게 자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몸을 가렸다.
“아무튼 잠시 정신을 잃은 후에 깨어나니까 나는 이 모습이 되어있었고, 달려드는 두 녀석을 죽였다. 그게 끝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베르헬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속절없이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 모습에 대해서 물을까, 아니면…. 하지만 베르헬트가 물은 것은 쯔르레이가 놓치고 있던 얘기였다.
“세미는 어디갔지?”
그 말을 듣고나서야 쯔르레이는 세미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쯔르레이가 감당하기 너무 힘든 일들이 계속 일어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세미가 없어졌군. 모르겠다.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어.”
하지만 쯔르레이는 세미가 없어진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세미가 내뱉었던 이야기를 검증해야 하니 세미가 없어졌다는 것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 분명한데, 한번 모든 걸 놓아버렸던 탓일까.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가…. 그 모습은 뭐지? 너는 인간이 아닌 것인가?”
이제야 쯔르레이가 올 거라 생각한 질문이 왔다. 물론 여기에 대해 쯔르레이가 대답할 얘기도 그리 많지 않았다. 평소라면 말이다. 지금의 쯔르레이에게는 더 이상 무언가를 숨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것에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런 모습이 된 것은… 나는 용을 만난 적이 있다.”
쯔르레이는 베르헬트가 놀라서 자신의 어깨라도 잡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상 외로 베르헬트는 담담했고 오히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라고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하고 해괴한 저주를 가진 이가 용을 찾으러 간다는데,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바이다.”
“그래, 나는 흑룡 울푸레를 만났다. 그리고… 모두가 죽었다.”
“재앙을 조각하는 울푸레?”
“알고 있나 보군. 살아남은 것은 이런 모습이 된 나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쭉 이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
“나도 더 이상 내가 인간인지 알 수가 없다. 너는 이런 나를 벨 것인가?”
베르헬트가 한숨을 쉬었다. 명백히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너는 나를 오해하고 있는 듯 하군.”
“오해?”
“너는 나를 정의의 기사 같은 거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가 봐. 그래, 첫 인상이 그랬으니 그럴만도 하지. 하지만 내가 너를 겁박하고 너의 일행에 억지로 끼어든 건, 네가 위험한 인간일까봐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럼?”
“나는 그저… 어린 네가 걱정되었을 뿐이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