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64/162)


  • 〈 64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가 말이 막히니 이번엔 세미가 나섰다.

    “단순히  얼굴을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요. 그럼 됐지요? 이제 돌아가세요.”


    “너는 내 얼굴을 어떻게 알고 있었단거지? 내 얼굴이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얼굴은 아닌데.”

    “자기과신이네요. 흥!”

    “그만해라, 세미.  스토커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거 같으니까. 우리 힘으론 어쩔 수 없다.”

    “우와, 최악. 소아성애자에요? 이런 아이들만 있는 데에 끼겠다고?”

    세미는 가차 없이 베르헬트를 매도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원한 관계가 있으니 만큼 정말로 진저리 나게 베르헬트가 싫은 모양이다. 세미가 베개를 집어던지자 베르헬트는 가볍게 잡아냈다.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은 아니겠죠? 행동을 같이 하든 어쨌든 나가있어요. 당신이랑 같이 방을 쓸 생각은 없으니까. 설마 여자애들만 있는 방에 있고 싶은 건 아니겠죠?”

    “아까부터 계속 공격적이군. 나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아가씨?”

    “어머, 웃겨라. 원한은 무슨. 지금 소아성애자 처럼 질척하게 달라붙는 게 원한이라면 원한이겠죠?”

    “안그래도 걱정마라. 빙룡을 찾게 되면 알아서 떨어져 주도록 하지.”


    “그건 무슨 소리지?”

    갑자기 튀어나온 빙룡의 이야기에 쯔르레이가 물었다. 분명 아까도 빙룡이랑 키워드에 갑자기 흥분했었지. 베르헬트 역시 빙룡을 찾고 있는 건가?

    “목적은 다른  같지만, 나도 빙룡을 찾고 있다. 그러니 행동을 같이 하자는거다.”


    “아까는 수상해서 감시한다고 얘기하더니.”


    “그것도 있다. 아무래도 저 아가씨한테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솔직히 수상하거든.(‘나는 사양이거든요!’) 나는 감이 좋다. 애초에 이런 남자, 아니 여자인가 아무튼 이런 자와 같이 여행하는 인물이 평범할 리는 없지?”


    분명 베르헬트의 감은 좋았다. 쯔르레이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날 정도였다. 어쩜 그렇게 냄새를 잘맡는건지. 세미가 수상하다는 걸 곧바로 눈치 챈 것이다. 세미가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행동하긴 했지만, 그저 아이가 떽떽대는 걸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 역학 관계에서 쯔르레이와 세미는 약자였고 베르헬트는 강자였다. 아쉽게도 당장에는 둘이 베르헬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우린 내일 내 몸이 변하는 대로 이 마을을 떠나서 빙룡을 찾을 생각이다. 네가 따라오는 걸 막지는 못하겠지만 일정을 바꿀 생각은 없으니, 따라오고 싶다면 네가 맞춰라.”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제 나가.”

    “나는 바깥에서 적당히 노숙하고 있도록 하지.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도록.”

    “흥, 그럴  없으니까 빨랑 가요.”

    베르헬트는 순순히 쯔르레이와 세미의 방에서 나갔다. 솔직히 고집 부려서 남아있더라도 쯔르레이로서는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곱게 나가준 게 다행이었다. 베르헬트가 나간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세미가 집어던졌던 베개를 주워서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돌연 베개를 푹푹 내려치기 시작했다.

    “이, 망할 새끼. 진짜 어디까지 쫓아오는 건지 알 수가 없네, 끈질겨, 끈질겨!”

    “대체 그는 무슨 자이지?”

    “말했잖아요. 북벽의 기사 베르헬트. 오지랖 넓고 정의감 강한 스토커에요.”

    “스토커?”

    “왕국 아라곤에 있을 때는 얼마나 나를 쫓아다니던지. 진짜 최악이었어. 거기선 잠을 제대로 잔 기억도 없다니까요.”

    “좋은 사람이란 얘기군.”

    지금 세미가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본디 그는 극악한 흑마법사이다. 그를 쫓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일이 분명했다. 쯔르레이의 태클에 세미가 진절머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무튼 베르헬트는 초감각이 있으니 조심해요. 거짓말도  통하고 숨기는 것이 있어도 금방 알아내죠. 조심하는 게 좋을거에요. 내 정체가 들키면 우린 쌍으로 반토막날 테니까.”

