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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67/162)


  • 〈 67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식사를 모두 끝내자(벨투리안에게는 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잠에  것이다. 마르코와 아폴리온만.

    “아폴리온, 괜찮냐? 자 삼켜라, 약이다.”


    “아으, 끅. 죽겠어요.”

    “엄살은…. 좀 잠이나 자라.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생각보다 그들은 철두철미했다. 두 사람은 벌써 잠에 들었지만 남은  명, 큐빗트는 잠을 자지 않고 불침번을 선 것이다. 큰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원래 생각한 일은 무리였다. 오히려 더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다면 접어두는 게 좋아. 그때가 되면 팔 하나로 안끝날 테니까.”


    “….”


    “정말 딱딱한 남자라니까. 내 취향은 아닌 걸? 

    “….”

    “밤자리에선 어떤 얼굴일지 궁금해지네. 그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어.”


    “….”


    큐빗트는 시끄러웠다. 계속 무시했지만 큐빗트는 아랑곳 않고 벨투리안을 조롱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큐빗트 역시 계속된 무시는 참지 못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이봐, 나 심심하다고. 뭐라도 말해보지 그래?”


    그 말에 벨투리안이 입을 열었다. 상대가 달아올랐다면 이 때 뭐든 알아내는게 좋았다. 벨투리안이 말한 것은 베르헬트에 관한 얘기였다.

    “곧 우리 일행이 돌아온다. 그가 돌아온다면 너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벨투리안의 허세였다. 베르헬트가 돌아온다는 얘기는 사실이었지만 언제일지는 아직 몰랐고, 설사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도와줄지는 알  없었다. 지금 벨투리안은 노예 상인 같은 것들한테 잡힌 게 아니었다. 저들은 현상금 사냥꾼이었고 벨투리안은 범죄자였다. 정의감에 가득찼다고 하는 베르헬트라면 벨투리안을 포기할지도 몰랐다.

    “아하,  동료? 정확히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마을로 돌아간 시간 정도는 알고 있다고?  돌아온다는 거짓말 같은 거에 속을 줄 알았어?”


    “….”

    “그리고 우린 좀 돌아서 갈거라서 말이지. 그랑 마주칠 일도 없을 거야. 기대가 어긋나서 어떡하지?”

    큐빗트는 벨투리안의 거짓말을 간파한게 여간 우스운 듯 깔깔대며 웃었다. 웃음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큐빗트는 한참을 웃고 나서는  됐다는 듯이 숨을 내쉬고는 밖으로 나갔다.

    벨투리안은 신음했다. 이런 타이밍에 변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쯔르레이로 변하는 것은 그렇게 형편 좋은 변신이 아니었다. 자해를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묶여서   없었고, 설사 변할 수 있다고 해도 큐빗트가 언제 돌아올지  수 없으니 위험하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결국 잡힌 모양이지?”

    벨투리안은 살짝 놀랐다. 여태까지 자고 있는 줄 알고 있었던 세미가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애써 티를 내지 않으며 벨투리안이 말했다.

    “…그래.”


    “바보 같으니.”


    “닥쳐.”


    “아아, 주인님 때문에 저까지 잡혔잖아요. 분명 노예 상인 같은데에 팔아버릴 거야. 불쌍한 세미, 어떡해, 흑흑.”

    “닥치라고 했지.”


    “팔자가 좋네?”


    말소리가 너무 컸던걸까. 큐빗트가 다시 돌아와서 핀잔을 줬다.

    “아아, 혹시나 해서 묶어놓길 잘한거 같네. 역시 믿지 않길 잘했네.”


    “…무슨 얘기지?”


    “저 꼬맹이가 우리가 오니까 바로 눈물 흘리면서 구해달라고 하더라고. 쓰레기 같은 주인님한테 잡혀서 고생하고 있다고. 성의 하녀였다고 그러던데. 연기가 너무 실감나서 믿어볼까 했는데, 혹시 몰라서 묶어뒀거든.”


    벨투리안이 세미를 그대로 쪼아보았다. 기대도 안했다지만 설마 이렇게 바로 적한테 투항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미가 찡긋 한쪽 눈을 감고 웃으며 말했다.


    “작전이었어요.”

    벨투리안은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요망한거 봐. 둘이 무슨 사이야?”

    “말한대로 주인님한테 착취 당하는 가련한 하녀라니까요.”

    “걱정마. 이래뵈도 우리 범죄자만 상대하거든. 아가씨는 내려가면 곱게 놔줄 거야.”


    큐빗트의 얘기에 벨투리안이 실소를 지었다. 곱게 놔준다라. 하긴 저 얼굴만 봐서는 저 안에 들어있는게 진짜 끔찍한 범죄자라는 상상 같은 건 못하는  맞겠지. 세미는 태연하게 그거 다행이네요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머리를 굴렸다. 쯔르레이로 변해 밧줄이 풀린 이후 어떻게든 상대가 눈치채기 전에 검을 잡으면 됐다. 정면으로 싸우면 상대가 설사 셋이라고 해도 이길  있었다. 문제는 그 틈이 있느냐 였다.

