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8/162)


  • 〈 5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반쯤 비몽사몽인 상태였지만 이걸로 됐겠지. 당황해하면서 ‘그게 무슨 소리에요?!’ 하는 핍셀을 쯔르레이가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다행히도 한번에 기절해주었다. 시간을 끌려서는 안됐으니 기절하지 않았더라면 큰 일이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인사는 끝났다. 이제 돌아가야 된다. 밤이지만 아직 완전히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남들에게 들키지 않게 돌아가야 했다. 평소라면 이미 쯔르레이는 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던 도중이었다.

    “누구?”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던 쯔르레이를 누군가가 발견해냈다. 아니, 상대는 발견한게 아니라 단순히 바람소리를 듣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당황한 쯔르레이는 순간적으로 기척을 숨기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들키고 말았다.


    문제는 그 상대가 왕자라는 것이었다..

    ‘제길, 왜이리 밤산책을 좋아하는 거지.’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들킨 것이 아니었다. 쯔르레이의 복장이었다. 쯔르레이는 아까 짐을 챙기면서 이미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은 이미 계획을 다시 원래 모습이  후에 돌아가려고 잡았지만, 아까까지는 변하기 전에 도망가기로 계획했던 것이 문제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엘핀에게 부탁해서 챙겨뒀던 옷으로 고급스럽지 않은 아이용 여행복이었다. 쯔르레이가 왕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망할.’


    “그 옷은….”


    왕자가 부디 눈치채지 못하기를, 하고 빌었거늘 왕자는 어두운 와중에도 복장을 눈치채버렸다. 왕자는 명백히 당황한 모습이 되어서 쯔르레이를 살폈다. 쯔르레이가 아무런 말도 없자 왕자가 기어코 얘기를 꺼냈다.

    “설마 떠나려는 건가?”

    쯔르레이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째서? 대체 왜, 하필 지금….”


    “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항상 왕자는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왕자의 얼굴은 당황한게 훤히 보이고 있을 정도로 표정 관리가 안되었다. 당황할만도 한가, 대낮도 아니고 이런 밤에 갑자기 어린 아이가 궁을 떠난다고 하니.

    “가지 말아라.”


    “….”


    “어째서 갑자기 그러는 건지… 나는 모르겠구나. 연회에 르베니와 춤을 추기로 약속했다지 않았느냐. 네 오라비인 엘핀 세이피어스 경이 돌아오는 것도 기다려야 하고. 그가 갑자기 사라진 너를 보면 무슨 생각을  것 같은가?”


    왕자가 꺼낸 얘기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였다. 맞는 말이었다. 쯔르레이는 약속을 했고,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결코 지킬 수 없는 저주에 걸렸다.


    “왕자 전하,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호위 기사를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쯔르레이는 쉽게 왕자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극단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왕자는 갑자기 호위 기사를 물러달라는 말에 대답했다.


    “지금 나는 혼자 있다. 호위 기사는 없어.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없다.”

    그 말은 이 자리에서의 대화를 비밀로 지켜주겠다는 왕자 나름의 약속과도 같았다. 왕자의 명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아마도 숨어 있을 것이 분명한 왕자의 호위 기사들은 암묵적인 침묵을 강요 받은 것이다.

    “그러면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

    쯔르레이가 숨을 골랐다.


    “저는 엘핀 세이피어스 경의 여동생이 아닙니다.”

    “뭐라…?”


    “저는 우연히 휘리오비치에게 저주를 받아서 세이피어스 경에게 구원을 받았을 뿐, 귀족도 뭣도 아닙니다. 전하께서 신경써주실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째서 거짓말을….”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는 온전히 바깥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에겐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를 위해서 저는 지금 떠나야 합니다.”


    “내가  막겠다고 하면 어떡할거지?”

    쯔르레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마 이 우스운 상황을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쯔르레이는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전하, 저는 평민입니다. 왕자 전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면?”

