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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3/162)


  • 〈 53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앞으로 훈련을 그만둘거라고 생각한 쯔르레이의 생각과는 달리 엘핀은 여지없이 똑같은 시간에 나타나 쯔르레이를 끌고 연무장으로 왔다. 어리둥절하는 쯔르레이와는 달리 엘핀은 평소처럼 훈련 때의 표정으로 말했다.


    “뭐냐, 그 표정은.”

    “….”

    “설마 내가 그깟 분노 때문에 약속을 어길 거라고 생각했냐? 아쉽지만 훈련 그만두고 편히 쉴거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좋을 거다. 늑대는 맹세를 쉽게 어기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 때문에….”

    “너 없었으면 애초에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딴 걸로 화를 낼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실제로 엘핀은 쯔르레이에게 화풀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화를 내긴 했지만 쯔르레이에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사과하려고 하자 그걸 막았던 엘핀을 떠올랐다.


    “훈련은 계속 될거다. 이게 정말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엘핀의 말에 쯔르레이가 전날 밤을 떠올렸다.

    “쓸모… 있었다.”

    “뭐?”


    “왕자와 대련을 했다. 이겼어. 솜뭉치를 쓰지 않고.”

    “대단한데….”

    “놀리지 않나?”


    쯔르레이는 살짝 놀랐다. 물론 휘리엘이 쓰러진 지금 서로를 놀리고 농담 따먹기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핀의 성격 상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칭찬을 하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핀이 이어 말했다.

    “그 왕자는 수재다. 나처럼 천재라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확실한 재능을 갖고 있어. 그런 놈이 수년 간 배워온 검술을 며칠 배우지도 않은 네가 이겼다는 건… 거기다 너는 지금 저주도 걸려있지. 체격도 힘도 왕자가 우위에 있다. 대단한 일이 맞아. 놀릴 구석이 어디 있지?”


    “네 검술을 응용해봤다. 아직 잘모르겠지만.”

    “벌써 그것 만으로도 놀라운 성과인거다. 자세를 다시 잡아주지. 한번 시연해봐. 아니, 아니다. 이쪽으로 따라와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한번 그 검을 써봐. 나랑 붙어보자.”

    그 날의 훈련은 하루종일 대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쯔르레이는 저주에 걸려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엘핀은 어린 아기를 보살피듯 손에 손속을 두고 움직였다.  덕분인지 그날 하루  한번이지만 순간적으로 쯔르레이에게 덜미를 잡혔다. 엘핀이 한참을 봐주면서 움직였단 걸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성과였다.

    “솔직히 놀라워. 네 재능은 납득이 안될 정도로 강렬해. 마치 그 몸에 검의 신의 환생이 깃든 것 처럼 느껴질 정도야. 인간이 아닌 것처럼…. 검을 배운 적이 따로 없다는 게 사실인가?”

    엘핀의 말에 헉헉대던 쯔르레이가 뜨끔했다. 자신의 몸이 현재 인간이 아닌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재능도 그런 영향 때문일까? 쯔르레이는 시치미를 때며 말했다.

    “과찬이야. 검을 배운  네가 처음이 맞다. 생하울라에게서 배운 것은 검술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


    “아니, 사실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10년 안에 초월자의 경지를 뚫을 지도 모르겠어.”

    “내 나이를 생각해보면 신기할 일도 아니군. 후우….”

    쯔르레이가 가볍게 농담했다.

    “아무튼, 그래 오늘은 이 정도로 하지.  이상 몸을 쓰는 단순한 훈련은 의미 없어. 앞으론 계속 대련으로 가도록 하지. 오늘은 맛보기였으니 이 정도로 끝나지만 내일부터는 더 빡세게 갈 거다. 일어나. 핍셀한테 가도록 하지.”

    훈련이 끝났다. 엘핀은 쯔르레이를 데리고 핍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면서 엘핀이 말했다.

    “연회는 취소되지 않을거야. 네가 참가하는 것도 그대로야.”


    “하지만 휘리엘이….”


