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쯔르레이는 생각을 달리 하기로 마음 먹었다. 동화책에서 정보를 못찾은 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다른 책은? 쯔르레이의 글을 읽는 능력이 문제일 뿐, 정보는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이곳은 왕궁이고 왕궁의 도서관이라면 책은 넘치듯이 있을 테니까.
쯔르레이는 훈련하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동화책을 읽는 정도로는 부족했다. 제대로 된 문서를 읽을 정도는 되어야 했다. 엘핀에게 읽는 걸 도와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 정도는 해야 그것도 되는 것이다. 모든 걸 엘핀에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쯔르레이의 일상은 결국 훈련과 공부, 그리고 공주와 보내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르베니와 보낼 때만큼은 쯔르레이도 괜한 힘을 들이지 않고 마음 편히 쉬기로 했다. 가끔 르베니가 쯔르레이를 인형놀이하듯 옷이나 장신구를 갈아입히려 들었지만 그것만큼은 완강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정말 잘어울릴거 같은데….”
“저는 평민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이런 일에 익숙해지면 버릇이 나빠져요.”
“그 생각은 정말 변함이 없는 건가요? 세이피어스경의 동생으로 남는다면 평생을 힘들이지 않고 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가 바라는 삶이 아니에요. 오라버니와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어요.”
“투르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평민의 삶이란 어떤 걸까나…?”
르베니는 꽤나 어른스러웠다. 다른 일반적인 귀족이었다면 쯔르레이가 평민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뭐라 했을 것이다. 르베니 역시 그것을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쯔르레이의 선택은 존중해주었니.
“거기 그 책 좀 주시겠어요?”
“여깄어요. 투르. 조사하는게 참 신기하네요.”
쯔르레이와 르베니는 현재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보고 있었다. 르베니 덕분에 쯔르레이는 원하는 자료들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도서관의 사서가 르베니의 말 한 마디에 수많은 책들을 바로 찾아 바친 것이다. 물론 그 책들은 전부 울푸레나 네메시스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들이었다.
“찾고 있다는 게 용과 관련되있는 건가요?”
“자세히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네, 맞아요.”
르베니는 수고스럽게도 쯔르레이의 부탁을 들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단적으로 책을 찾은 후에 책을 읽는 것을 도와준 것이다. 용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대부분 전설이나 설화로 남아있었고 쓸만한 자료는 없었다.
“용들은 이미 아주 오래 전 과거에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해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 정도로 강한 생물들이었다니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죠.”
“잘 알고 계시네요.”
“이래뵈도 독서가 취미랍니다. 그건 읽을 만해요?”
쯔르레이가 아까부터 계속 해독하듯이 읽고 있는 책을 가리키면 르베니가 물었다.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쯔르레이는 대답했다.
“동화책 정도 이야기라서… 어렵진 않아요.”
“하지만 용이란 건 정말 어렵네요… 아, 여기 빙룡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네요.”
“…음, 읽어주세요.”
“노래하는 방랑자여, 방황하는 봉인들의 주인, 비극을 박제하는 여인이여. 지옥은 여기에 있나니. 그녀는 가장 강력한 복수자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한다. 시간이 얼어붙은 동굴 속에 빙룡이 울고 있다. 그녀의 눈물은 세상에서 가장 덧없는 보석이라니.”
“여전히 뜬 구름 잡는 소리만 있네요.”
지금까지 찾은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비슷한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제놈 그라시아가 준 문서보다 쓸만한 정보는 찾을 수 없는 듯 하다.
“그러고보니… 전에 준 동화책은 다 읽었나요?”
“황금 종달새요… 네, 다 읽었어요.”
“그 책에도 용이 나오죠. 사실 그 책에는 뒷 이야기가 있답니다.”
어차피 쯔르레이는 이미 그 동화책에 대해서 흥미를 잃었기 때문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르베니가 즐거워하는 거 같아보였기에 관심 있는 척 울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동화의 끝에서 종달새는 도망쳐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 그게 아니에요.”
“헤에….”
“가짜를 만들기 위해 깃털을 모두 뽑아버린 종달새는 초라한 모습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그걸 견디지 못한 종달새는 울푸레에게 간다는 이야기에요. 울푸레에게 간 뒤 종달새가 어떻게 된지는 전해지지 않지만요.”