    “그러나 왕자 전하.”

    쯔르레이가 숨을 골랐다.

    “저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저 밖에 없습니다.”

    “….”

    “공주 전하께 부디 죄송하다고 전해주시길 부탁합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다시 기척을 숨겼다. 왕자는 쯔르레이가 사라진 곳만을 황망하게 쳐다보고 있었고 쯔르레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곧 왕자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쯔르레이는 사라진 후였다.

    왕자에게 들켰으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혹시나 정말로 왕자가 자신을 막으러 올지도 몰랐다. 방으로 돌아가자 세르미나카가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었다. 혹시나 어떻게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평범한 여자아이의 몸이라는 것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갔다온 일은 잘해결됐나?”

    쯔르레이는 곧바로 세르미나카의 입을 후려쳤다.

    “입을 열면 한대 씩 맞을 줄 알아.”

    “휴우, 터프하,”

    퍽!

    다시금 쯔르레이가 세르미나카의 얼굴을 후려쳤다. 검으로 친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강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고통을 느낄 정도는 되었는지 세르미나카가 신음했다.

    “끄으윽….”


    곧 변화의 시간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변신하기 전에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옷도 갈아입은건데, 세르미나카 때문에 계획을 전부 수정해야했다. 확실히 짜증이 심한 상태였다, 쯔르레이는. 다시 옷을 벗었다. 전라의 몸이 된 쯔르레이를 보고 세르미나카가  한소리했다.

    “호강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애들 몸은  흥미가 안생긴단 말이지. 이 몸도 그렇고.”

    쯔르레이가 세르미나카를 또 후려팼다. 이번에는 발이었다. 몸이 묶인 채로 있던 세르미나카가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세르미나카는 이 정도 폭력에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는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폭력에 너무 심취한 거 아닌가? 별로 효과가 없는데 남발하는 건 좋지 않은 생각이야.”

    “팔 하나가 더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진짜 닥치는 게 좋을 거다.”


    “그래, 그래. 나도 거기까지 바라지는 않아. 조용히 닥쳐주도록 하지.”

    세르미나카는  후론 정말 입을 다물었다. 쯔르레이는 망설임 없이 팔을 한번 더 부러트릴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세르미나카가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은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녀가 정말 팔이 부러지는  무서워서 그러는 지는 알 수 없었다. 쯔르레이의 눈은 분명 부러졌던 그녀의 팔이 멀쩡하게 고정되어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여자애라고? 웃기는 소리.

    쯔르레이는 옷을 감아 대충 세르미나카의 눈을 가렸다. 결코 자신이 변하는 모습 만큼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원래라면 바로 앞에서 이렇게 변하는 것 또한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상사태였으니 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이윽고 쯔르레이의 몸이 달아올랐다.


    고통은 없지만, 강한 열이 차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증발하여 연기가 부스스 올라왔다. 어린 쯔르레이의 작은 몸이 부풀어 거대해졌고, 어깨 아래까지 자랐던 황금색 머리카락이 짧아져 원래의 그 하얗게  회색 머리칼로 변했다. 잔근육 하나 없던 부드러운 팔뚝이 근육질로 가득 찼고 붉은 눈이 다시 군청색 빛을 띄었다.


    쯔르레이는 다시금 벨투리안이 되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원래 몸인지… 벨투리안은 알 수 없었다. 쯔르레이로 변해 있던 시간은 전체 인생에 비해서 극히 짧은 시간이었지만, 짧은 만큼 너무 길었다. 순간 눈물이 흘러나올 정도로 반가웠고, 동시에 어색했다. 갑작스레 변한 시야와 몸이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적응을 기다릴 시간은 없었다.

    벨투리안은 자신의 짐에 들어있던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왕자에게 들켰으니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했다. 짐을 챙기고 묶어둔 세르미나카를 등에 엎어맸다. 혹시라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은 막아둔 상태였다.