    “저주로 쓰러졌지. 그래. 그래서 더욱 네가 참가해야 하는 거다. 휘리엘은 지금 저주에 걸린 게 아니라 아파서 쓰러진 거고, 우리가 건재하다고 알리기 위해서는 연회에 나갈 수 밖에 없어. 네가 대신하는거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너보고 휘리엘을 대신하라는 건 아니야.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순히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 휘리엘이 일어날 때까지만.”

    엘핀은 휘리엘이 일어날 거라고 굳게 믿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러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엘핀의 말에 쯔르레이가 생각에 잠겼다. 자신 때문에 휘리엘이 저주에 걸렸다. 자신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마음만 같아서는 휘리오비치를 직접 상대하고 싶었지만 그럴 능력이 안된다는 건 당연했다.

    핍셀이 있는 곳에 도착해 평소처럼 쯔르레이는 치료를 받았다. 쯔르레이를 살피던 핍셀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쯔르레이양도 한번 다시 검사해보지 않겠어요? 저주 때문에 휘리엘 양도 쓰러졌으니 쯔르레이양도 위험할지 몰라요.”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군. 너도 한번 다시 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겠나?”

    두 사람의 설득에 쯔르레이가 핍셀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검사가 끝나자 핍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저주가… 약해졌어요.”

    “뭐?”


    “저주가 약해지고 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면 얼마 안가서 저주가 자연적으로 풀릴 거에요.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그렇다. 쯔르레이가 마치 저주에 걸리지 않은 것처럼 힘을 낼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쯔르레이는 인식하지 못했으나 저주는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고 그에 따라 예전의 힘을 점점 낼  있었던 거였다. 왕자와의 대련도, 엘핀과의 대련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매일 내가 치료를 한다고 마력을 주입해서? 아니면 휘리엘양의 매개체로 저주가 옮겨진 건가? 그도 아니면….”

    “아니면?”

    “아예 인간이 아니라면 이런 저주에 걸리지도 않겠죠. 하지만 그건 아닐테고….”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쯔르레이의 속을 꿰뚫는 이야기가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왔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쯔르레이의 저주가 어째서 약해지고 있는지는 의문일 따름이었다.


    쯔르레이는 곧 큰 문제를 깨달았다. 저주가 풀린다면, 그건 곧 자신이 원래 몸으로 돌아간다는 얘기와 같았다. 언제 저주가 풀릴지는 알지 못했지만 저주는 이제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건드리지 않아도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저주가 풀릴 거에요. 이상하네, 정말….”


    “그럼 나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다.”

    어떻게던 대처를 세워야겠다. 쯔르레이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했다. 어느 순간이라도 떠날 수 있게 대비해둬야 했다. 문제는 왕궁을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나갈  있을까?

    경비병이야 쉽게 기척을 숨겨 도망갈 수 있다. 하지만 엘핀이나 자신은 만나본 적이 없는 그 초월자 르로망샤는 얘기가 달랐다. 초월자라면 충분히 자신의 은신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자신이 무사히 도망갈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간에 해야 했다. 자신의 저주는, 결코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모든 약속을 뒤로 하더라도.

     때,

    “어이! 나와봐!”

    엘핀의 환호에  목소리가 쯔르레이의 방으로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제놈 그라시아가 돌아왔다!”


    그 소식은 둘이 훌쩍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
    돌아온 제놈 그라시아는 왼팔을 붕대로 가리고 있었다. 부상이라도 입었나 물어봤지만 제놈은 대답하지 않고 휘리엘에게로 향했다. 핍셀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한참을 휘리엘을 살펴보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엉망이군요.”

    무엇이 엉망이라는 걸까. 듣고 있는 쯔르레이나 엘핀으로서는  수 없는 얘기에 엘핀이 물었다.

    “…무슨 말이지.”

    “울펜슈타인 영애의 저주가요. 휘리오비치가 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엉망입니다.”


