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세미와 쯔르레이, 둘의 체격이 비슷하단 건 다행인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변장 같은 건 불가능했을 테니까. 쯔르레이는 지금 세미의 옷을 입고 아만이라는 이름의 노파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전날 벨투리안과 세미는 식사를 마치고 나서 바로 숙소를 잡아 들어갔다. 용병들이 천지라 혹시나 방이 없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남은 방이 있었다. 1인실이었지만.
여관의 주인에게 절대 방을 찾아오지 말라고 말한 뒤 둘은 방에 올라갔다.
세미는 들어가자마자 침대를 차지하면서 말했다.
“내꺼!”
벨투리안은 무시했다. 어차피 오늘 벨투리안은 쯔르레이로 변할 것이었고 침대는 두 소녀가 자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세미는 이미 곯아떨어졌다.
벨투리안은 자정까지 기다린 후 쯔르레이로 변했다. 세미의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침대에 올라가 잠에 빠진 세미를 한쪽으로 걷어차고는 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조용히 잠에 빠지려는 중인 쯔르레이가 살짝 눈을 뜨자, 그 앞에는 세미의 얼굴이 보였다.잠에 빠진 세미의 얼굴은 흑마법사라고 생각하기 힘든 순박하고 귀여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뭘 그리 보고 계세요?”
“…!”
그러다 갑자기 눈을 뜬 세미 때문에 쯔르레이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랐어! 성공!”
“닥쳐.”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구세요. 이런 밤에 여자아이들끼리 만의 대화라도 나눠보는 게.”
세미의 대답에 쯔르레이가 생각만 해도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두 사람 모두 속은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저씨들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세미를 걷어 찬 쯔르레이는 세미에게 등을 돌리고 잠을 청했다. 아쉬운 건 세미 뿐이었다.
“힝.”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쯔르레이는 아직도 꿈나라에 빠져 있는 세미를 발로 차서 깨우고 말했다.
“벗어.”
쯔르레이의 말 한 마디에 세미는 과장되게 자기 몸을 가리면서 말했다.
“네? 아가씨. 앗, 아앗, 안돼요! 아읏, 제 순결을…!”
물론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쯔르레이가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세미를 걷어차고 말 없이 세미의 겉옷을 직접 벗겼다.
“흑흑, 내 순결이….”
“나갔다 올 테니까 안에서 조용히 있어.”
“네에~”
과장되게 우는 연기를 하던 세미는 쯔르레이가 나간다고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밝게 인사했다. 쯔르레이는 받아주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온 쯔르레이는 곧바로 여관 주인에게 말을 물었다.
“아만이라는 노파가 어딨는 지 알고 있나…요?”
쯔르레이는 평소처럼 반말을 하려고 했지만 곧 자신이 세미의 변장을 하고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황급히 존댓말로 고쳤다. 다행히 여관주인은 자신이 세미가 아니란 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아만? 그 노친네? 그 노친네는 왜?”
“물어본 것이 있는데, 그 노파가 알고 있다고 들었어요.”
“별 일이네… 하루에 두 사람이나 그 노친네를 찾다니.”
두 사람? 쯔르레이 말고도 누군가 그 노파를 찾고 있다는 얘기인가?
“아까도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와서 그 노파를 찾던데, 꼬맹이 너랑 비슷한 말을 했지. 뭐 아만은 마을 바깥 쪽 오두막집에 살고 있어. 저기 저 쪽으로 쭉 가서 오른쪽으로 틀면 나올 거다.”
“고맙습니다.”
“네 주인은 계속 방 안에 계신다냐?”
“네.”
“어디 이런 곳 까지 애를 데리고 오다니, 쯧쯧….”
여관 주인에게도 절찬리에 악명을 쌓고 있는 벨투리안이었다. 쯔르레이는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그 남자가 자신을 규탄했을 때 세미가 자신의 편을 들어준 건 상당히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곧바로 자신을 놀려먹기 시작했을텐데.
변덕이라고 하면 변덕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나중에 돌아갔을 때 추궁해보도록 할까. 쯔르레이는 여관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아만의 집은 꽤나 멀었는데 확실히 마을 끝에 다 되어 서야 그녀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쯔르레이는 도착하자마자 문에다 대고 노크했다.
똑똑
집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일찍 온 것일까. 확실히 많이 이른 아침이긴 했다. 쯔르레이는 여관으로 돌아가 시간을 때운 후에 다시 올 작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이, 아가씨!”
여관으로 돌아가던 중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쯔르레이를 불렀다. 쯔르레이는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부른 사람을 확인했다. 그는 산장에서 봤던 모험가인 마르코였다.
“역시 아가씨가 맞았네. 이름이… 세미라고 했던가?”
“….”
쯔르레이는 답하지 않았다. 한번 밖에 듣지 못한 목소리를 구분할지 모르겠지만 세미의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챌지도 몰랐다.
“아가씨 동행인은 어디에 있나? 여관에서 쉬고 있나? 흠, 아니 그냥 반가워서 그러는 거야. 하하. 큐빗트랑 아폴리온도 여관에서 쉬고 있네. 혹시나 운이 좋으면 만날지도 모르겠는 걸.”
쯔르레이가 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마르코는 혼자서 잘도 떠들었다. 답지 않게도 마르코는 꽤나 수다쟁이였던 것이다. 대개 그 내용은 쯔르레이, 아니 벨투리안에 대한 물음이 많았다. 간간히 세미의 대한 얘기도 좀 물었으나 그 내용도 대개 벨투리안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
하지만 결국 끝내 쯔르레이가 아무 답도 하지 않자 마르코도 더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지 곧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쯔르레이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다.