    적응이 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다시 기척을 숨겼다. 과연 무사히 빠져나갈  있을까. 짐이 생기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사태였다. 기척을 완벽히 숨길  있을지 의문이었다.


    다행히도 벨투리안은 성벽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문제는 그 후였다.


    “누구냐?!”


    결국 세르미나카와 적응되지 않은 몸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경비병이 외치는 소리를 들은 벨투리안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몸은 느리지만 천천히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막다른 곳에 도착한 벨투리안은 경비병들에게 포위되었다.

    “네놈은 포위되었다. 당장 인질을 내려놓고 항복해라!”


    “목적을 밝혀라, 침입자!”

    인질? 그렇구나. 경비병들은 벨투리안의 등 위에 매인 어린 하녀를 인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벨투리안은 인질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어린 하녀의 목숨 따위보다는 침입자를 잡는 것을 우선시할  분명했다. 세르미나카는 여전히 짐이었다.


    벨투리안은 결국 솜뭉치를 꺼냈다. 그리고 휘둘렀다. 검술 같은 것은 없었다. 휘두른 궤적은 생하울라와 오크들을 상대할 때처럼 무자비한 공격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경비병이 아니었다.

    쿵! 하고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성벽의 일부가 부서졌다. 평생을  자리에서 우뚝하고 서있었을 것이 분명한 왕궁의 성벽이 흙더미처럼 뭉개졌다. 성벽이 곧 엄청난 먼지와 함께 민낯을 드러냈다. 먼지 틈에 벨투리안은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제길! 빨리 놈을 뒤쫓아라!”

    “기사님들이 오셨습니다!”

    “얼른 말을! 가져와라!”

    타이밍 좋게 경비병들이 올린 보고를 받은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몇 경비병들은 구멍난 성벽을 지키고 동시에 기사들이 말을 타고 사라진 벨투리안을 쫓아나섰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상대는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벨투리안은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벨투리안은 먼지를 틈에 타서 기척을 지우고 숨어있었다. 벨투리안이 뚫어버린 구멍에 경비병과 기사들이 시선이 끌린 참에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간 것이다.


    벨투리안은 자신이 일으킨 소동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곳을 찾았다. 그리고 벨투리안은 똑같이 검을 휘둘러 구멍을 만들었다. 한 번 해본 것이니  번은 쉬웠다. 벨투리안은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구멍으로 밖을 나갔다.


    벨투리안이 왕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이미 밤이었기에 수도 전체가 성벽의 문을 닫아뒀을 것이다. 저번처럼 개구멍을 찾는 요행을 바라지 못할 것이다. 내일 아침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도망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그 때 쯤이면 수도 전역에 침입자를 찾기 위한 병사들이 깔릴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성벽을 솜뭉치로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왕궁의 성벽과는 비교도 안되게 두꺼울 것이 분명했다. 뭔가 다른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여기부터는 쯔르레이는 생각해둔 게 없었다. 원래는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탈출할 생각이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세르미나카가 갑자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읍읍읍!”


    “입 닥치지 않으면 팔이 부러진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세르미나카는 입을 다물지 않고 계속 칭얼거렸다.   후려 팰까 고민했지만 벨투리안은 생각을 좀 하다가 결국 입마개를 풀어주었다. 입마개가 풀리자마자 세르미나카는 방정맞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푸하! 이제 살겠네.”


    “네가 말하려는  그게 전부였다면 이번에는 두 다리가 부러질 거다.”

    “하하, 너무 겁박 하지 말아요. 아저씨. 세미는 무서워요~ 아야야, 그만해, 그만. 알았어, 알았다고. 너, 지금 수도를 나갈 길을 찾고 있지?”

    벨투리안은 곧 세르미나카의 목소리에 대답을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은 망설인다고 숨길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상황은 명확했고 벨투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고개를 끄덕이는 벨투리안에게 세르미나카가 악마처럼 속살거렸다.


    “내가 도와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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