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세미가 잠에서 깨었다. 벨투리안은 여전히 자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무슨 수작을 부리면 곧바로 깨어날 테니 세미의 입장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여전히 모르고 있지만 사실 세미는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이었다. 지금까지 잠을 잔 건 사실 반쯤은 취미 생활에 가까운 일이었다. 세미는 설사 자고 있더라도 주변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이걸 알린다면 좀 더 편하게 벨투리안이 잠을 잘 수 있으려나. 물론 벨투리안은 세미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세미 역시 벨투리안이 편하게 자게 도와줄 의리 같은 건 없었고.
세미는 조심스레 일어나 조용히 자고 있는 모험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역시도 벨투리안을 신뢰하고 있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경계하는 채로 잠을 자고 있었지만 역시 모험의 피곤함은 숨길 수 없었는지 결국 완전히 골아 떨어진 모습이었다.
세 사람의 이름, 마르코, 큐빗트, 아폴리온이라고 했던가. 세미는 기억해두었다.
분명 세미는 일전에 벨투리안에게 말했다. 자신은 평범한 소녀라고. 그건 거짓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이보세요, 주인님~ 잠에서 깰 시간이에요.”
세미가 조용히 벨투리안을 흔들어 깨웠다. 곧바로 벨투리안은 얕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시간인가.”
“그래요. 어서 가자고요. 곧 모험가들이 일어날 테니까요.”
원래는 벨투리안은 여기서 편하게 자고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모험가들이 온 이상 그 계획은 변경해야 했다. 벨투리안의 체질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오래 있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미와 벨투리안은 서로 여행을 같이 하게 되었을 때 미리 약속을 정해두었다.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오가는 벨투리안의 입장에서는 누군가와 같이 다닌다는 것은 특정성을 확립하기 쉬워지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벨투리안일 때 세미는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로 했다. 두 어린 소녀가 같이 다니는 것과 한 남자와 얼굴을 가린 소녀가 같이 다니는 것을 같은 일행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울 테니.
더불어서 세미는 벨투리안의 하녀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세미가 주장한 것으로 목적은 그럴듯한 신분이었지만, 보통은 벨투리안을 놀리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벨투리안은 망설이지 않고 응징을 가하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남자 모습일 때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 제대로 된 응징을 하지 못하는 편이었고 세미는 그걸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없어지면 평소처럼 다시 응징을 당했지만.
세미와 벨투리안이 조용히 산장 밖으로 나섰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생각보다 이른 시간부터 나가는구만.”
벨투리안은 무시하고 가려했지만 마르코는 계속 말했다.
“자네도 아마 이 얘기를 노리고 온거겠지만… 조심하게나. 앞으로는 몬스터가 넘친다고 하니까.”
“…새겨듣도록 하지.”
마르코는 나름 모험가의 정인지 무뚝뚝한 벨투리안에게 쓸만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노리고 왔다는 게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가 나온다는 걸 알아서 나쁠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의 산맥에서는 제대로 된 짐승조차 볼 수 없었으니.
벨투리안과 세미는 산장을 떠나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눈보라는 다행히 이미 그쳤지만 그렇다고 설산이란 것이 걷기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세미 때문에 걷는 속도가 느렸다. 벨투리안이 짜증을 숨기지 않자 세미가 말했다.
“평범한 소녀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거 아닌가요, 주인님. 으으, 너무 추워.”
“지금은 차라리 네가 제대로 된 마법사였으면 좋겠군. 마법으로 이 길을 빨리 갈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다.”
“마법이 무슨 만능인지 아시나요. 뭐 제 본체가 있었더라면 이런 눈길 정도야 순식간에 치워버릴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요.”
“정말 위안이 되는 사실이군.”
“제 본체는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아하하.”
휘리오비치의 본체는 아마 지금쯤 두 명의 초월자를 상대하고 있었으니 세미의 생각은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본체가 죽어 간다는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는 세미의 모습에 벨투리안은 위화감을 느꼈다.
“네 본체가 죽어도 너는 아무런 이상도 없나?”
“없~어~요~.”
“너는 본체가 죽는 걸 바라고 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죽으면 죽는 거고 그쪽이 주인님한테도 이득 아닌가요? 그 아가씨라던가, 마법사가 살아날 테니까.”
휘리엘과 제놈 그라시아의 저주의 해주. 분명 그건 벨투리안에게 있어서는 바라는 일이 맞았다. 그러나 자신의 본체가 죽는다고 하는데 저런 태도인 것은 일반적으로 납득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너한테는?”
“저한테는 솔직히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거든요. 이미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본체가 죽든 말든.”
“네 목적은….”
“뭘까요?”
“됐다. 말하지 않을 걸 억지로 캐물어도 의미가 없지.”
“학습능력이 좋으시군요!”
