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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6/162)



〈 56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볼타르 왕국에는 두 명의 초월자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이미 만나서 알고 있는 남자, 대마법사 제놈 그라시아. 그리고 분명히 말했었지. 나머지 하나의 초월자의 이름.


라로슈  르로망샤라고.

“당신은 초월자인가?”

“그런가, 그런 이름으로 우리를 불렀던가.”

“왜 나를 공격한거지?”

쯔르레이가 물었다. 초월자와 맞붙어서 승산은 없다. 상대는 이미 적의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자신을 공격해온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로슈는 되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너를?”

“그래.”


“우스운 이야기군. 그런 건 공격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저?”


“단순한 호기심 해소였지. 내가 너를 정말 공격하려고 했다면 지금쯤 너는  땅 위를 걷지 못했을 거다.”

“….”


쯔르레이에게는 억울한 이야기였지만 실로 그러했다. 초월자가 정말로 쯔르레이의 목숨을 노리고 공격했더라면 이미 쯔르레이는 살아있지 않았을 거다. 라로슈의 태도는 정말로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여 쯔르레이에게 반박할 의지마저 앗아가버렸다.

“용건이 끝났다면 나는 가겠다.”

빈정이 상한 쯔르레이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라로슈에게 따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풀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공격해온 남자와 계속 같은 공간에 있을만큼 쯔르레이는 마음이 넓지 못했다.

그런 쯔르레이를 라로슈가 붙잡았다.


“잠깐, 네가 엘핀 세이피어스의 여동생인가?”

“…맞다. 무슨 용건이지?”

라로슈는 고개를 살짝 흔들더니 곧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쯔르레이를 흘겼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라로슈의 말에 쯔르레이가 긴장했다. 거짓말? 그의 여동생으로 위장한  들킨건가? 하지만 어떻게?


“거짓말? 무슨 소리지?”


쯔르레이는 당황하지 않고 시치미를 땠다. 하지만 라로슈는 이미 쯔르레이의 긴장을 읽은  지적했다.

“땀을 흘리는 군.”

“….”

“아르피온 세이피어스는 내 친구다. 내가 그의 모든 걸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 녀석의 자식이 누구인지는 구분할  있지. 너는 녀석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난다.”

쯔르레이가 그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런가, 증거는 없다. 그저 저 사람의 감일 뿐. 그렇다면 쯔르레이가 우긴다면 이 거짓말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라로슈의 말에 쯔르레이는 거짓말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계속 우기려고 한다면, 나로서는 아르피온을 불러올 생각인데. 모르겠지만 그는 지금 상당히 가까운 곳에 체류하고 있거든. 아버지를 볼 준비는 되었나?”


“…거짓말은 내가  게 아니다.”

“이제야 실토하는 군. 그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엘핀이 바보도 아니고 그런 것에 속을 리 없으니. 엘핀 그 녀석이 시킨건가?”

쯔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로슈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제 아비 이름은 잘도 팔아먹는 군. 되었다. 그만 돌아가라.”


그러자 의문에 찬 쯔르레이가 되물었다.


“끝?”

“엘핀 녀석이 시킨거라면 나로서는 관여할 생각이 없다. 말 그대로 단순한 호기심이었으니 신경쓰지 말고 잠이나 자러 가도록.”


의외의 결과였다. 쯔르레이로서는 거짓말이 들통나면 혹여나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라로슈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채 쯔르레이를 놔준 것이다. 떨떠름한 쯔르레이가 머릿속에서 궁금해하고 있던 걸 물었다.

“궁금한게 있는데.”


“뭐지?”


“엘핀의 아버지가 주변에 있다면 왜 그는 엘핀을 보러오지 않는 것이오?”


“만나면 자신을 죽이려 들텐데 누가 사지로 기어들어오겠나?”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둘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쯔르레이는 여전히 그의 대답에 납득하지 못한 상태였으나 알아서 넘어가준다는데 굳이 긁어부스럼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라로슈는 돌아가는 쯔르레이의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돌아간 쯔르레이가 방에 들어가는 걸 갈색 머리의 어린 시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잠깐이었지만 라로슈와 부딪혔던 탓인지 피곤해져 금방 잠에 빠졌다. 방 밖에서 쯔르레이를 지켜보던 시녀도 곧 자리를 감추었다.


~


날이 밝았다.