    “그 말은, 저주를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솜씨가 안좋다는 얘기와도 같은 말에 엘핀이 화색을 하며 물었다. 만약 저주를 건 솜씨가 엉망이라 하면 이 이상 좋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놈의 말에 엘핀의 기대는 곧 무너졌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제 말은 방식의 얘기였습니다. 방식이 다소 더럽다고 해서 그 강력함이 사라지진 않습니다. 아니, 저주라면 오히려 엉망이라서 더 안좋습니다. 마법이 엉망이라면 발동이 실패할 뿐이지만 저주가 엉망이라면 효과가 지독하게 바뀔 뿐이니까요. 저주가 꼬여 있어서  힘으로는 최대한 저주를 지연 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무책임한 대답에 엘핀이 폭발해버렸다. 일어서서 제놈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멱살을 잡은 주먹의 핏줄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제놈은 반항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법사인 그가 검사인 엘핀을 육체적인 힘으로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빌어먹을! 네가 그러고도 대마법사냐?!”

    “저는 애초에 원소 마법사이기에 해주와 같은 마법은 전문 분야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쪽은 주술사들이 더 전문이죠.”


    제놈의 해명은 일리가 있었지만 환자의 보호자가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엘핀의 화는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제놈 그라시아는 한 대 맞아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반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엘핀이 멱살을 잡은 손을 놓고 말했다.


    “얼마나 지연 시킬  있지?”


    “3년입니다. 3년 까진 버티게  수 있어요.”


    생각보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엘핀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적어도 곧바로 휘리엘이 목숨을 잃지는 않을 거란 사실이 그를 그나마 안심하게 만든 것이다. 아직 희망은 남아있었다.

    “3년 안에 휘리오비치를 잡아야 하는 건가. 네가 찾으러 간  어떻게 되었지?”

    “저를 뭐로 보는 겁니까? 놈의 거점을 찾아내서 이미 한바탕 하고 왔죠.”

    “뭐?! 어떻게 됐지?!”

    “놓쳤습니다.”

    “야! 이 XXX야!”


    하지만 이것 만큼은 엘핀도 참을 수 없었다. 휘리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을 놓쳤다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엘핀의 입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왔다. 제놈도 욕설을 듣는 것은 기분이 나쁜 건지 얼굴을 잔뜩 구겼다.


    “애초에 제가 그를 잡기에는 상성이 안좋습니다. 하지만 녀석의 수족들은 모조리 쓸어버렸으니 성과가 없진 않습니다.”


    “수족?”

    “휘리오비치의 암살자 조직을 전부 쓸어버렸습니다. 당신들을 잡는다고 꼬리를 드러내서 찾을 수 있었죠. 물론 이걸로 휘리오비치가 눈 하나라도 깜짝했냐 하면 그건 아니겠지만요. 오히려 저주의 희생양으로 써버리더군요.”

    “저주의 희생양?”

    암살자라 하면 이전에 쯔르레이가 있었을  습격한 그들이었다. 비록 미숙할지언정 초월자인 엘핀을 잠깐이나마 묶어놓을 수 있던 실력자들을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는 분명 호재였지만 제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이미 휘리오비치에게 필요가 없어진 이들이었던 것 같다.

    말을 마친 제놈의 피곤한 인상이 갑자기 찌푸러졌다. 붕대로 대충 묶어 가리고 있던 왼팔을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러자 파랗게 변색된 그의 왼팔이 드러났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듯 제놈의 인상이 이 이상 기분 나쁠  없게 찌그러졌다.

    “잠깐 너  팔….”

    “저주입니다.”


    “뭐?!”“저주라고?!”

    엘핀과 쯔르레이 모두 당황하여 소리 질렀다. 제놈은 시끄럽다는 듯 손을 휘휘 젓더니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상성이 나쁘다고.”

    “무슨… 저주지.”


    “3개월이 한계였습니다.”

    “무슨 저주냐고 물었다!”


    “무슨 저주겠습니까?”


    제놈은 평소의 그 피곤한 표정을 지운 채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엘핀을 바라보았다. 엘핀도  조소에는 차마 욕으로 답할  없었다.

    “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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