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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63/162)


  • 〈 63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결론부터 말하자면 쯔르레이는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치매기가 있다는 얘기가 정말이었는지 노파는 자꾸만 말을 못알아듣고 이상한 헛소리만 했다. 쯔르레이는 노파의 헛소리를 들어주면서 파이나 먹는 것 말고는 할  있는 일이 없었다. 여담이지만 파이는 꽤나 맛있었다.

    헛소리를 듣던 쯔르레이가 정보를 얻는 것을 포기하고 가려고 하자 노파는 계속 쯔르레이를  붙들었다. 그래서 쯔르레이가 밖으로 나온 것은 상당한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세미는 여관에 잘 박혀 있겠지. 세미가 아무 능력도 없다지만 혼자 오래 놔두는 건 아무래도 불안했다.


    아니, 지금은 당장 밖에서 베르헬트를 만날지도 모르는 자신이 더 불안했다.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게 분명했다. 하필이면 그런 자와 마주치다니.

    “그래, 잘가거라. 아가야.”


    쯔르레이가 아만에게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무튼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으니 인사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아만이 갑자기 쯔르레이의 어깨를 잡고 귓속에 속삭였다.


    “용의 앞에서 자신을 잃지 말게나.”

    쯔르레이는 곧바로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아만은 쯔르레이를 밀쳐내고는 집 안으로 다시 돌아갔다. 쯔르레이는 다시 아만의 집 문을 쿵쿵 두들겼다.  아만이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응? 무슨 일이니, 아가야.”


    “아까 말한  무슨 말인지…!”


    “응? 무슨 말이냐니. 그보다 너는 누구니?”


    그러나 아만은 아까까지의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기라고 생각하기에는 아만의 태도가 너무나 천연덕스러웠다. 정말로 연기라면 아만은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쯔르레이는 다시금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다.


    쯔르레이가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손길이 쯔르레이를 마을의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반항할 틈새도 없었다. 손길의 정체는 예상한대로 베르헬트였다. 르로망샤에게 갑자기 공격 당하고 아무 것도 못했던 때가 생각났다.


    “그 노파와 무슨 대화를 나눴지?”


    베르헬트가 물었다. 그는 다시 공격해올 의사는 없어 보였지만 겉보기만으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또 어린 아이를 겁박하려는 건가? 파렴치한 같으니.”

    “크윽, 네가 평범한 어린아이가 아닌 것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아까 이미 자신의 외모가 주변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학습했다. 쯔르레이의 무력으로는 결코 초월자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방법을 쓴다면?

    “다른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지금 내가… 우, 울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감당할거지?”


    쯔르레이는 베르헬트를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꺼낸 이 특단 조치에는 베르헬트도 당황해서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어이가 없어서 일지도 모르고.

    “그럴 배짱도 없으면 가라.  네 놈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


    자신의 눈물을 협박 소재로 삼는 것 치고는 참 당당한 말이었다.

    사실 쯔르레이는 굳이 베르헬트와 적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의 목적은 모르나, 세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분명히 악인은 아니었으니까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미였다.


    세미의 정체를 들킨다면 베르헬트는 망설임 없이 세미를 베어낼 것이다. 그리고 세미와 현재 동행하고 있는 자신도 안심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베르헬트와는 친해 질  없는 것이 쯔르레이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아무래도 이 정도로 만만한 사내는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럼 어쩔 수 없나.”


    베르헬트가 갑자기 검을 휘둘렀다. 그건 쯔르레이를 향한 게 아니라 주변의 공간을 향해서였다.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두른 베르헬트에게 당황한 쯔르레이가 말했다.


    “무, 무슨 짓을.”


    “잠시 저 산맥의 일부를 부쉈다.”


    “뭐?”

    “그쪽에서 곧 눈사태가 일어날 테니 그 소리에 네 울음소리는 묻힐 것이다. 자 이제 입을 열 생각이 들었나?”


    “마, 말도 안돼.”


    쯔르레이는 말도 안되는 얘기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 남자라면 그게 가능했다. 쯔르레이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너,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그런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군. 어째서지? 일반적이라면 헛소리라고 웃어넘길 것을 너는 진심으로 두려워 하고 있군.”

    베르헬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너, 내가 초월자임을 알고 있구나.”

    “크읏.”

    쯔르레이는 곧바로 달렸다. 달렸지만 금방 따라잡혔다. 곧 베르헬트의 손에 쯔르레이가 들어올려졌고 베르헬트가 쯔르레이의 후드를 벗겼다.


    “확실히 굉장한 얼굴이군.”

    베르헬트가 손을 놓자 쯔르레이가 다시 후드를 뒤집어 썼다. 이미 도망갈 수 없단 걸 알았으니 더는 도망칠 필요도 없었다. 베르헬트도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손을 놔준 것이겠지.


    “…노파와는 별 얘기 하지 못했다. 치매에 걸려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더군.”

    “네가 무엇을 물었는지는 대답하지 않는 군.”

    쯔르레이가 이를 갈고 대답했다.


    “용에 대해서였다. 빙룡의 위치를 물었어.”

    “빙룡?!”

