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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2/162)


  • 〈 52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는 아직 예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높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쯔르레이가 어설프게 양손으로 훈련복 자락을 잡고 르펜바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왕자 전하.”

    “…그래.”

    르펜바하는 다행히도 엉망인 쯔르레이의 예법을 지적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 자신이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검은… 굉장히 크군. 네가 사용하기에는 많이 힘들어보이는데.”


    아무래도 르펜바하의 당황은 쯔르레이가 솜뭉치를 휘두르는 모습에 근거했나 보다. 그럴만도 했다. 왕자는 좋게 말해 많이 힘들어보인다고 했지, 만약 솜뭉치가 평범한 검이었다면 어른들도 쉽게 휘두를 수 없는 검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쯔르레이는 솜뭉치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까 고민했지만 잘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쯔르레이는 솜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검입니다. 무게가 적어서 저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솜뭉치는 날이 무뎌 가검이나 마찬가지였고 쯔르레이가 특별히 손을 대지 않는 한 무게가 없는 칼이었다. 왜 이런 검을 사용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새로이 변명을 생각해내야겠지만, 다행히 왕자는 물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런가. 살짝 놀랐네. 훌륭한 검술이었어. 세이피어스 경에게 검술을 사사받고 있었지.”


    “네, 그렇습니다.”

    “훈련이 굉장히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럴 가치는 있었나 보군.”


    “감사합니다.”


    “음, 그렇군.”


    쯔르레이는 여기서 ‘부끄러운 실력입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유연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직설적으로 감사인사를 건넸고 르펜바하는 평소 듣던 사람들의 태도와는 다른 것을 신선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번 나와 겨뤄보지 않겠나? 부족하지만 나 역시 약간의 검술을 교양으로 익히고 있다네.”


    하지만 르펜바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쯔르레이에게 있어서 곤란한 내용이었다. 쯔르레이는 철저한 실전 위주의 검술을 배웠고 봐준다거나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적을 쓰러트리는 것에는 재주가 없었다. 서리 갈기 부족의 마을에서도 상대하는 오크들을 전부 때려눕혔던 기억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저는… 손대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지 않습니다.”


    쯔르레이라고 할지라도 왕자의 실력을 무시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귀족의 삶을 체험한 시간은 극히 일부였다.  짧은 시간 사이에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돌려 말하는 화법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르펜바하의 뒤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호위기사가 나와 쯔르레이를 윽박질렀다.

    “네 이년! 감히 왕자 전하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하지만… 그대로 대련을 진행하게 되면 왕자전하를 상처입힐 수도 있습니다.”

    이 말에서는 호위기사도 순간적으로 침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뛰어난 실력의 호위기사였고 보는 눈 또한 없지 않았다. 방금 본 어린 소녀의 검사위는 나이에 비해 굉장히 뛰어났다. 호위기사는 차마 그녀가 왕자보다 더 강한 실력을 갖고 있단 것을 모른 척 할  없었다.


    “그만 됐네. 내가 무리한 부탁을  모양이야. 하지만 네 검은 무게가 적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맞아도 큰 부상은 입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호위기사를 침묵시키자 이번에는 아까 얘기한 솜뭉치에 대한 이야기가 발목을 잡았다. 확실히 무게가 없는 검이라면 맞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솜뭉치를 무게가 아예 없게 유지시키며 싸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반대로 이 경우에는 쯔르레이에게 자신의 검술에 대한 자신이 없어진다. 쯔르레이의 검술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솜뭉치에 특성을 이용한 검술로 무게를 조절한다는 메리트가 사라진다면 어느 정도의 실력일지 가늠할 수 없었다.


    왕자에게 그런 말 까지 했는데 허무하게 진다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일이 분명했다. 왕자는 분명 쯔르레이가 진다고 하더라도 쯔르레이를 조롱하거나 하지 않겠지만, 쯔르레이 혼자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은 막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쯔르레이는 르펜바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왕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쯔르레이는 엘핀에게서 가르침 받은 자세를 떠올렸다. 쯔르레이가 자세를 취하자 왕자 역시 검을 꺼냈다. 호위기사가 구해온 가검이었다.


    “선수를 양보하지.”

