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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4/162)


  • 〈 54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안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원래도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지금은 숫제 절망스러움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초월자의 죽음이란 떡밥이 가져온 파문치고는 오히려 가볍다고  수도 있었다. 그런 이유는 제놈의 말이 충격적인 만큼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짓말하지마. 아무리 상성이 안좋다고 하더라도 그런 저주를 네가 그렇게 쉽게 당할 리가….”


    “거짓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저주에 쉽게 당할리 없단 건 맞는 말이죠. 휘리오비치는 죽은 제 부하들과 자신의 팔을 제물로 썼습니다.”


    “팔?”

    제놈이 자신의 변색된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왼팔에 반대되는 오른팔입니다. 초월자의 팔 한쪽으로  목숨을  수 있다면 싼거라고 생각했나 보죠. 정면으로는 저를 이길 수 없으니까.”

    “아깐… 상성이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냐.”


    “단순 화력 싸움으로 간다면 원소 마법사인 제가 질 리가 없죠. 하지만 휘리오비치가 애초에 그런 화력 싸움을 해줄 리도 없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팔까지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실책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쯔르레이가 이쯤에서  사람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계속 듣고만 있기에는 괴로운 이야기였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흑마법사를 잡으러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러자 제놈이 쯔르레이를 바라보더니 잠시  입을 열었다.


    “당신, 저주가 풀리고 있군요.”

    과연 대마법사는 대마법사라는 건지 핍셀이 마력 검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찾아낸 사실을 제놈은 보는 것 만으로 금방 깨달아버렸다. 쯔르레이가 물었다.

    “바로 알아채는 건가.”


    “휘리오비치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군요. 그가 이렇게 허술할 리가 없는데…. 그는 자기가 손해를 보는 것 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성격입니다. 자기 하수인들을 그렇게 쉽게 버린 것도, 팔을 제물로 쓴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저주까지 이렇게….”


    “그럼 쯔르레이는 이제 괜찮다는 얘기냐?”


    “잠시 나가보십시오, 엘핀.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뭐? 그냥 여기서 바로 하면 안되는 거냐?”

    “상의를 벗어야 합니다. 여동생의 나신을 보고 싶은 거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만.”

    제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쯔르레이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런 거로 부끄럼 떨 만큼 쯔르레이는 여리지 않았다. 애초에 원래 남자였으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한  되려 엘핀이었다.

    “잠깐! 너 무슨 헛소리야. 아무리 애라고 해도 여자애다. 헛소리는 하지말라고.”

    “제대로 기운을 탐색하려면 옷이 방해됩니다. 벗는 게 맞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가 백이 넘는데 이런 어린애한테 욕정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시죠. 저는 다 큰 여자가 좋습니다.”


    “제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이, 넌 뭔 옷을 벗고 있어? 부끄럽지도 않냐?”

    “말마따나 어린애인데 뭐가 부끄럽다고. 잠깐 이거 뒤에 좀 밀어 올려줘. 혼자  벗겠다.”


    결국 엘핀은 쯔르레이가 상의를 벗는 것을 돕고는 반나체를 보고 밖에 나가게 되었다. 끝까지 궁시렁 대면서 나갔지만 제놈도 쯔르레이도 대꾸는 하지 않았다.


    “등을 대고 앉으십시오. 조금 아플겁니다.”


    제놈은 쯔르레이의 등에 손을 대고 말했다. 쯔르레이의 등에 느껴지는  손의 감촉은 오른손은 멀쩡했으나 왼손은 마치 팔이 아닌 얼음덩어리를 댄 것처럼 싸늘하고 불쾌했다. 그리고 이내 강렬한 마력이 쯔르레이의 몸으로 들어오자 쯔르레이가 신음을 삼켰다.


    “흐읏… 으윽! 끄으으윽.”

    “참으십시오.”

    “하아… 하아… 흑… 끅!”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쯔르레이도 고통스러워  만큼 강렬한 통증이 온 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등에서 부터 시작하는 강렬한 마력의 흔적이 등에서 복부를 건너 다리를 향해 간 후 돌아와 다시 가슴으로 올라와 머리를 향했다. 이윽고 몸을 한 바퀴 모두 돌고 돌아온 마력이 쯔르레이의 가슴 속에 그대로 머물렀다가 다시금 제놈의 손으로 돌아갔다.

    “끝났습니다.”


    “허억… 허억…. 하아….”