    “너는 그렇다 쳐도 나는 왜.”

    “아 말이 그렇단거지. 우리 정이 있는데 같이 죽어 주지도 못해요?”

    “미쳤냐? 아직  맞았어?”


    “와, 진짜 치사하다, 와.”

    세미의 헛소리는 거기서 끝이 났다. 선을  넘으면 쯔르레이가 손을 들 것이 분명했으니 세미도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그보다는 이제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야 했다. 세미가 물었다.

    “그 노파는 뭐라고 했어요? 빙룡의 위치를 담긴 지도라도 뾰로롱하고 내주던가요?”

    “아니, 치매 걸려서 제대로 된 정보는 하나도 못얻었어. 아무래도 무작정 뒤지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다.”


    “으엑, 최악. 설산에서 또 노숙해야해요?”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저 놈은 뭐 아는  없으려나. 억지로 일행에 꼈는데 도움이라도 되야지.”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지.”

    “것보다 베르헬트가 빙룡을 찾는다라… 흠, 뭐 때문이려나.”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나?”

    “저도 베르헬트가 엄청난 스토커라는 거 말고는 잘몰라서요.  혼자서 아라곤 왕국의 국방을 책임지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그 치에 대한 정보는 꽁꽁 숨겨놨거든요. 지금 그가 이렇게 몰래 나와있단 것도 비밀이겠죠. 그가 없으면 아라곤 왕국은 무방비하니까.”

    대화 도중 쯔르레이는 걸리는 것을 찾았다.


    “잠깐 비밀이라고?”

    “네, 절대 비밀이죠. 본래라면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우리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에요. 아마 이 모습 때문에 안죽인거겠지만. 겉보기에 휘둘리다니 바보 같다니까.”

    쯔르레이는 순간 허탈해졌다. 그렇다면 자기가 북벽의 기사라고 사람들에게 밝히는 일은 사실상 없었을 일 아닌가. 베르헬트의 거짓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거기서 정말  생각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과 자체는 달라질 게 없었지만 속았다는 사실에 쯔르레이는 힘이 쭉 빠졌다. 허탈해졌다.

    “…식사를 챙겨오도록 하지.”

    “난 돼지고기 스튜!”

    ~


    “얘기는 정말 사실이었군. 놀라운데.”


    “감이 좋다면서 그런 것도 눈치 못채나?”

    “아무리 감이 좋더라도 상식 자체를 초월하는 일에 대해서는 파악하기 힘든 일이야. 누가 자네를 그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겠나?”


    “흥….”


    밤이 되어 하늘이 어두워지고 쯔르레이는 다시 벨투리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벨투리안은 밖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던 베르헬트를 불렀다. 무시하고 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어차피 금방 쫓아올 거라고 생각해 포기했다.

    “정말 이 무뢰한이랑 같이 가야한다니, 으 최악이야.”


    “그만 징징거려. 시끄러워.”

    “그치만요, 주인님.”


    “아무도 없는데 주인님 타령도 그만해.”


    서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베르헬트가 말했다.


    “둘이 꽤나 사이가 좋군?”


    “미쳤어요?”

    “끔찍한 소리.”

    두 사람이 질색하는 걸 보고 베르헬트가 크게 웃어재꼈다. 두 사람은 미친 놈 보듯 보았지만 그렇다고 베르헬트가 웃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사람이 마을을 나가려고 할 때 마을의 경비병이 말을 걸어왔다. 이런 시간에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얘기였지만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명은 북벽의 기사였고 다른  명은 설산의 산행에는 극히 능한 벨투리안이었다. 그리고 벨투리안에게 있어서 세미의 안위는 목숨만 살아 있다면 더 이상 알 바가 아니었다.


    물론 베르헬트가 그런 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지라 그는 세미를 걱정했지만 그를 적대하는 세미와 신경 쓸 거 없다는 벨투리안의 말에 의견을 접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불청객인 것이다.


     사람이 마을을 나오자 고요하고 어두운 밤하늘이 그들을 반겼다.