벨투리안이 이 때 세미를 때리지 않은 것은 그저 발걸음을 재촉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다시 조용해졌다. 조용히, 천천히 걸음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산 위에 자리 잡은 눈밭의 마을, 콜테르였다. 콜테르는 왕국에 속하기는 하나, 험준한 산 위에 위치해 사실상 관리가 불가능해 거의 독립적인 구역으로 여겨지는 마을이었다.
“새 용병들인가?”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곧바로 안에 있던 마을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새 용병? 그 말은 마치 이 마을에 이미 다른 용병들이 있다는 것으로 들렸다. 당연하지만 이런 산 위에 있는 마을, 그것도 갑작스런 기상 이변이 있는 마을에 갑자기 많은 사람이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마을은 꽤나 소란스럽고 번잡했다.
“뭐야 소식도 모르고 찾아온 사람인가?”
“무슨 소식 얘기지?”
“실은 얼마 전부터 갑자기 이상하게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 부터 몬스터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와서 말이야. 급히 산 밑으로 사람을 보내 용병들을 모집했네.”
“이 마을에 다수의 용병을 부를 돈이 있었나?”
“아, 돈은 없어. 다만 몬스터 중에 굉장히 비싼 보석을 두른 녀석이 나와서 말이야. 용병들도 엄청 몰려오고 마을도 반쯤 축제 분위기야.”
마르코가 얘기했던 건 이런 소식이었나. 벨투리안은 돈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 것은 아니었고 여행 자금도 아직은 충분했지만 굳이 돈이 되는 일을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우연히라도 몬스터와 마주친다면 잡아두도록 할까.
“아무튼 용병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험가는 환영일세. 다만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는 알아야 들어갈 수 있겠는 걸.”
“용.”
“응?”
“용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 옛 이야기에 밝은 자를 찾아 줄 수 있는가?”
~
용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남자는 파안대소하며 그런 옛 이야기를 믿냐며 웃었지만 마을에 들어오는 것은 허가해주었다. 그리고 아만이라고 하는 이름의 노파도 소개해주었다. 듣기로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이며 옛 이야기에 정통하다고 했다. 다만 약간의 치매기가 있다는 이야기 또한 해주었다.
벨투리안은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세미를 데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이 축제 분위기라는 건 사실인 듯, 마을 한 가운데에서는 커다란 불을 지피고 몬스터의 시체를 해체하고 있었다. 거대한 몬스터 멧돼지를 분해하여 마을 사람들이 요리하고 있었고 용병들이 그걸 즐기고 있었다.
벨투리안은 일단 숙소부터 잡으려고 했지만 배도 고팠고 세미의 칭얼거림 때문에 한 자리를 잡아 앉았다.
“여기, 이쪽도 음식을 좀 줄 수 있나?”
“네, 갑니다!”
벨투리안은 곧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목을 끌게 되었다. 세미 때문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긴 하나 그 작은 체구가 어디 숨겨지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린애?”
“에이, 설마. 이런 곳에 어린애를 데려올라고. 소인족이겠지.”
“아까 목소리를 들었는데 확실히 애 목소리였어.”
벨투리안과 세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들을 먹어치웠다. 하루 종일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이 궁시렁 대는 걸 신경 쓸 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중이었다.
“미안하군. 자리가 없어서 그런데 합석해도 되겠나?”
말을 걸어온 사람은 절도 있는 태도의 군인 같은 중년 남성이었다. 하늘색 머리를 짧게 쳐낸 머리와 뺨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갈색 피부의 얼굴은 평범한 용병이라고 보기에는 힘들 정도로 강단 있고, 흉터가 흠이라고 하기에는 힘들 정도로 수려한 모습이었다.
“…맘대로.”
“고맙네.”
남자는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과묵해 보였지만 세미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듯, 곧바로 말을 걸어왔다. 아니, 어쩌면 자리가 없다는 것은 핑계이고 세미에 대한 호기심을 풀려고 온 걸지도 몰랐다.
“이 아이는….”
“내 하녀요.”
“네, 주인님이에요~”
“…이런 곳까지 하녀를 데리고 다녀야 하는 건가?”
남자는 이런 어린 아이를 이런 곳까지 데려 왔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는 듯 했다. 벨투리안 입장에서는 억울한 이야기였지만 모습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신경쓰지 마시오. 합석까지가 내 호의의 마지막이었으니.”
“맞아요~ 마지막이었다구요~”
“…그러도록 하지.”
남자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세미의 얘기를 듣고는 결국 접어버렸다. 아무리 여기서 화를 내고 문제를 제기하려고 해도 정작 당사자인 세미가 저렇게 화사하게 자신을 놀려먹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에서 나온 음식을 떠먹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휴우, 맛있어라~”
그 와중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은 세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