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65/162)


  • 〈 65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벨투리안의 판단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분명 벨투리안이라면 이런 곳에서 사냥을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기상이변으로 동물들이 도망가 남아있는 동물들을 찾기 힘든 건 맞았다. 그런 상황에서 베르헬트가 자진해서 일을 해준다는 데 괜히 힘을 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우우, 괜히 그랬어. 이렇게 열심히 연기했는데 아무런 보람이 없다니.”


    “쉿, 조용히 해. 기척이 느껴진다.”

    벨투리안의 말이 떨어지는 즉시 세미는 입을 닫고 기척을 죽였다. 벨투리안 역시 불을 끄고 검을 잡고 준비했다. 이런 설산에서 갑자기 습격 당하면 정말 위험했다. 특히 짐 하나를 달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기척은 벨투리안 일행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주변을 멈돌았다. 이윽고 기척이 다른 방향을 향해서 사라지자 벨투리안은 멈춘 숨을 들이쉬었다.

    “갔다.”

    “후아. 깜짝 놀랐네. 몬스터라도 되나?”


    “인간의 기척이었다. 몬스터였으면 불도 켜놓고 있는데 놓칠 리가 없어.”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벨투리안이 급조한 눈굴이었다. 원래는 베르헬트도 있었기 때문에 조금 크게 지었던 눈굴은 현재 둘 밖에 없어서 상당히 넓직했다. 벨투리안이 불을 다시 지폈다.


    “내일 다시 이동해야겠군.”


    “그 치는 어쩌고요?”


    “알아서 잘찾아오겠지. 여긴 위험하다. 누군지 모르는 자가 주변에 있어. 안전한 곳에서 기다리는  나아. 어차피 여긴 급조한 곳이라서 오래 머무르긴 힘들었어. 표식을 남기고 간다.”


    매정한 발언이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베르헬트는 초월자였고 그 정도 되는 자가 쉽게 벨투리안을 놓칠  없었다. 어차피 이런 급조한 눈굴에서 계속 버티는 건 무리였으니 어느 정도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도 예상했을 것이다.

    벨투리안이 주변의 나무에 칼을 그어 표식을 남기는 사이 세미는 이미 잠에 빠져들었다. 지금까지의 행보로 생각하면 정말 세미가 잠을 자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일단은 그러했다. 벨투리안 역시 잠을 자야했다.

    문제는 원래 베르헬트가 있었을 때는 둘이서 불침번을 번갈아 가면서 했는데(세미의 경우에는 불침번을 맡을 생각도 없었고 신뢰도 되지 않아 제외되었다.) 지금은 불침번을 설 사람이 벨투리안 혼자라는 것이다. 벨투리안은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모닥불의 옆에 앉았다.


    이렇게 혼자 있을 때면 벨투리안은 여러 상념으로 머리가 가득찼다. 제놈 그라시아에게서 얻은 정보니 만큼 확실할 거라고 믿고 온 것이다. 초월자 베르헬트의 등장과 기상이변으로 신뢰도는 더욱 올라갔다. 그런데 벌써 엿새나 지났는데도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벨투리안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급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마음 뿐이었다. 그러나 이 설산은 얘기가 달랐다. 바위 산맥 골트룬이 갑자기 눈으로 뒤덮인 것이 단순한 기상 이변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몬스터 떼들이, 그것도 비싼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으니까 좋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설산에서 오래 살았던 벨투리안은 알았다. 눈이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이건 비상식적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눈은 더 많이 내릴 것이고 인간이 돌아다닐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할 것이다,  산맥은.


    그 전에 어떻게 해서든 빙룡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뭐든 간에 저주를 풀어낼 단서를 얻어야 했다. 세미가 말했던 이야기들의 진위 여부도 파악해야 하고.

    그때 돌연 굴 밖의 나무가 푸석하고 흔들렸다.

    벨투리안은 조용히 검을 들었다. 눈굴로 무언가 작은 것이 오고 있었다. 긴장을 유지한 채로 굴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들어온 것은 한 마리의 도마뱀이었다. 아니, 몬스터였다. 평범한 도마뱀처럼 보였지만  몸이 눈처럼 새하얗고 차가운 입김을 내뱉는 몬스터이다. 작은 걸 보니 아직은 새끼인 게 분명했다. 아마 무리에서 길을 잃고 떨어져 온기를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벨투리안은 검을 내렸다. 상대는 어린 동물이었다. 몬스터라고는 하나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위협도 되지 않는 존재였다. 녀석은 알아서 불길로 가까이 가더니  하고 누워버렸다. 배짱도 좋은 녀석이었다.

    벨투리안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중간중간 눈을 감고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제대로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아침이 되자 세미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도마뱀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암, 잘잤다. 어라, 주인님은 잠 안잤어요?”


    “눈발이 점점 거세지고 있다. 지금 이동해야 해.”

    세미는 웬일로 군말 없이 벨투리안의 말에 따라서 준비했다. 짐을 모두 챙긴 벨투리안은 눈굴을 허물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의 말이 흰소리는 아니었는지 눈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더 안전한 장소를 찾으려고 주변을 계속 둘러보았다. 이윽고 두 시간 가량이 지났을 때 벨투리안은 버려진 산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여기서 머물다 가도록 하지.”

