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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51/162)



〈 51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대충 얘기가 끝나자 엘핀의 강습이 시작됐다. 엘핀은 말했다. 현실적으로 한정된 시간 안에 자신의 검술을 모두 가르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이거였다. 이론으로 엘핀의 검술을 전부 가르치고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엘핀이 빈 손으로 검로를 따라 그리는  쯔르레이는 눈으로 쫓으며 물었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뭔가 되는 것인가?”


“당연히 안되지. 무슨 멍청한 소리 하는 거야.”

“자네가 하자고 하지 않았나. 안되면 멍청한 건 자네 아닐까?”


“어차피 단시간에 검술을 익힌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되니까 일단 머리에 쑤셔박고 기억해두라는거야. 네가 나랑 헤어져도 연습할 수 있게. 검술이란 것이 단순히 자세만 안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엘핀의 얘기는 실로 지당했다. 쯔르레이는 자신 역시도 이 곳에 오래 있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핀의 방식은 쯔르레이가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다만 그건 쯔르레이가 생각한 것처럼 극적으로 강해지는 게 아니었을 뿐이다. 그저 철저한 기초를 쌓을 뿐인 것일 뿐.


“아니라면 부족한 게 아닌가.”


“그 부족한 건 네가 직접 채우는거다. 생하울라에게서는 어떻게 배웠지?”

“그 치는 가르치는 것 따위는 없었다. 그냥 하루종일 그 치랑 나랑 붙었고 그렇게 배웠지.”

“효과적인 방법이군. 나랑은 상극이지만.”


엘핀이 검로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네가 가르쳐달라고 해서 가르쳐주고는 있지만 내 검술이 너에게 맞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일단 당장 우린 나이 이전에 성별부터 다르고 가지고 있는 가능성조차 다르지.”


엘핀의 검술은 딱딱하고 정적이었지만 동시에 유려했다. 빈손으로 휘두르는 게 분명함에도 그 모습은 마치 실제로 검을 들고 있는  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기대하지 마라. 너에게 중요한 건 검술의 성취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지. 중요할 때 그 검에도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라.”


엘핀이 자세를 멈췄다.

“돌려줘야겠군. 그 검.”


“정말이냐?!”

“그래, 그 검을 사용해서 훈련을 하거나 그런  힘들겠지만… 네 나름대로 틀은 잡아둬야 할 테니까. 가방도 돌려주도록 하지.”

쯔르레이는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쯔르레이가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압수당한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자기 돌려받았다. 쯔르레이는 물건만 받는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도망칠  있었다.


“내가 도망칠거라는 생각은 안하나?”

“이제 와서?”

엘핀이 코웃음쳤다. 확실히 그러했다. 이제와서 떠나기에 쯔르레이에게는 쌓아둔 게 너무 많았다. 당장 엘핀이 검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용에 대한 정보를 찾으러 도서관에도 들르고 있었고 공주에게 연회를 간다고 약속까지 해버렸다.

아직, 떠나기엔 이른 때였다.


“그런가, 아무튼 고맙게 받도록 하지. 원래 내 물건들이지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가져오도록 하지.”

“어디에 있는데?”


“아가씨 방에.”


“나도 같이 가도록 하지.”

쯔르레이가 엘핀을 따라 일어섰다. 아직 공주와 있었을 때 입은 드레스 차림이었지만 쯔르레이도 이제 와서는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게 익숙해졌다. 엘핀이 휘리엘의 방에 도착해 노크를 했다.

“아가씨, 엘핀입니다.”

그러나 휘리엘은 노크에 응하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걸까. 엘핀이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옆에서 방문을 지키던 기사에게 물었다.

“어이, 아가씨께서 어디 나가지 않은 건 확실하겠지?”


“네, 네,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들은 즉슨 엘핀은 몸을 부딪혀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엘핀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자 방 안에는 창백한 안색으로 바닥에 쓰러진 휘리엘이 있었다.

“휘리엘!”

