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7/162)


  • 〈 5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아무튼 간에 르로망샤… 녀석이 정보를 가져왔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이 꽤나 자신하고 있으니 믿을만한 것 같다. 나는 지금부로 르로망샤와 같이 녀석을 추격하러 갈 거야.”


    “지금 바로?”

    “그러니까 이런 아침에 일찍 찾아왔지. 시간이 급해.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가도 확실히 잡는다는 보장은 없고.”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거지?”

    “아마 연회 전에는 돌아올 수 있을거다. 너는 여기서 얌전히 공주랑 놀고 있으면 돼.”


    “…조심해서 다녀와라. 제놈 그라시아도 당했어.”

    엘핀은 쯔르레이의 당부를 듣자 코웃음 쳤다. 아마도  나름의 안심시키기 위한 행동이겠지.


    “내가 못미덥냐?”

    “응.”

    “하, 이 자식 많이 컸네.”

    엘핀이 흘겨 웃으며 말했다. 그 역시 이게 쯔르레이 나름의 안부 인사라는  모르지 않았다. 엘핀이 쯔르레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아, 하지마!”


    “걱정 말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가 다 구해주고 올 테니까.”

    “…그래.”

    둘의 인사가 끝났다. 엘핀은 곧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쯔르레이도 가볍게 옷을 차려 입고 엘핀을 따라갔다. 엘핀을 따라가자 왕궁의 뒷문이 나왔고  곳에는 라로슈가 기다리고 있었다.

    “꼬맹이는 왜 달고 왔지.”

    “하, 그냥 인사  온 거니까 신경끄시지. 그것보다 당신  자식의 위치를 알고 있다며?”


    “꼬맹이 입이 생각보다 가볍군.”


    라로슈가 쯔르레이를 거론하자 쯔르레이 역시 조용히 있지는 않았다.

    “숨기라는 소리는 못들었다.”

    “네 여동생 교육을 좀 더 시켜야 할  같은데?”

    “퍽이나.”


    셋이서 티격태격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곧 두 사람이 말에 올라탔다. 쯔르레이는 그 밑에서 엘핀을 올려보았다.

    “조심해서 돌아오란 말은 아까 했으니 하지 않겠다. 그냥… 꼭 이기고 돌아와라.”


    “걱정하지 마라. 늑대의 기사가 네 승리를 보장할거다.”

    “설사 휘리오비치라고 해도 초월자 둘을 상대로 이길 수는 없다. 큰 걱정은 필요 없을 거다. 오히려 도망가는 놈을 잡는 걸 생각해야겠지. 이럇!”

    먼저 라로슈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엘핀 역시 그에 맞춰서 출발했다. 쯔르레이는 마치 출정을 나가는 기사의 여동생처럼 뒤에서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졌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떠나갔고 쯔르레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기서 무력감은 접어둬야겠지. 그걸 갖고 있다 해서 지금 무언가 할 수 있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도 없었다.


    오늘은 르베니와 만나는 날이었다. 지금은, 그것에 집중하자.

    그러나 공주와 만나는 일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르베니가 갑작스런 티파티의 초대 때문에 자리를 비우게  것이다. 쯔르레이는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서야 그걸 통보 받았다. 결국 쯔르레이는 춤 연습 상대로 갈색 머리의 어린 시녀를 상대해야 했다.

    “자, 원 투 쓰리… 원 투 쓰리… 네, 좋았어요. 세이피어스 영애.  굳이 남자 파트로 하시는지는 잘모르겠지만… 폼새는 매우 훌륭해요.”


    “감사합니다.”


    “세미! 영애의 치장을 푸는 걸 도와주어라.”

    “네, 선생님.”

    갈색 머리의 어린 시녀의 이름은 세미였다. 엘핀이 없는 동안 그를 대신해서 온 춤선생이 데려온 아이였는데 순박하고 선한 인상의 아이였다. 세미는 선생의 말을 따라서 쯔르레이의 옷을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쯔르레이는 아이에게서 꽤나 좋은 인상을 받았지만 아이의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은지 춤도 시중도 상당히 어설퍼 보였다. 실수를 연발하는 아이에게 선생이 소리를 지르기도 했을 정도였다.

    쯔르레이는 춤 시간이 끝나고 시간이 남자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 전에 배운 자세들을 복습하기 위해서였다. 연무장에서 남들이 보는 앞에서 솜뭉치를 쓰는  처음이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거대한 검을 들고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기사들에게 상당히 신기하게 보인  했다.

    “어이, 저거 봐. 꼬마새가 대검을 들고 있네.”

    “가검 아닌가? 저런 검은 성인도 들기 힘들 텐데.”

    “글쎄, 혹시 아나. 세이피어스 가문이 엄청난 괴력을 갖고 있어 저런 검을 쓰는 걸지도.”