    우선 검의 위치를 확인했다. 검은 자고 있는 마르코 옆에 세워져 있었다. 다행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큐빗트만 밖으로 내보낼  있으면 될  같았다.

    톡, 톡.

    옆 자리에서 세미가 벨투리안을 건들였다. 다행히 큐빗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 였다. 세미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나, 에, 게, 맡, 겨, 신, 호, 를, 줘.’

    제대로 알아듣긴 힘들었지만 대충 그런 의미 같았다. 벨투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했지만 지금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자정이 다가왔다. 벨투리안이 세미의 몸을 툭툭 치며 신호를 주자 세미가 곧장 큐빗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 언니 저….”

    “응, 뭐야?”

    “저 소, 소변 좀 보고 싶은데요….”


    벨투리안은 머리를 짚고 싶은 기분이었다. 고작 그런 거로 상대가 빈틈을 보일 것 같냐. 자신도 한때 써본 방법이었다는 것은 이미 기억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벨투리안의 예상대로 큐빗트는 단호하게 반응했다.

    “안돼, 그냥 싸.”


    “아잉, 언니   봐줘요. 저는 아무 짓도 안했잖아요.  진짜 급한데…. 여기서 쌌다가 냄새 나면 어떡할려고요. 자는 분들도 다 일어나서 욕할걸요? 같은 여자인데 어떻게 그럴  있어요. 제발요.”

    “으음…. 어쩔  없나.”

    그러나 큐빗트는 세미의 설득에 곧바로 넘어가버렸다. 벨투리안은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으나 어쨌든 계획은 성공이었다. 큐빗트는 세미를 묶은 밧줄의 다리 부분만 풀어주고 데리고 나갔다.


    세미와 큐빗트가 나가고 곧 얼마 안있어서 몸이 달아올랐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 강한 열이 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벨투리안은 무시했다. 밧줄이 투두둑하고 밑으로 떨어졌다. 벨투리안의 몸은 줄어들고 줄어들어 작은 소녀의 모습이 되었고 커다란 옷이 더는 맞지 않게 되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옷을 벗어던지고 마르코의 옆에 놓인 솜뭉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뭐, 뭐야. 이 꼬맹이는.”

    솜뭉치에 쯔르레이의 손이 닿기 직전이었다. 잠에서 깬 마르코가 본능적으로 검을 향하는 쯔르레이의 손목을 쥐어잡고 던져버렸다.

    “아악!”


    오두막의 구석진 곳으로 날아간 쯔르레이가 신음했다. 계획은 실패했다. 마르코는 잠에서 덜 깬건지, 아니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서 그런지 말을 더듬었다.

    “뭐,야, 이건 어디서  애야.”

    쯔르레이는 빠르게 일어나서 마르코를 향해 경계했다. 하지만 알몸의 소녀가 중년의 남성을 경계해봐야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뭐야! 망할 녀석이 없잖아! 큐빗트! 어딨는거냐!”

    마르코가 큐빗트를 큰 소리로 불렀다. 곧바로 큐빗트는 세미의 목덜미를 잡아 끌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뭐에요, 뭐야 저 애는? 그 놈은 어디 갔어?!”


    “제길,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망할 제대로 감시하라고 했잖아!”


    “씨발, 묶어놨는데 어디 갈거라고 그걸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 잠깐 저기 그 놈 옷이 있는데?”


    “뭐야…. 진짜잖아. 잠깐 그럼….”

    마르코와 큐빗트가 당황한 틈을 타 쯔르레이가 다시금 검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들킨 상황에서 상대가 그걸 쉽게 허용할 리가 없었다. 곧 쯔르레이는 마르코의 손에 붙잡혔다.


    “이익….”

    “맙소사, 설마….”

    “너, 그 놈이냐?”


    쯔르레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악다문 표정에서 마르코와 큐빗트는 뭔가 확신을 얻은 듯 했다.


    “이건… 예상 외의 사태로군.”


    “어떻게 하죠?”

    “일단 묶어두자고.”

    마르코는 꽉 잡은 손목을 놓지 않은  알몸의 쯔르레이를 들고 밧줄을 향해 다가갔다. 그 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세미가  힘을 다해 마르코에게로 몸을 부딪혔다. 다리가 풀려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년이?!”


    마르코는 겨우 어린 소녀의 부닥침 정도로 흔들릴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약간의 틈을 만든  사실이었다. 그 순간 쯔르레이가 곧바로 마르코의 팔을 물었다. 팔을 물린 마르코가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쯔르레이를 놓쳐버렸다.


    쯔르레이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을 잡으러 덤벼든 큐빗트의 손길을 피해내 솜뭉치를 향했다. 상대가 아무도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 쯔르레이가 솜뭉치를 손에 쥐었다.  짧은 공방 사이에서 아폴리온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고 잠에 빠져 있었다.


    “망할 년이…!”


    하지만 솜뭉치를 쥐었다고 전황이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벨투리안의 몸이었다면 모를까 쯔르레이 같이 연약한 아이의 몸으론 곧바로 적을 제압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열려있는 문 쪽으로 향해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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