불쾌한 이야기라고 쯔르레이는 생각했다. 결국 종달새는 깃털도 잃고 사랑도 잃고 죽으러 간다는 이야기나 다름 없지 않은가. 흑룡을 속인 종달새를, 울푸레는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그러도록 해요. 아 참, 쯔르레이는 연회에 참석하실 건가요?”
“연회요?”
“곧 추수제니까요. 그에 따라 왕궁에서도 큰 연회를 열어요. 아마 세이피어스 경과 울펜슈타인 영애도 참가할테고요.”
“저는….”
거절하려는 쯔르레이의 손을 르베니가 양손을 붙잡고 말했다.
“혹시라도 오지 않을 생각이라면, 저를 봐서라도 참석해주시면 안될까요?”
“네?”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럼 안될까요?”
공주는 딱히 권위를 세어 명령하지도, 무언가 특별한 이유를 대어 쯔르레이를 설득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탁해왔다. 문제가 있다면 쯔르레이는 부탁하는 것에 약했다. 지금까지 이 소녀와 지내면서 이 소녀가 얼마나 외로워했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단순히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 말에 쯔르레이는 감히 거절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 알았어요.”
“야호! 고마워요! 투르. 내가 이번엔 정말로 예쁘게 해드릴게요.”
그 후에서야 쯔르레이는 자신이 르베니의 함정에 빠진 걸 깨달았지만 이미 되돌릴 수는 없었다.
쯔르레이가 방으로 돌아가자 그 곳엔 엘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핀은 쯔르레이의 훈련이 어느정도 진행되자 그 후로 계속해서 쯔르레이의 방에서 강습을 해주고 있었다. 이론 수업이었다. 쯔르레이의 방은 딱히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자세를 펼치는 정도는 상관없었다.
“왔냐.”
“그래. 이번에 연회가 있다고 하던데.”
“아, 그래. 그거 어차피 너는 참가 안할거니까 얘기 안해뒀지. 그 시간에 연습이나 해라.”
“참가하기로 했다.”
“뭐?”
“공주가 부탁해서….”
엘핀의 표정이 적당히 짜게 식었다.
“그럼 어쩔 수 없나. 너 근데 예법 같은 건 하나도 모르잖아.”
쯔르레이의 얼굴도 식었다.
“예법?”
“예법. 모르고 가면 엄청 욕 먹을 걸. 기본은 해둬야 된다.”
“그건 어떻게….”
“아가씨한테 부탁해야지, 별 수 있나.”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다. 안그래도 글 공부에 문서 탐독에 훈련까지 시간이 없었는데. 쯔르레이는 최근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 중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제 거기에 하나가 더 얹혀질 상황이었다. 불평할 수도 없었다. 이건 자업자득이었으니.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휘리엘이 쯔르레이의 도움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미안해요, 쯔르레이양. 하지만 저도 시간이 없어서….”
휘리엘도 마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여러 귀족가와 만남을 하며 사교활동을 하기도 하고 약혼자와 만나서 연애도 하고 있는 듯 했다. 휘리오비치에 관한 일 때문에 본국에 돌아가지 못해 생기는 업무도 따로 있는 듯 하다. 쯔르레이가 방해하기에도 미안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따로 도와줄 사람을 구할 수도 있긴 하지만… 잠깐.”
그러던 중 엘핀이 묘수를 냈다.
“너 드레스 입는 거 싫지.”
“그걸 이제 알았다면 네 두 눈은….”
“아니, 됐고 너 드레스 입는 거 싫어하잖아. 드레스 입지 말고 남자애 옷 입고 가자.”
“남자… 옷?”
“예법, 나한테 배우면 되지. 춤추는 것도.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남자 예법 밖에 없으니까. 남장하고 들어가. 안그래도 너 싫어하는 거 억지로 가는 거니까. 가끔 어린 영애 중에는 그렇게 하고 가는 경우도 있어. 이 곳…은 잘모르겠지만 간티아에서는 그래. 내 동생이니까 간티아 식으로 했다고 하면 상관 없고.”
“그거 좋은데.”
쯔르레이는 진심으로 반겼다. 드레스를 억지로 입는 것 때문에 쯔르레이의 정신은 사실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지만 왕궁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합법적으로 남자 옷을 입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