    “한  물어보는 건 어때? 거기서 계속 둘이 소곤거리지 말고. 지금은 그 엘핀경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 있으면 자네가 가보지 그러게나. 나는 애는 영 상대를 못하겠어서…. 심지어 여자애지 않은가.”

    “검술 배우는 건 남자애보다 터프하던데.”

    “하하, 그건 그랬지. 솔직히 난 중간에 떨어져 나갈 줄 알았어.”


    기사들의 수다는 계속 되었다. 쯔르레이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대화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결국 쯔르레이에게 말을 걸러오는 기사는 없었다. 다들 어린 여자애와 말을 하기에는 서툰 편이었을 테니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훈려이 끝나자 쯔르레이는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평범한 하루였다. 엘핀과 라로슈가 휘리오비치를 잡기 위해 길을 떠난 걸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럴 것 같았다.


    방에 도착하기 직전 쯔르레이가 가슴을 부여잡고 내리앉았다.

    “끄윽….”

    갑작스레 쯔르레이는 심장에 강한 통증을 느꼈다. 곧 통증은 사라졌다. 그러나 쯔르레이에게 강렬한 예감이 찾아왔다. 그것은 예감이라기 보단 본능에 가까웠다.

    마개가 뚫렸다.

    오늘 밤이다. 오늘 밤 쯔르레이는 돌아간다. 그립기 그지 없던 자신의 몸으로, 벨투리안으로.

    ‘어떡하지? 어떡하지?’

    허나 지금은 안된다.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된 일이 없었다. 휘리엘은 아직도 저주에 걸려 있었다. 제놈 그라시아는 얼마 후면 죽을 지도 모른다. 연회의 약속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쯔르레이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재빠르게 방으로 돌아갔다. 이야기는  그렇듯이 아무런 배려 없이 진행되었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미리 챙겨두었던 옷가지들과 짐을 챙겼다. 빨리 나가야 한다. 변하기 전에.


    그런 쯔르레이의 방에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다.

    “누구냐!”

    긴장한 쯔르레이는 평소 이상으로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들어온 것은 작고 어린 시녀 세미였다. 세미를 알아본 쯔르레이는 곧 이어 말했다.

    “무슨 일이지?  지금 바쁘다. 돌아가도록 해.”

    그러나 세미는  순박하고 선한 표정을 지우고는 웃으면서 문을 잠갔다.


    “뭐하는 짓이지?”

    “그렇군. 이 모습으로는 처음인가. 그렇지 않은가? 자네.”


    세미의 말투는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그건 마치 노쇠한 중년 남성의 느낌을 내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쯔르레이는 솜뭉치를 세미에게 겨눴다.

    “너… 누구지?”


    “하하하, 그런가 나를 모르는건가.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럼 다시 한번 소개하도록 하지. 나는 세르미나카 휘리오비치. 밤하늘의 달을 가리기 위해 태어난 자이며 태양빛으로 눈을 가리는 자일세. 만나서 반갑네.”

     말과 동시에 쯔르레이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즉시 솜뭉치를 세미, 아니 휘리오비치라고 자신을 밝힌 소녀의 목에 갖다 대었다. 소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살기나 혹은 다른 불길한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휘리오비치라고?”

    “그래! 이 또한  몸의 몸일세. 하하,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 몸은 말 그대로 여린 소녀의 것! 아주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몸뚱이라네.”

    그렇게 말하는 세미, 세르미나카의 얼굴은 아까까지 선하고 순박하다고 생각했던게 신기할만큼 기묘했다. 좀 더 아름다웠고 색기까지 흘러나오고 있어 웃고 있는  표정은 요염하기 까지 했다.

    세르미나카는 현재 자신이 보잘 것 없는 몸이라고 했지만 그는 흑마법사였다. 무슨 수로 이런 몸으로 변해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르로망샤가 가져온 정보는 함정이었나? 어떻게 그 모습으로 변한거지?”


    “설마, 하하.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에는 실제로 휘리오비치 세르미나카,  몸이 존재하고 있다네. 물론  정보를 가르쳐준 것은 내가 맞지만 말이야.”

    “네가… 둘이란 건가?”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 걱정 말게나. 내 모든 힘은 실제로 휘리오비치가 보유한게 맞으니까.  몸은 정말로 평범한 소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네 말이 맞다면 너는  내 앞에 나타난거지?”

    “후후, 점점 더 탐스럽게 익고 있지 않은가? 내가 왜 그랬을까요? 저는 어리고 연약하고 착한 시녀 세미일 뿐이에요! 아아, 영애 왜 그러시나요? 저를 왜 겁박하고 죽이려드는건가요?”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연극처럼 조롱하는 세르미나카의 모습에 쯔르레이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세르미나카가 정색하며 말했다.


