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쓰디 쓴 그 이름 위에 군림하여
폭풍처럼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보라는 거세게 산 전체를 몰아쳤고 살아있는 생물이란 것은 아무도 움직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산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 둘은 아주 어리고 작은 소녀들이었다. 소녀들은 온 몸을 꽁꽁 싸맨 채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눈 앞에 보이는 산장을 발견하자 선두에 선 소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뒤에 있는 소녀를 보고는 산장을 가리켰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소리를 전했다.
‘도착이다.’
짧은 시간 후에 두 소녀는 산장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선두에 선 소녀는 부싯돌을 꺼내 안쪽에 낡은 화로에 있는 썩은 장작들에 불을 피웠다. 소녀가 꽁꽁 싸맨 옷을 풀어헤치자 아름다운 황금색 머리카락과 붉은 두 눈이 드러났다.
소녀의 이름은 쯔르레이. 저주를 풀기 위해 돌아다니는 여행자였다.
“푸하! 어, 얼어 죽는 줄 알았네. 이봐, 너 말했지만 이 몸은 완전 펴, 평범한 소녀의 몸이라고. 이런 추위 속에서 내, 내가 에취! 얼어 죽는 걸 보고 싶은 거냐?”
그리고 뒤에서 따라오던 갈색 머리 소녀의 이름은 세미, 아니 세르미나카 휘리오비치. 휘리오비치의 두 번째 몸이었다.
“따라온다고 한 건 너다. 네가 얼어죽든 말든 내 알바 아니야. 그리고 엄살 부리지마. 어차피 금방 낫는 몸 아닌가.”
쯔르레이가 세미와 동행하게 되고 나서 처음 확인한 것이었다. 세미의 몸은 정말로 평범한 소녀의 몸이었다. 흑마법도 부릴 수 없는 데다가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말 평범한 인간이란 것은 아니었다.
“후우… 세미는 너무 힘들어요…. 이렇게나 힘든 아가씨를 모실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흑흑.”
“어린 척 하지마.”
“지도 똑같이 어리게 생겼으면서.”
세미의 대꾸에 쯔르레이가 한숨을 쉬며 머리에 손을 얹었다.
세르미나카 휘리오비치는 호문클루스였다.
흑마법사 휘리오비치는 일찍이 죽음을 초월하기 위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흑마법이 할 수 있는 한계선에서 스스로가 살기 위해 끝없는 고민을 한 것이다.
방법은 사실 적지 않았다. 흑마법이란 본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떠도는 것.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언데드가 되는 방법도 있었다. 스스로의 심장을 꺼내어 리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부족했다! 결국 한계가 오는 것이다. 심장을 꺼내 담은 라이프 배슬이 부서진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래서 휘리오비치는 생존의 근원으로 돌아왔다. 모든 생물이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종의 보존을 위해서. 종의 보존이란? 결국 스스로의 일부를 남기는 것이다. 즉, 종의 보존은 궁극적으로 영생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휘리오비치는 자식을 낳았다. 자신의 몸으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를.
휘리오비치가 더미라고 부르는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죽을 때를 대비해서 이미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둔 것이다. 과연 인격이 복사된 호문클루스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냐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휘리오비치는 일단 만들어냈다, 그러한 것을.
자신과 같이 두 가지 말투로 말하는 소녀를 만들어낸 것이다. 광대와 노신사처럼 말하는 휘리오비치, 그리고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는 세르미나카.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판단할 수 없었다. 과연 이 소녀가 정말 휘리오비치인지 아닌지를.
그러나,
“내가 언제라도 널 죽일 수 있단 걸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든 아니든 그건 쯔르레이가 세미를 죽이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네에네에, 그러세요~ 하지만 저는 아가씨가 세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셔도 속으로는… 꺅!”
세미가 이렇게 헛소리를 할 때마다 쯔르레이는 응징을 아끼지 않았다. 머리를 얻어맞은 세미는 머리를 감싸고 신음했고 쯔르레이는 짜증에 가득 찬 얼굴로 그걸 바라보았다. 매번 응징을 해도 나아지는 게 없으니 스트레스만 쌓여갔다. 호문클루스이기 때문에 상처도 금방 금방 나았다.
벨투리안이 왕궁을 벗어난 그날, 세미는 말했다.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세미는 약속을 지켰다.
휘리오비치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통로를 안내해 준 것이었다. 수도 한복판에 그러한 것을 만들어놓고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덕분에 벨투리안은 수도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왕국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일 것이다. 세미의 말에 따르면 휘리오비치는 온갖 곳에 이런 장소를 만들어두었다고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비단 왕국만의 문제도 아니었고.
물론 처음 벨투리안은 세미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고 세미를 아무리 족쳐도 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세미의 방법을 선택하고 말았다.
“식량이 다 떨어졌다. 마을에 들르기 전까지는 굶어야 해.”
“네에?! 아아, 안돼요! 아아 세미 배고픈데!”
“닥쳐, 너 아니었으면 식량이 떨어질 일도 없었어.”
“먹을 건 쥐꼬리만큼 주고 좀만 더 달라니까 사정없이 줘팼으면서 그러기냐?”
쯔르레이는 세미의 말을 무시하고는 마지막 남은 육포를 입에 털어넣었다. 세미는 그걸 보고 분개해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욕했지만 쯔르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설산이라고 해도 먹을 건 얼마든지 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산은 달랐다. 전혀 생명체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런 산은 설산이 아니었다.
이 산은 분명 얼마전까지만 해도 눈이라고는 내리지 않는 산이었으니까. 바위 산맥인 골트룬의 일부였기에 확신했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런 기상 이변에 동물들이 다 사라진 것이다.