    쯔르레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솜뭉치를 양손으로 붙잡고 강하게 치켜든 채로 돌진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최대한 빠르게 대련을 끝내고 싶었다. 왕자의 목을 노리고 돌진했지만 르펜바하는 가볍게 뒤를 돌아 피해버리고 쯔르레이의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쯔르레이는 가볍게 뒤로 발을 굴려 왕자의 공격을 피했고 그대로 다시금 솜뭉치의 긴 리치를 사용해 왕자의 목을 찔러들어갔다. 르펜바하는 찔러 들어오는 쯔르레이의 칼을 쳐올렸다. 솜뭉치의 무게를 없앤  대련에 임하고 있는 쯔르레이는 그걸 막을 힘이 없었기에 그대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쯔르레이가 본심을 발휘한다면 순식간에 끝날 싸움이었다. 그래서 쯔르레이는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솜뭉치가 없는 자신의 힘이란 것이 얼마나 미약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련에서 승리한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엘핀에게 배워온 검술이 가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니  나름의 의미는 있었다.

    이번에는 르펜바하가 쯔르레이에게 돌진했다. 순간 쯔르레이는 엘핀과 생하울라 모두가 가르쳐줬던 비기가 떠올랐다. 문제라면 그것이 차마 왕자에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기에 고이 접어두었다. 아무래도 왕자에게 흙을 뿌릴 수는 없었다.


    잡념을 치우자 르펜바하의 돌진은 쉽게 피해낼  있었다. 생하울라는 커녕 다른 오크들이 들어오는 것보다 조잡해보였다. 하지만 힘이 부족해 왕자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르펜바하는 꽤나 놀라고 있었다. 검사위를 보고 분명 나이에 비해 뛰어난 검술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자신을 이렇게나 쉽게 상대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호위기사의 잠깐의 침묵은 이런 의미였나. 만약에 저 아이가 조금만 더 힘이 셌더라면 자신이 졌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힘의 차이는 절대적이었다. 르펜바하는 자신이 질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검술 실력은 분명히 뛰어났다. 하지만 힘이 약했다. 만약 실전이었더라면 모를까 대련에서라면 자신이 이길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지 않았는가. 쉽게 방심하는 자는 쉽게 무너지는 법이었다. 르펜바하가 스스로의 승리를 확신하며 힘으로 쯔르레이를 밀어붙이며 들어간 순간이었다.


    쯔르레이가 왼손으로 르펜바하의 칼을 붙잡았다.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니었음에도 정확하게 르펜바하의 칼을 손으로 잡아 검로를 망치고는 오른손으로는 거대한 솜뭉치를 들어 왕자의  쪽을 찔러 들어갔다.


    ‘한손으로 저 칼을?!’

    분명 무게가 적은 가검이라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검이었다. 한손으로 저 거대한 검을 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심판을 보고 있던 호위 기사가 외쳤다.


    “그만!”

    호위기사의 말에 쯔르레이는 바로 검을 멈추었다. 그리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하지만… 칼을 손으로 잡다니… 실전이었다면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대련이니까요.”

    쯔르레이의 지적은 옳았다. 대련이었다. 아무런 규칙도 정하지 않은. 르펜바하 역시  납득했다. 쉽게 인정하기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르펜바하는 겸허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쯔르레이의 승리였다.

    르펜바하는 기분이 좋았다. 대련은 졌지만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쾌했다. 쯔르레이의 창의력 넘치는 그 검초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이 오갔다.


    대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전이었다면 다시는 손을 못쓰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검이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만약 손대중 얘기를 한 것이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면 쯔르레이의 진짜 실력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하지만 르펜바하는 몰랐다. 실전이었더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쯔르레이가 망설이지 않고 같은 행동을 취했을 거라는 것을.


    ‘생각보다 잘됐어….’


    쯔르레이는 르펜바하에게 인사하고 연무장을 떠났다. 르펜바하도 오래 연무장에 남아있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대련은 엘핀의 검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물론 엘핀이 검을 손으로 잡고 공격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적의 검을 흘려 검로를 꼬이게 하고 적을 공격하는 카운터 식의 검술이었다. 하지만 쯔르레이의 힘으로는 결코 사용할 수 없었으니 자신의 몸을 대신 응용한 방식이었다.

    엘핀과의 훈련은 의미가 없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곧 쯔르레이는 저주를 받은 휘리엘을 떠올렸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마 다시 훈련을 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엘핀의  분노에 찬 표정이 떠올랐다. 자신의 잘못이었으니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대련을 하고 좋아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쯔르레이의 예상은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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