    “물론 태양을 먹어치우기 위해서지.  그런가? 울푸레의 찌꺼기여.”

    “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를 도와주겠다고. 내가 아니라 제놈 그라시아를 선택한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어. 하하.”

    분노한 쯔르레이가 세르미나카의 목에 더욱 솜뭉치를 갖다대며 외쳤다. 알아야 했다. 어째서 왜 이 자가 울푸레의 이름을 꺼낸 건지.

    “어서 말해!”

    “충고 하나 하도록 할까? 사람을 겁박하려면 그렇게 해서는 의미가 없네. 적어도 팔 한쪽이라도 자르는 성의를 보이고 얘기해야지.”

    세르미나카의 생각과는 달리 쯔르레이는 충실하게 충고에 따랐다. 쯔르레이가 곧바로 세르미나카의 팔을 후려치고 빠르게 세르미나카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으으읍, 으으윽!”

    평범한 여자아이라고  것이 거짓말은 아닌 듯 세르미나카는 고통에 몸부침 치면서 신음했다. 그나마도 쯔르레이가 억지로 입을 막아  소리는 새어나오지 못했다.

    “내가 못할거라고 생각하지마.”

    “흐윽… 하아… 훌륭해… 끄윽…. 그렇게… 나와야지… 끄으윽…. 흐흐흐.”

    “말해라, 울푸레를 어떻게 알았는지!”

    “충고에… 따른 끄윽… 상을 주지…. 울푸레 그의 또다른 이름은 태양을 먹는 용이다…. 흐흐 이러고 계속 있어도 되나…? 왜 세미를 괴롭히는 거에요, 아가씨.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세미는 안되요. 세미가 잘못했어요.”


    “입 닥쳐.”

    이번에도 쯔르레이는 가만 있지 않았다. 그대로 세르미나카의 얼굴을 후려패자 다시 세르미나카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꺄악!”


    “네가 이상한 헛소리를 할 때마다 팔 한쪽, 다리 한쪽씩 뭉개질거야.”


    “크크윽…. 꽤나 맹랑해, 아주 좋아…. 그렇지만 너에게  시간이 쿨럭!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세르미나카의 지적에 흥분한 쯔르레이가 곧 이성을 되찾았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쯔르레이는 정말 변화의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중요한 정보를 찾을 상황이었는데 놓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니.

    “젠장….”

    쯔르레이는 결국 세르미나카를 내버려두고 도망가려고 했다. 그런 쯔르레이를 붙잡은 건 세르미나카였다.


    “자네가  두고 가도 될까?”

    “…무슨 소리지? 더 맞고 싶나? 그런 취향이었나?”

    붙잡는 세르미나카를 쯔르레이가 조롱했다. 하지만 세르미나카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어갔다.


    “과연 내가 정말 평범한 여자아이라는 걸 믿는 건가? 휘리오비치를 이 왕궁에 놓고 가도 되냐고 묻는 거지. 르로망샤도 세이피어스도 없다. 지금은 저주를 받은 제놈 그라시아 밖에 왕궁에 없다…. 하하, 흑마법사에게 최고의 환경이군. 정말로 나를 믿는 건가?”


    쯔르레이는 알았다.  자는 지금 자신을 죽이라고 하고 있는 거다. 흑마법사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참과 거짓 두가지를 모두 얘기한다면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을 따라야할지  수 없었다.


    이대로 왕궁에 휘리오비치를 놓고 갔다가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그런 미래를 자신은 감당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여기서 휘리오비치를 죽이면 자신은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고 도망치는 모양이 될 것이다. 엘핀과 휘리엘은 엄청난 욕을 먹겠지.

    쯔르레이는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죽일지 살릴지, 도망자가 될 것인가, 배신자가  것인가.

    그런 쯔르레이가 선택한 방법은 이것이었다.

    쯔르레이가 세르미나카의 부러진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다.


    “무슨… 짓이지?”


    “넌 나랑 같이 간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라.”

    쯔르레이는 준비해두었던 물건 중에 있던 밧줄로 세르미나카를 묶었다. 세르미나카를 데려가야 했다. 그러나 이 몸으로 그를 강제로 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변신이 먼저다. 쯔르레이는 가장 어려운 선택을 했다. 모습이 변한 채로 도망을 가는 것이다. 평소라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왕궁의 초월자들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가능했다.

    쯔르레이는 세르미나카를 묶어서 방에 가둔 채로 나왔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핍셀의 방이었다. 이전에 한번 초대를 받은 적이 있어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고 있는 핍셀을 억지로 깨웠다.

    “으음냐… 누구세요…? 흐엣! 쯔르레이양? 무슨 일이세요, 이 밤에?!”


    “핍셀, 난 떠나요, 지금. 엘핀에게 전해주세요. 왕궁에 휘리오비치가 숨어있었다고. 혹시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공주님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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