엘핀은 경어조차 잊은 채 휘리엘을 불렀다. 하지만 휘리엘은 일어나지 않았다. 엘핀은 당장 휘리엘을 등에 업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렸다. 쯔르레이는 엘핀이 사라진 방향을 곧바로 쫓아갔다. 마법사들의 방이 있는 곳이었다.

~

“…아가씨의 용태는 어떻지?”

“미안…  실력으론 무리야. 이건 저주야. 휘리오비치의 저주. 제놈씨가 오지 않으면 나로써는 불가능해. 어쩌면 제놈씨가 오더라도 힘들지도 모르고.”

“어떤 저주지?”

“…약체화의 저주야. 하지만 효과가 더 지독해. 갈 수록 강해지고 있어. 제놈씨가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면 아마….”


뒷 얘기는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엘핀이 주먹을 벽에 질렀다. 벽에는 엘핀의 주먹 모양대로 자국이 남았고 순간적으로 방이 살짝 흔들렸다.

“제길….”

“저주의 매개체는 아마….”


이 역시도 뒷말은 필요없었다. 말을 줄였다는 것만으로 엘핀은 핍셀이 하지 않은 뒷이야기를 알 수 있었다. 조용히 앉아서 휘리엘을 보던 쯔르레이를 향해 엘핀이 시선을 보냈다. 분노와 원망, 그리고 자책감이 섞인 질척질척한 시선이었다.

“내 탓…이군.”


“젠장, 닥치고 있어.”


“미안하다.”

“닥치랬지.”


쯔르레이는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쯔르레이로 인해 생긴 문제였다. 분명 휘리오비치의 함정이었지만 휘리엘이 쯔르레이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쯔르레이가 아니었다면 휘리엘은 이미 죽었겠지만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엘핀과 쯔르레이, 둘 모두에게 쉽지 않았다.


엘핀이 주먹을  쥔 채 병실을 떠났다. 제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혹은 돌아오더라도 휘리엘이 죽을 수 있다는 걸 그대로 지켜보고 있으란 건 엘핀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엘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너무 신경쓰지마세요, 쯔르레이양. 쯔르레이양의 탓이 아니에요.”

핍셀이 쯔르레이를 위로해주었지만 아쉽게도 쯔르레이에게는 닿지 않았다. 쯔르레이는 자신의 탓으로 인해 서리 갈기 부족이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몰랐던 상황을 떠올렸다.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자신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것은 같았다. 쯔르레이는 다시금 무력감을 느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변한게 없었다. 변한  이 웃기지도 않는 꼬라지에 익숙해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여자애인  하는 우스꽝스러운 연극으로 해결 될 상황이 아니었다.

제놈이 돌아오면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 심지어 만약 그가 돌아온다고 할지라도 저주를 치료하지 못하면? 그는 자신의 저주 또한 풀지 못하지 않았던가….


쯔르레이 또한 병실에서 발을 돌렸다. 휘리엘을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쯔르레이는 휘리엘의 방에 들려 솜뭉치와 가방을 찾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번 다시 같은 결과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쯔르레이는 지금 이대로 도망친다는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자신의 저주 또한 풀어야 했으니 제놈을 기다리는 것이 맞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러 연무장에 나왔다. 이미 밤은 어두웠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쯔르레이가 혼자서 솜뭉치를 들고 서있었을 뿐이다.

“오랜만이구나. 이러기도.”


쯔르레이는 가볍게 솜뭉치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검은 그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검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핀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올바른 검로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걸 검토해줄 엘핀은 이 자리에 없었으니.


“거기 누구냐?”


그러던 중이었다. 누군가 쯔르레이를 향해 소리쳤다. 정신이 혼란스럽다고 기척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한 것인가. 쯔르레이는 검을 자신의 뒤로 해 숨겼지만 그  검이 쯔르레이의 뒤로 한다고 숨겨질리 없었다.


“너는….”

연무장의 끝에서 쯔르레이를 향해 오는 사람의 정체는 바로 왕자 르펜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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