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5/162)


  • 〈 55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는 엘핀에게 한바탕 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엔 그냥 수긍하고 받아들였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엘핀은 애써 정상인  하고 있었지만 휘리오비치는 여전히 도망 중이고 휘리엘은 쓰러져있다. 제놈은 저주를 당한 채로 돌아와서 당장 목숨이 위중한 상태였다.

    처음 이 옷을 제안했을 때는 엘핀 역시 쯔르레이에게 장난을 치려는 속셈으로 결정한 게 맞았겠지만 지금은 서로 장난이나 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쯔르레이가 옷을 입자 다음 단계는 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춤을 배워야 하나 싶었지만 한곡은 반드시 춰야 한다길래 기본만이라도 어떻게 배워가야 할 상황이었다.


    먼저 엘핀이 시녀 한명을 붙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추고 있는 엘핀의 모습은 내숭을 떠는 평소처럼 절도있고 딱딱했다. 그러나 그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과 친절하게 에스코트를 해주는 모습은 사정을 모르는 시녀가 무심코 얼굴을 붉힐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쯔르레이의 눈에는 영 아니었지만 말이다.


    “자, 보고 따라 할  있겠어? 그리 어려운 춤은 아니다.”


    “…따라하고 자시고 나는 상대역이 없는데. 애초에 나는 연회에서 같이 춤을  사람이 없는데 왜 이런 춤을?”

    엘핀의 물음에 쯔르레이가 느낀 의문이었다. 연회를 잘모르는 쯔르레이는 춤을 춘다고 할 때야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보통 연회에서 추는 춤은 남녀가 짝을 맞춰 추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짝이 없지 않은가. 휘리엘이었다면 그녀의 약혼자와 춤을 췄을 것이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상대가 없었다.


    “상대야 그쪽에서 알아서 준비해줄거지. 보통이라면 왕자가 나서야겠지만, 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도 돌고 하니, 네가 남자역으로 나간다고 하면 공주가 나서주겠지.”


    “소문?”


    “평민 출신이 건방지게 왕자를 유혹한다는 소문, 뭐 그래서 그쪽도 이쪽을 더 좋아할거야.”


    “이런 모습을 시킨 것은 그걸 생각해서였나?”


    엘핀에게 그런 사려깊은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런 소문이 도는 상황에서 왕자와 춤을 추는 것은 좋은 계획이라고 하기 힘들었다. 엘핀이 새삼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건 그냥 재밌어서.”


    물론 엘핀은 언제나처럼 쯔르레이의 기대를 배신했다. 쯔르레이가 한숨을 팍 쉬고는 엘핀의 자세를 따라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상대역이 없으면 결국 연습은 안되는  같은데.”

    “걱정마라, 아까 사람을 보냈으니까.”

    “누구한테?”


    그러자 엘핀이 씩 미소를 지은 채 쯔르레이를 보며 말했다.


    “누구겠냐?”

    ~

    “안녕하세요, 투르! 내가 필요하다고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 전하.”


    “르베니님… 굳이 와주실 것 까지야 없었는데.”


    르베니는 모처럼 쯔르레이가 자신을 불러줘서 그런지 오자마자 신이 난 채였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보였는지 달려오느라 머리에 단 리본의 한 부분이 삐뚫어져 있었다. 쯔르레이가 그것을 지적하자 르베니는 직접 리본의 폼새를 고치면서 웃었다.

    “나도 참, 칠칠지 못하게, 흐히. 하지만 기분이 좋았어요. 친구가 이렇게 불러주는 건 처음이거든요.”

    “친구….”

    “그래요, 우리 친구잖아요, 투르.

    순간 쯔르레이는 강한 죄책감이 가슴을 찌르는  느꼈다. 자신이  소녀의 친구라고 자칭해도 되는 걸까. 자신이 숨기고 있는 커다란 비밀, 그리고 자신의 본 모습을 생각하면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자신은  소녀, 아니 소녀 뿐만 아니라 엘핀과 휘리엘까지도 기만하고 있는 상태였다. 고개를 숙이자 살짝 자라 어깨 밑까지 내려온 금색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아름다운 황금색이 지금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럽게 느껴졌다.


    “왜 그래요, 투르? 혹시 내가 너무… 앞서갔나요?”


    하지만 쯔르레이가 상념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었다. 겁에 질려서 말을 거는 르베니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엘핀 또한 쯔르레이를 의문스럽게 쳐다 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르베니님. 그냥 갑자기… 현기증이 나서.”

    “현기증이요?! 어머나 그럼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되겠어요.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쉬어야 되요. 의사를 불러드릴까요?”

    “방금까지는 멀쩡했잖아. 괜찮냐?”

    쯔르레이의 어설픈 변명을 다행히 르베니와 엘핀은 믿어주었다. 엘핀의 표정에는 미심쩍음이 있었지만 공주의 앞에서 굳이 그걸 드러낼 생각은 아닌  했다.

    “괜찮아요, 르베니님. 잠시만 쉬면 될거에요.”


    “아뇨, 오늘은 쉬는 게 좋겠어요. 침대에  누워서 쉬세요. 제가 동화책 읽어줄까요?”