    “한치 앞도 안보이는 군. 이래 서야 제대로 갈  있는가?”

    베르헬트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준비성이 철저한 벨투리안은 랜턴을 준비해왔지만 랜턴은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벨투리안에게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시간이 없어. 불만이 있으면 빠지도록.”

    “그래, 알았다. 조용히 하도록 하지.”

    산은 어둡고 길은 고됬다. 벨투리안이 가진 단서는 제놈 그라시아가 넘겨준 문서에 그려진 골짜기의 모습 뿐이었다. 벨투리안이 쯔르레이일 시간에 그저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비슷한 골짜기를  적이 있냐고 물어보고 다녔지만 소득은 없었다. 정말로 단서 하나 없이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길을 길어졌고 서로의 말수는 원래 적었다. 벨투리안은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주변 나무에 솜뭉치로 알아보기 쉬운 표식을 남기고 다녔다. 그러나 산길은 극히 미로와도 같아 표식이 쓸모를 발하는 일은 적었다.

    하루마다 모습을 변하는 벨투리안도 큰 문제였다. 애초에 일행에 세미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속도는 줄어들 것도 없었지만 변화를 남에게 보이기 싫어하는 벨투리안이 매번 숨을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은 확실히 힘들었다.

    결국 엿새 째가 되어 서야 베르헬트가 입을 열었다.

    “너무 느리군.”


    “너는 예상했어야 했다.”

    “가져온 식량도 많이 줄어들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는 것이?”

    “그런 식으로는 결국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못한다. 이대로 계속 가는 게 옳아.”


     사람의 다툼은 이전에도 여러  일어났었지만 본격적인 의견 대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미는 조용히 자고 있어 두 사람을 말릴 사람도 따로 없었다. 물론 세미가 깨어있었다면 말리기는 커녕 부채질이나 했을 것이 분명했다.

    “식량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지금까지는 의도적으로 피했지만 몬스터를 잡아서 먹으면 된다. 이쪽에는 아직 남은 동물들이 있는 것도 파악했어.”

    “하지만 더 이상 가면 저 아이의 몸이 버티지 못할 텐데?”

    베르헬트가 세미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실제로 세미는 고된 산행으로 여러모로 체력이 소모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호문클루스의 회복력도 어느 정도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체력 소모에는 의미가 없는 건지 계속해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색 속도도 느려져 베르헬트는 세미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불만이었다.

    “수상하다더니 챙기기는 잘하는 군.”

    “농담이 아니다.”

    “저… 것의 몸이 버티든, 버티지 못하든 그런  상관 없어. 빙룡과 만날 때까지 목숨만 붙어있으면 그만이다.”

    “그런 말을…!”


    “꽤나 아끼는 군. 네가 무슨 생각인지 나는 모르지만 우리들의 일은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게 조건이었다.”


    “…좋아 그럼 나는 마을로 돌아가서 식량을 공수해오지. 주변에서 기다려라. 혼자 움직이면 훨씬 빠를거다.”

    결국 베르헬트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벨투리안 역시 납득이 가능한 선의 얘기였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벨투리안도 내심 세미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예 걸을 수 없다면 그건 문제가 될 테니 말이다.


    “그거까지라면…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틀 안에 돌아오도록 하지.”

    베르헬트가 일어났다. 곧 그의 신형은 사라졌고 움직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갔나요? 그 인간?”

    그리고 베르헬트가 사라지자 귀신 같이 세미가 일어났다. 아니, 일어난 게 아니었다.


    “…뭐야, 깨어있었나.”

    “헿, 제가  정도로 체력이 떨어질 리 만무하죠. 다 녀석을 속이기 위해서 벌인 작전! 이제 저 가증스러운 베르헬트를 내쫓았으니 우리끼리 모험을 떠날 시간입니다!”

    “베르헬트가  때까지 기다릴거야. 닥치고 있어.”

    “뭐? 뭐요?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로 악당을 내쫓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악당은 너겠지. 그의 말도 일 리가 없진 않아. 식량은 최대한 보존해야 하고 이런 설산에서 사냥하긴 쉽지 않아. 그가 수고를 해준다는 데 괜히 버릴 필요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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