    “수고했습니다. 힘들었을 텐데 참아줘서 고맙습니다.”

    “겨… 결과는.”

    겨우 몸을 간추린 쯔르레이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놈은 항상 피곤해 보이던 인상을 지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쯔르레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저주가 곧 풀릴 거라는  사실입니다.  이유가 어처구니 없지만요.”

    “이유가 뭐지?”

    “휘리오비치는 애초부터 당신에게 저주를 걸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건 저주가 아니에요.”


    “뭐?”


    “이건 마개입니다. 변화를 금지하는 주술이죠. 상태를 고정시키는… 일종의 치료술입니다. 저주와는 그 맥을 같이 하지만요. 아주 철저하게 숨겨놨군요. 제대로 찾아보지 않는다면 누구나 저주라고 착각할 겁니다. 저주가 아니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풀리는 게 정상입니다.”

    그 말에 쯔르레이는 집히는 것이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당장 지금 자기 자신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면 어째서 몸이 약해진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저주라고 숨겨야  필요가 있었는가?


    “안전장치입니다. 몸이 고정된 상황에서 혹사시키면 안되니 강제로 힘을 빼서 가만히 두게 하는 거죠. 하지만 어째서 이런 술법을 당신에게 걸었는지는 이해할  없군요. 미안합니다. 저로서는 그것까지 이유를 알 수 없겠군요. 당신의 저주와 관련이 있습니까?”

    “….”


    쯔르레이는 입을 닫았다. 그건 결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 모습을 유지해서 대체 휘리오비치에게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쯔르레이의 머리가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때  해서 엘핀이 문을 노크했다.

    “다 끝났냐?”

    쯔르레이와 제놈 모두 엘핀을 순간적으로 깜빡 잊었기에 들여보낼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다 끝났다고 말을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엘핀이 쯔르레이를 보고는 곧바로 소리치며 문을 닫았다.


    “옷 입어!”


    그제서야 쯔르레이는 자신이 아직도 상반신 알몸임을 깨달았다.


    ~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거지? 지금 당장이라도 놈을 찾으러 가야 한다는 얘기에는 나도 동의하는데.”


    “왕에게 알리고 르로망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죠. 제가 죽는다고 해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겠지만 왕국의 힘이 줄어들 걸 생각하면 도와줄겁니다. 문제가 있다면 휘리오비치가 우리와 싸워주느냐죠.”


    “3개월 동안 도망만 다닐 수도 있다는 얘기군.”


    “그로서는 당장 팔 하나가 없는 데다가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적의 전력이 줄어드는데 싸워  이유가 없죠. 아마 힘든 수색이 될 겁니다.”

    실제로 휘리오비치는 제놈 그라시아의 습격에서도 저주만을 건  곧바로 도망쳐 버렸다. 싸운다면 모를까, 오로지 도망에만 전념하는 흑마법사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놈 그라시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죽음이 기정사실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왕궁의 분위기는 바빴다. 왕은 제놈 그라시아의 팔을 직접 보고 노해 르로망샤를 불렀고  휘리오비치의 수색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를 취소하진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리다는  자체가 왕궁의 위험이  것이니 모든 상황을 숨기고 그대로 연회를 열 것이라는 얘기였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제놈 그라시아의 상태를 공표하고 연회를 취소한다면 그야말로 흑마법사 한명 때문에 왕국이 통째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고 그건 국가적으로도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제놈 그라시아의 상태는 숨기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쯔르레이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연회를 취소하지 않는 건 결코 좋지 않았다. 엘핀이 가져온 옷을 보면서 느낀 생각이었다.


    “너 분명… 남자옷이라고 하지 않았나?”


    “바지니까 남자옷이지.”

    엘핀이 가져온 옷은 분명 바지였다. 그러나 바지인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다른 여자용 드레스와는 크게 다를 바 없는 옷이었다. 드레스와 제복을 섞은  한 옷에 바지는 반바지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어떤 남자가 입어?!”


    “간티아 제국에서는 입어. 어린애들만. 이건 휘리엘 어릴  옷이지만.”


    “거짓말쟁이….”

    “난 거짓말한 적 없어. 속은 네가 바보지.”


    결국 꼼짝없이 시녀들에게 둘러 쌓여서 준비된 이국적인 옷을 입은 쯔르레이는, 중성적인 매력이 돋보였지만 결코 남자애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10살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매력이 배어나왔다.


    실제로도 10살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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