버려진 산맥 골트룬 까지 오게 된 이유는 물론 빙룡 네메시스를 찾기 위해서였다. 과연 빙룡이 쯔르레이의 저주를 풀어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저주를 풀기 위해 갔다가 목숨을 잃는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수해의 마녀를 먼저 찾아간다는 선택도 있었다. 쯔르레이가 빙룡을 먼저 찾으러 온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만약 빙룡을 만나러 갔다가 죽게 된다면, 그것도 나쁠 것 없었다. 쯔르레이는 점점 생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산맥에 도착하자 쯔르레이는 듣던 정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골트룬 산맥을 보게 되었다. 극히 일부 지역에만 눈이 오던 산맥이 온통 눈에 덮인 모습은 보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산맥 아랫 마을의 사람들에게 묻자 그들도 이유를 모르는 기상 이변이라고 했다.
쯔르레이는 이것이 빙룡과 관련된 일이 아닐까 의심했다.
“으으, 세미는 잘래요. 아아 춥고 배고프고 졸려…. 세미는 불쌍한 메이드에요.”
결국 배고픔을 못견디고 침낭에 들어가 화로 옆에서 잠에 청하는 세미를 보고 쯔르레이는 생각에 잠겼다. 아직도 세미와 동행하게 된 것은 쯔르레이에게도 잘한 건지 알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진 않았다. 죽일 수도 있었다. 그건 지금이라고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유예시키고 있는 것은 쯔르레이 자신이었다.
밖은 어두웠지만 아직 자정이 오긴 멀었다. 쯔르레이는 세미와 같이 왕국에서 나온 날을 떠올렸다.
그 날 세미가 가르쳐 준 통로로 수도에서 도망쳐 나온 후의 일이었다.
“말해라, 울푸레의 찌꺼기란 건 무슨 뜻이지?”
“후후, 아쉽게도 나는 밑천을 쉽게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서 말이지.”
“한 대.”
벨투리안은 사정없이 세르미나카를 걷어찼다. 자신을 도와줬다고 그 손속에 자비가 생기지는 않았다. 묶여 있던 세르미나카는 그대로 얻어맞고 신음 소리를 흘렸다.
“두 대.”
폭력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벨투리안의 건장한 육체로 공격하는 것은 쯔르레이의 어린 몸으로 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세르미나카는 이미 팔 한쪽이 완전히 으스러졌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어린 소녀의 모습인 세르미나카를 보고서도 동정심이 들지 않았다.
방금 으스러진 멀쩡했던 팔이 아까 전까지만 해도 부러졌던 팔이었음을 벨투리안은 놓치지 않았다. 적어도 평범한 소녀라는 것은 거짓말이 분명했다.
“곧바로 회복하는 건가?”
“후후, 그래, 고문해봐야 쓸모가 없다고. 통증 정도는 있지만 이 내가 고통 따위에 굴복할 듯 싶은가?”
“실험해보면 알겠지.”
벨투리안은 세르미나카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중간에는 회복 속도가 따라가지 못해서 세르미나카는 숨이 거의 멎기까지 했다. 벨투리안은 숨을 쉬지 않는 세르미나카를 보고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소생하는 세르미나카를 보고는 폭력의 강도를 높혔다.
그러나 세르미나카는 정말로 입을 열지 않았다.
“다 했는가?”
“너는… 어떻게 울푸레를 알고 있는 거지? 말해!”
“이런 지금 당장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지 않은가?”
“뭐…?”
“나는 자네가 틀림없이 제놈 그라시아와 휘리엘 울펜슈타인의 저주에 대해 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르미나카가 아픈 부분을 찔러왔다. 자신의 상황에 급급해 벨투리안이 잠시 잊어버린 이름들이었다.
“….”
“뭐 탓하지 않겠네. 누구나 자신의 일이 보다 더 급하니까 말이야.”
벨투리안은 다시금 세르미나카를 때리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참았다. 결국 폭력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만이 나왔는데 괜히 힘을 더 빼고 싶지 않았다.
“그럼 그것도 포함해서 묻도록 하지. 너를 죽이면 그 저주가 풀리나?”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진 질문이었다. 사실상 반쯤 협박을 겸한 질문이었지만 세르미나카는 코웃음치며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그 저주들은 내 본체와 이어진거니. 본체가 죽으면 자동으로 풀리게 되어있지.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자네가 흑마법을 안다면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겠지, 원한다면 어디 정보 길드라도 가보겠나? 이건 아주 간단한 기초라고.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내가 그런 곳을 찾아갈 수 없으니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고 어떻게 믿지?”
지금 벨투리안에게 태평하게 어딘가의 길드에 들러 정보를 찾는 행위가 가능할 리 없었다. 하물며 흑마법이었다. 그게 상식이라 해도 흑마법은 얼마든지 상식을 뒤집어 엎는 게 가능한 마법이었다. 세르미나카의 말은 믿을 수 없었다.
“거 의심이 많군. 하지만 네가 아예 믿는 걸 거부한다면 다른 내 정보는 물어서 뭣하나? 울푸레에 관해서도 거짓말일지 모르는데!”
세르미나카가 비웃었다. 벨투리안은 결국 세르미나카의 말을 일부 수용하기로 했다.
“그럼 일단 네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해보지. 울푸레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정말이지, 대화의 기본이 안되있군.”
세르미나카는 노골적으로 거래를 제시하고 있었다. 벨투리안도 세르미나카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단 걸 눈치챘다.
“뭘 원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