쯔르레이는 아직 잠에 빠져있는 상태였다. 생각 이상으로 어제의 공방이 피로했었던걸까. 평소라면 이미 일어났을 시간이었다. 악몽을 꾸는 듯 뒤척이는 쯔르레이의 방문이 열리고 엘핀이 들어왔다.


“어이! 일어나!”

여전히 자고 있는 쯔르레이를 엘핀이 흔들어 깨웠다. 곧 부스스 눈을 뜬 쯔르레이가 엘핀의 팔을 때리며 말했다.


“멋대로… 방 들어오지 말랬지.”

“뭐 어떠냐,  갈아입는 도중도 아닌데.”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숙녀의 방에 남자가 멋대로 들어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쯔르레이는 그런 얘기를 꺼낼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결국 대충 넘겨버렸다.


“그래서… 아침부터 들어온 이유가… 하암… 뭐야.”


“휘리오비치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 말에 쯔르레이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렸다.


“어디? 어디에 있지, 그 놈은?”


“아직 나도 자세히는 모른다. 르로망샤가 가져온 정보야. 왕의 명령 덕분인지 꽤나 협조적으로 나오더군.”


“르로망샤? 밤에 그를 만났는데.”


“뭐? 네가 그 놈을?”

쯔르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젯  연무장에 잠깐 나갔는데 나를 공격해왔다. 그리고 내가 너의 여동생이 아니란 걸 간파했어.”

쯔르레이의 말에 엘핀이 낭패라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아아, 그 놈이라면 알아챌만하지. 제길. 일이 귀찮아졌는데.”

“하지만 거짓말인 걸 알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정말인가? 그럼 다행이긴 하지만…. 어째서지? 그는 귀찮은 걸 싫어하니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것보단, 네 아버지가 주변에 있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엘핀의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다. 엘핀은 곧바로 쯔르레이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들이밀고 물었다. 당황한 쯔르레이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짜냐? 어딨다고 하지, 그 녀석은?”


“그, 그건 모른다. 만나면 네가 네 아버지를 죽일거라고 얘기했어.”

“젠장.”


열이 오른 엘핀은 쯔르레이의 방 안을 돌며 고민하는  보였다. 짜증이 잔뜩  건지 화가 가득한 얼굴에 쯔르레이도 뭐라 말을 걸 생각을 못했다.


“됐다. 어차피 지금은 위치를 알아내도 찾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야. 나중에 르로망샤를 추궁한다고 해도 녀석이 말해줄 리도 없고.”

“아, 음…. 그래. 괜찮은가?”

“아니, 미안하다. 너한테 짜증  일은 아니었지.”

쯔르레이 역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엘핀에게 직접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한이 그렇게 강했던가? 라로슈의 죽인다는 말을 농담 정도로 생각한 쯔르레이에게 엘핀의 이 기세는 당황스러웠다. 엘핀은 정말로 아버지를 죽일 듯 보였다.

“만약 괜찮다면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저택에 남아있는 동생이 둘 있다고 했지.”

“아, 응, 기억난다.”


“둘  여동생이야. 그런데 막내인 엘트라는 걷지 못한다…. 그렇게 만든 게 그 아버지다.”

전에는 듣지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쯔르레이는 여기서 굳이 더 물을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엘핀은 계속해서 얘기했다.

“처음 왔을 때부터 엘트라는 걷지 못했어. 다리가 망가져 있었지. 아버지가 엘트라가 살던 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갔고 그에 대한 책임을 엘트라가 지게 됐다. 엘트라는 형벌로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고 결국 다시 일어서지 못했어.”

엘핀의 표정에는 분노와 증오, 그리고 연민이 함께하고 있었다. 쯔르레이 역시 얼굴 모를 소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아버지가 직접 그 아이의 다리를 부순 건 아니지만 원인이 아버지인 건 확실해. 나는… 그 아이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한 그 사람을 증오해.”

“아이는… 엘트라라고 하는 네 여동생은 지금 잘지내고 있나?”


“아, 그래. 아이는 잘지내고 있어. 착한 아이야…. 너처럼 속 썩일 일은 없지.”


“하, 너만한 오라버니도 없지.”

너무 긴장된 분위기 때문일까, 결국 엘핀은 마지막 이야기를 농담으로 장식했고 쯔르레이도 가볍게 대꾸해주었다. 엘핀은 의도적으로 얘기를 그만두었고 쯔르레이 역시  묻지 않았다.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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