    그것  지극히 르베니스러운 생각이었다. 영락없이 자신을 어린 소녀로 생각하는 르베니의 모습에 쯔르레이는 마음이 조금 아파왔다. 그러나 이내 곧 털어버리고 쯔르레이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것도 좋겠네요. 고마워요.”


    “대신 다 나으면 꼭 저랑 같이 춤추는거에요, 투르.”

    “물론이에요.”


    르베니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쯔르레이도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진 않았다. 두 어린 소녀가 새끼손가락 걸고 작고 소박한 약속을 기원했다. 정말로 작고 소박한 약속이었다. 첫 친구를 얻은 소녀가 친구와 같이 춤을 춘다는. 하나의 작은 기원



    그러나 비극이란 것이 항상 그렇듯이 그 작고 소박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

    밤이 찼다. 만월이 떠오르고 별들은 자취를 감춘다. 하늘에는 오직 거대한 달 하나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밤에 쯔르레이는 잠이 오지 않아 밖을 나섰다. 연무장이라도 잠깐 돌고 오려는 생각이었다. 낮에 한 고민이 떠올랐다. 자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 그걸 말한다면 엘핀은, 르베니는 자신을 받아들여 줄  있을까?

    생하울라와는 다르다. 쯔르레이는 생하울라에게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었다. 그러나 엘핀과 르베니는… 계속 이런 모습이었다. 그들을 속이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비밀을 밝힌다면 그것은 기만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애초에 숨겨야 할 일이었다. 연을 맺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저주… 정확히 저주는 아니라지만 모습이 고정된 탓에 연을 맺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그 탓에 이런 우스꽝스러운 꼴을 하고 팔자에도 없는 귀족 흉내를 내었다. 그리고 친구…라는 것을 사귀었다.


    친구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다. 자신의 친구가 누구였던가. 이상하리만치 헌신적이던 짓궂은 생하울라? 자신을 배신하고 떠나간 아레히? 르베니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잡념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쯔르레이는 무작정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엘핀에게서 배운 검술은 아니었다. 생하울라에게 배울 때처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술이었다. 몸을 움직이자 점차 땀이 차오르고 잡생각이 줄어들었다.

    그 때였다.

    압도적인 속도로 거대한 창이 쯔르레이에게로 쇄도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쯔르레이의 몸을 향하진 않았다. 쯔르레이를 빗겨나간 창은 곧 허공에 꽂혔다. 아니, 단순히 창을 든 자가 멈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 쯔르레이의 눈에 창은 마치 허공을 빗겨가르고 찢어낸거처럼 보였다.

    곧 창을 든 자는 다시 쯔르레이에게로 달려들어왔다. 속도는 아까처럼 압도적이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갑작스러운 습격에 그대로 대응했다. 상대는 분명 자신보다 강한 자였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지금 왕자와 싸울 때처럼 솜뭉치를 쓰지 못할 상황이 아니었다.

    창은 빠르고 강력했으나 정직하게 들어왔다. 쯔르레이를 공격하고 있음이 분명함에도 공격할 의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솜뭉치의 무게를 끌어올리며 대응했다. 압도적인 무게와 그에 비례한 속도에 쯔르레이가 반동으로 하늘로 튀어올랐다. 동시에 쯔르레이는 공중에서 그대로 솜뭉치의 무게를 줄여 들고 다시 무게를 늘려 적을 향해 내려찍었다.


    “빈틈이 너무 많다.”


    그러나 상대는 두 발자국 움직인 것만으로 간단하게 쯔르레이의 공격을 피해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남자인  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상대의 정체를 전혀 파악할  없었다.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노인처럼 들리기도 했고 소년처럼 들리기도 했다.


    곧바로 방어 태세를 취하는 쯔르레이였지만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두워서 잘보이지 않았지만 상대는 쯔르레이의 두 배는 될 정도로 키가 컸고 건장한 남자였다. 남자는 이미 자세를  상태였다. 그러나 안심할 수 없었다. 쯔르레이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누구냐.”

    “내 이름을 묻는 건가?”

    “….”


    “이름은 간단하지.”


    하지만 남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황한 쯔르레이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찾았지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곧 찾을 필요는 없어졌다. 남자가 쯔르레이의 뒤에서 나타난 것이다. 쯔르레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자는 곧바로 쯔르레이의 손에서 솜뭉치를 뺏어갔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행태였기에 쯔르레이는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다시 솜뭉치를 뺏어오려는 쯔르레이의 움직임을 남자는 한 손으로 막으면서 말했다.

    “신기한 검이로군. 용의 것인가?”


    용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쯔르레이가 흠칫했다. 하지만 기우였다. 남자는 대충 넘겨짚은 것 뿐인지 검에 대해 별 말 하지 않고 화제를 넘겼다.

    “내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나? 그걸 물어보는 사람은 꽤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야.”

    남자가 솜뭉치를 다시 쯔르레이에게 넘겨주었다. 곧바로 솜뭉치를 받은 쯔르레이는 상대를 경계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그런 쯔르레이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내 이름은 라로슈. 르로망샤의 라로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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