    베르헬트가 갑자기 외쳤다. 베르헬트의 외침에 깜짝 놀란 것이 부끄러운지 쯔르레이가 얼굴을 붉혔다.

    “뭐, 뭐냐.”

    “빙룡은 무슨 일로 찾아가고 있는 거지?”


    베르헬트는 빙룡이란 키워드에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분명한 변화였다. 쯔르레이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거까지 말해야 할…”

    “지금 네 목숨은 내  위에 있다는 걸 기억하는  좋을거다.”


    베르헬트의 협박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다.”


    “저주?”

    쯔르레이가 정말로 이것만큼은 대답할 수 없다는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더는 말할 수 없다.”


    “…그렇군. 그래, 알겠다. 빙룡에 대해서 노파는 무슨 말을 했지?”


    “말했잖은가. 아무 대답도 못들었다고…. 아니, 한가지 말하긴 했지. 용의 앞에서 자신을 잃지 말라고 했다.”

    “무슨 의미지?”

    쯔르레이는 짜증에 가득 찬 채로 대답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신경질 가득한 쯔르레이의 말투에 베르헬트는 의외라는 듯 손을 턱에 짚었다.

    “그렇게 말하니 제 나이처럼 보이는 군.“


    “이제 됐으면 난 가겠다.”

    대화가 어느 정도 일단락 된 것 같으니 쯔르레이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베르헬트는 곧바로 도망가려는 쯔르레이의 손목을 잡고 말했다.

    “아니, 넌 아직도 충분히 수상하다. 앞장서라. 당분간은 너와 행동을 같이 하지.”


    “뭐? 웃기지마라. 누구 마음대로!”

    “힘 있는 자의 마음대로.”

    확실히 베르헬트가 지금 힘으로 쯔르레이를 제압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쯔르레이에게는 특단의 조치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하! 아까처럼 소리로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당장 어린 아이를 납치하는 무뢰배가 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그러고보니 아직 내 소개를 안했군.”


    “뭐?”

    “나는 북벽의 기사 베르헬트다. 왕국 아라곤의 초월자이자 빙해 기사단의 단장이지. 지금은 사정상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내가 정체를 밝힌다면 과연 네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크윽….”


    “그리고 넌 이미 내가 베르헬트임을 눈치채고 있던 거 같군. 별로 놀라지 않는  보니 말이야.  수상함은 이미 충분하군. 이제는 내 말을 따를 생각이 드는가?”

    “…빌어먹을.”


    세미에게 미리 정보를 들었던 게 오히려 패착이었다. 베르헬트가 웃었다.


    “수락하는 걸로 알지.”

    ~


    “우와아아아아아아!!! 미쳤어요?!”


    “입 닥쳐, 세미.”


    “미쳤어. 미쳤어. 미친 게 틀림없어, 우아앙.”


    베르헬트와 같이 여관으로 돌아온 쯔르레이를 보고 세미가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도 했다. 세미에게 베르헬트란 그야말로 천적이자, 하늘 아래 같이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위험하고 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랑 같이 들어오다니! 최악이었다.

    “너는 어제의 그 꼬마라군. 그 남자는 어디 있지?”

    “알 바야?”

    쯔르레이가 신경질냈다. 하지만 베르헬트는 쯔르레이의 신경질에 멈추지 않고 추궁했다.


    “남자는 어디 있지?”

    결국 또 이렇게 저주에 대해서 밝혀야 하는 건가. 어설픈 거짓말로 쯔르레이의 정체에 대해서 숨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헬트는 너무나 눈치가 빨랐고 조그마한 거짓말이나 태도 변화도 바로 감지해냈다. 결국 쯔르레이는 사실을 말해버렸다.

    “남자는… 여깄다.”


    “뭐?”

    “내가 어제의  남자라고 말했다.”

    “그건 무슨… 하, 저주에 걸렸다고 했던가. 맙소사.”


    베르헬트는 눈치가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쯔르레이가 어쩔 수 없이 굴복하여 말한 얘기에 진실을 금방 깨달은 것이다. 막무가내로 쯔르레이를 파고드는 그에게 숨길  있는 사실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와의 실력 차이가 너무나 컸다.


    “망할, 더 이상 말걸지마.”

    “아니, 잠깐만요. 쯔르레이 바보에요? 이거  말해버리면 저 사람이 우리랑 같이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쫓아버려요, 빨리.”

    “…아!”

    맹점이었다. 베르헬트가 쯔르레이를 쫓아온 이유는 수상해서였다. 그런데  사실을 전부 밝혔다면 이제 쫓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간만에 쯔르레이는 세미의 말에 기분이 좋아져서 외쳤다.

    “들었지?! 빨리 돌아가라.”


    “아직 나는 네가 어떻게 내 정체를 알고 있었는지 듣지 못했는데.”


    쯔르레이는 순간 세미의 정체를 밝혀서 넘기고 이 지긋지긋하고 막무가내인 사내를 쫓아버릴까 고민했다. 대체 뭐가 그리 수상하다고 이런 어린애를 쫓는 건가? 물론 생각만  뿐이었다. 이제 와서 세미가 죽어버리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헛고생이 돼버리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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