    “이런 곳에 산장이 있다고요? 흐음….”

    세미는 갑자기 산장이 나타난 게 의아한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위치 상 사냥꾼들, 혹은 나무꾼들이나 약초꾼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쉬는 용도처럼 보였다. 벨투리안은 어째서 세미가 의문을 가지는지 물었다.

    “어제 인기척이 느껴졌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움직였다면 이 산장으로 왔을 것 같은데, 산장 안에는 아무도 없어보이거든. 뭔가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나?”

    “쓸데없는 소리.”


    벨투리안은 세미의 말을 무시하기로 했다. 산장에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곤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계 자체는 늦추지 않고 벨투리안은 산장으로 향했다.


    산장은 전에 있었던 곳보다는 작았다. 산장이라기 보다는 작은 오두막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아보였다. 오두막은 작고 아늑했지만 오래 머물기 적합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정말 산지기들의 쉼터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벨투리안이 부싯돌을 꺼내 화로에 불을 지폈다. 벨투리안은 작은 냄비를 꺼내 눈을 담고 녹였다. 그리고 육포와 채소 찌꺼기들을 집어넣고 저었다. 곧 국물이 우러나고 그럭저럭 먹을만한 스프가 완성되었다.

    ‘역시 생하울라 처럼은 안되는 군.’


    모처럼 옛 친구를 떠올리던 벨투리안은 스프를 먼저 한입 먹어 보고는 세미에게 나누어주었다.


    “웩, 이걸 음식이라고 한거에요? 제가 셰프였으면 주인님은 퇴장이에요, 퇴장.”

    “입 닥쳐.”


    “네네, 힘없는 메이드는 닥쳐야죠. 베르헬트 그놈이 음식 하나는 잘했는데.”


    “곧 보게 될 테니 다행이군.”

    “이 스프를 계속 먹어야 된다면 차라리 그쪽이 나은  같네요.”


    “먹기 싫으면 내놔, 난 배고파.”


    “헤헤, 참 맛있는 스프로군요?

    계속되는 불평에 결국 벨투리안이 손을 뻗어 세미의 밥그릇을 뺏으려고 하자 세미는 재빠르게 말을 바꾸고 접시를 뒤로해 피해냈다. 아무튼 간에 두 사람의 식사 시간은 그렇게 이어졌다.

    “베르헬트가 올 때까지 여기서 계속 있을 거에요?”


    “일단은.”

    “흠….”

    “여기를 기점으로 주변 지역을 좀 탐사하고 사냥도 좀 해둬야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 그 도마뱀을 잡지 않은 것이 조금 아까웠다. 그때는 아무래도 밤을 지새던 중이라 정신이 없어 그럴 생각을 못했는데 잘생각해보면 먹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으니 어쩔  없었다. 벨투리안은 생각을 접고 밖으로 나갔다.


    “사냥 해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네에~.”


    벨투리안은 나가서 한참을 돌아다녔다. 눈발이 거세긴 했지만 아직 이 정도라면 벨투리안의 활동권 내였다. 주변을 동그랗게 돌아다니는 형식으로 주변의 지형을 파악하면서 길을 표시해두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벨투리안은 쯔르레이일 때 쓰는 작은 활을 꺼냈다.  몸에 맞는 활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몸에는 작은 활이 어색했다. 하지만 사냥을 못할 정도도 아니었다. 사냥이 끝난 후 벨투리안은 두 마리의 토끼와 다람쥐 하나를 잡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벨투리안은 사냥을 그만두고 표식을 따라 오두막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꽤나 멀리 나온건지 오두막은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잠깐.


    길을 잃었다.


    분명히 표식을 제대로 해놨을터인데. 표식을 따라가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없었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하기보다는 길을 찾아야  때였다. 벨투리안은 초조하게 주변을 돌아보면서 길을 찾았지만 오두막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때였다.


    벨투리안이 나무에서 어제의  도마뱀을 발견했다. 아니, 어제의 그 도마뱀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똑같은 모습이었다. 도마뱀은 벨투리안을 발견하더니 벨투리안의 앞에 있는 나무까지 와서 꼬리를 흔들더니 곧 다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벨투리안은 도마뱀을 쫓기로 했다. 이유는 자신도 몰랐지만 어차피 지금은 길을 잃어 다른 곳으로 가야했다. 저 도마뱀을 잡으면 식량이 늘어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런 걸 떠올려서 쫓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벨투리안이 도마뱀을 쫓아갔다. 도마뱀은 결코 빠른 속도가 아닐 텐데도 불구하고 벨투리안이 달라 붙을락 말락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도마뱀을 쫓아가는 것 끝에는 숲의 끝자락이 있었다.


    나무가 줄어들고 숲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마구잡이로 달리던 벨투리안은 곧 도마뱀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숲의 끝에는 절벽이 있던 것이었다. 벨투리안은 절벽을 보고는 곧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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