저들이 여관에 머문다는 건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혹시나 목소리를 들킬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세미에게 입단속을 시켜야겠다. 그리고 아까의 그 의문도 해소하고.
여관으로 돌아간 쯔르레이는 곧장 세미를 불렀다. 세미는 다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지만 쯔르레이의 부름에 금방 눈을 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흐아암.”
“어제… 그 남자가 널 두고 나한테 시비를 걸었을 때, 왜 평소처럼 놀리지 않았지?”
“놀렸으면 좋겠어요? 그런 취향인지 몰랐는데.”
쯔르레이가 슬며시 손을 들자 세미는 순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아이 참, 농담을 못하겠네. 됐어요. 저 그 사람 싫어하거든요. 그냥 그래서 그랬어요.”
대답은 상당히 의문이었다. 단순히 싫어서 그랬다고?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을? 쯔르레이가 의문에 차서 물었다.
“그 사람을 싫어한다고? 아는 사람이었나?”
“음… 그렇죠, 뭐.”
“그 사람이 누구길래?”
“초월자에요.”
나온 대답은 상상초월이었다.
“….”
“휘리오비치를 가장 열심히 쫓았던 자죠. 북벽의 기사 베르헬트라고 한다면 유명하답니다, 나름.”
이쯤 되면 제놈 그라시아가 농담으로 했던 저주가 초월자를 부르는 저주냐고 하던 것이 정말 사실이 아닐지 고민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런 곳까지 와서 마주치는 삶이이 하필 또 다른 초월자라니. 쯔르레이는 골이 아파왔다.
“그 자가 왜 여기에?”
“저도 모르죠, 그건. 솔직히 저도 어제는 조금 당황했다니까요. 이야, 제가 본체였다면 꼼짝없이 싸움을 걸어왔겠죠. 아무런 힘도 없는 귀엽고 가녀린 소녀라서 참 다행이라니까요.”
“잠깐, 그가 초월자라면 내가 지금 그와 마주친다면 어제의 네가 아니란 걸 눈치챌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아가씨, 바보에요? 당연하죠, 그건.”
쯔르레이가 슬며시 들어 올렸던 손을 그대로 다시 세미의 머리로 내리쳤다.
“아야! 왜 때려!”
“왜 말 안했어.”
“안 물어봤잖아.”
“한 대 더 맞아.”
“악!”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단순히 목소리만 주의하면 될게 아니었다. 만나는 순간 바로 들키게 된다니. 적당히 얼버무린다 해도 뭔가 오지랖 가득해 보이는 그 사람을 생각해보면 혹시 모르는 이야기였다.
‘최대한 피해 다녀야 겠군.’
~
“넌, 어제 그 아이가 아니군.”
‘망할….“
최대한 피해 다니기는 커녕, 쯔르레이는 곧바로 베르헬트와 만나 정체를 들켜버렸다. 다시 아만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아만의 집 앞에서 곧바로 북벽의 기사 베르헬트를 만나버린 것이다.
“어떻게 된 거지? 이 마을에 다른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는데.”
“신경쓰지 마시오.”
쯔르레이는 결국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히려 어제와는 다른 목소리에 베르헬트는 더욱 확신에 차 말을 이어나갔다.
“목소리가 다르군. 너는 누구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을 두고 좌시할 수는 없다. 후드를 벗고 정체를 밝혀라.”
베르헬트는 망설이지 않고 쯔르레이에게 검을 들이댔다. 주변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 사람을 어린애를 겁박하는 무뢰한으로라도 몰아볼 텐데, 아쉽게도 아만의 집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쯔르레이는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어린 아이….”
하지만 베르헬트는 검을 치우지 않았다. 쯔르레이의 너무나도 이질적인 외모 때문일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거지?”
그때였다.
“어딜… 남의 집 앞에서 행패냐!!”
아만의 집 문이 열리고 큰 호통 소리와 함께 베르헬트에게 무언가 날아왔다. 베르헬트는 가볍게 피하고는 날아온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신발…?”
“감히 어린애한테 검을 겨누다니, 이 파렴치한 쓰레기 같으니!”
집에서 나온 사람은 노파 아만은 쯔르레이가 생각한 노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온 몸이 건장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거구의 노파는 치매가 있다는 늙은 할머니라는 얘기와는 다르게 아주 건강해보였다.
“그게 아니오, 노인장. 잠시만 제 말을….”
베르헬트는 해명하려고 했지만 딱히 나올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어린 소녀에게 검을 거두고 협박하는 중년의 남성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입이 두 개라도 변명할 방도가 없을 것이다.
“썩 꺼져! 아가야, 너는 이리로 들어오려무나.”
쯔르레이는 평소 애 취급, 여자 취급 당하는 것 만큼은 결코 좋아할 수 없었으나 지금만큼은 어째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아만의 집 밖에는 베르헬트만이 남게 되었다.
아만의 집은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였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히 부서진 가재들이 보였다. 아만은 쯔르레이를 부엌의 식탁으로 안내해주었다. 안으로 쯔르레이를 들인 아만이 물었다.
“그래, 할매 집에는 무슨 일로 왔누?”
드디어 물어볼 기회가 왔다. 쯔르레이는 조금 긴장하면서, 동시에 기대하면서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무엇을?
쯔르레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빙룡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