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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9/162)


  • 〈 49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르베니는 그대로 쯔르레이를 끌고 여러 가지 장소를 다녔다. 정원을 지나서 왕족들의 초상화가 모여있는 방이나 왕족들이 사용하는 식당, 자신의 방 등이였다. 마지막으로 르베니가 데려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간다는 소리를 하자 쯔르레이가 살짝 당황했다. 그런 모습을 본 르베니가 물었다.

    “투르는 책은 싫어하시나요?”


    “…저 글을 잘 읽지 못해서.”


    “어머, 제가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투르는 그럴 수도 있죠.”

    “도, 동화책 같은 것 정도는 읽을  있어요.”

    이 나이에 동화책을 읽는다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르베니의 호의를 거절하고 싶지 않았기에 쯔르레이는 순순히 밝혔다. 르베니 역시 얼굴이 환해지면서 말했다.

    “저도 동화책 좋아해요. 최근에 읽은 건 ‘로스릭 성의 다섯 기사’에요. 투르도 읽어봤나요?”

    “제가 읽어본  ‘용을 쫓는 기사 루이스’였어요. 다른  ‘팔란의 일곱 드래곤’이라던가….”

    “용이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하나봐요? 그런 동화책들도 많이 있어요!”


    물론 쯔르레이는 용을 좋아해서 그런 동화책을 고른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어떤 단서가 있진 않을까 해서 찾아본 것들이었다. 당연히 결과는 꽝이었지만.

    르베니의 손에 이끌려 간 도서관은 정말로 많은 책들이 있었다. 압도적인 규모에 살짝 쯔르레이는 기가 질렸으나 곧 아기자기하게 준비된 동화책 코너에 가자 그런 느낌은 옅어졌다. 르베니는 곧 몇 권의 동화책을 꺼내들어 쯔르레이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로스릭 성의 다섯 기사’에요. 이건 ‘황금 종달새’고요.”

    “종달새요?”


    “왜 그러시나요?”


    “아뇨, 그냥  이름 뜻이 종달새라고 해서…. 갑자기 생각났어요.”

    “그렇게 들으니 무척 예쁜 이름이네요.”

    르베니의 눈에는 쯔르레이가 분명 귀엽고 예쁜 여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게 분명했다. 둘은 곧 책을 들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런데 도서관 입구에서 뜻밖의 인물과 마주쳤다.


    “르베니.”


    “어머, 오라버니.”

    왕자 르펜바하였다. 르펜바하는 르베니와 쯔르레이를 쑥 훑어보더니 물었다.

    “…잘 보내고 있나?”


    “그럼요, 물론이지요.”

    “다행이야.”

    반대로 쯔르레이 역시 왕자와 공주를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둘이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긴장한 상태라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는데 르펜바하의 외모는 상당해서 옷을 보지 않으면 여자라고 오해할 정도였다. 어쩐지 느껴지는 동질감에 쯔르레이는 르펜바하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훈련이 줄었다고 들었는데… 내가 말한게 효과가 있었나.”


    그 말에 쯔르레이는 잠시 잊고 있었던 엘핀의 얘기가 생각났다. 쯔르레이가 말했다.

    “저기 그,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뭐지?”

    “저희 오, 오라버니에 대한 얘기인데….”


    르펜바하는 오라버니라는 얘기가 나오자마자 살짝 화가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치가 무슨 짓을 했나?”


    “아뇨, 그런게 아니에요. 저희 오라버니 소문이 좀 나쁘게 난 거 같아서…. 그,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엘핀은. 그냥 좀 알아주셨으면 해서.”

    “하지만 전에는….”


    “성격이 나쁜  사실이라, 좀 골탕 먹이고 싶은 마음에 과장한거에요. 죄송합니다.”


    물론 그 때 한 얘기는 모두 과장한 것이 아니었지만 엘핀의 명예를 위해서 쯔르레이는 스스로를 희생해주기로 정했다.


    “정말 사실인가? 협박 당하고 있는 건….”

    하지만 아무래도 르펜바하에게 엘핀은 정말 제대로 된 파렴치한으로 이미지가 잡힌  쉽게 오해가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에요. 정말로.”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알았다. 알아두도록 하지.”

    쯔르레이의 말에 르펜바하는 납득했지만 역시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저희는 이제 제 방으로 갈 거에요. 오라버니는 무슨 일로?”


    “잠시 찾아볼 책이 있어서.”

    “저흰 가볼게요. 그럼.”

    “아, 안녕히 계세요.”

    쯔르레이가 꾸벅하고 인사했다. 고개를 숙였기에 왕자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르베니의 방으로 돌아간 둘은 르베니가 가져온 동화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르베니는 갑자기 생긴 여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것이 즐거운 모양인지 유치한 내용의 동화에도 즐거운 모습이었다. 실제로 둘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 만큼은 사이좋은 자매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르베니가 로스릭 성의 다섯 기사를 모두 읽어주고 나서 다음 책인 황금 종달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낭랑하게 동화책을 읽어주는 르베니의 목소리에 담긴 동화책의 내용에 쯔르레이는 곧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종달새는 구애를 받았습니다. 구애의 상대는 바로 악명 높기로 소문난 검은  울푸레였습니다.”


    동화책 속에서 들려온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자신의 원수의 이름이었다.

    “울푸레가 말했습니다. ‘사랑스러운 종달새야, 너의 황금색 깃털이 나의 검은 비늘과 참으로 어울리는 구나.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종달새는 울었습… 괜찮아요, 투르? 얼굴이 창백해요.”

    동화책을 읽던 르베니가 곧 쯔르레이의 표정을 보고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쯔르레이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아뇨, 그냥 좀 졸려서 그랬어요. 저, 이만 돌아가볼게요.”

    “아,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아놨네요. 그래요.”

    “저기 괜찮으면 이 책… 빌려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지요. 얼마든지 그래도 되요.”

    다행히 르베니는 흔쾌히 동화책을 빌려주었다. 르베니는 방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을 불러 쯔르레이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잘가요, 투르! 다음 날에 봐요!”

    “안녕히 계세요. 르베니님.”

    그러나 인사를 하는 쯔르레이의 속마음에는 동화책에 대한 생각 밖에 없었다. 한낱 동화책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울푸레에 대한 단서를 얻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의 뜻은 종달새였다. 생하울라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혹시 생하울라는 이 동화책을 알고 이런 이름을 지어준 걸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 이름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무언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간 쯔르레이는 곧장 동화책을 펼쳐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어려운 단어는 없었다. 무난하게 쯔르레이는 동화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동화책의 내용은 이러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종달새가 검은 용 울푸레의 구애를 받고 슬퍼한다. 종달새의 친구들은 기책을 발휘해 종달새의 깃털을 모아 가짜 종달새를 울푸레에게 보내고  사이에 종달새는 도망친다. 울푸레는 종달새의 노랫소리를 들으려 이런저런 선물을 주지만 가짜이기에 아무런 노래도 하지 못한다. 울푸레는 절망하고 도망친 종달새는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 세 번을 거쳐 다시 읽어봤지만 내용은 모두 이게 끝이었다. 단서 같은  찾을 수 없었다. 쯔르레이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동화책에서 단서를 기대한 것이 어리석은 이야기였나. 동화는 그저 동화일 뿐이었다.


    기대와 우려, 그리고 불안이 모두 차게 식자 쯔르레이는 침대에 엎어져버렸다. 오늘 하루는 어린애와 놀아주는 일을 생각했는데 오히려 르베니가 놀아준 것이 된 모양새였다. 자신의 모습이 이렇기에 어쩔 수 없다지만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생하울라가 자신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놀렸을지.

    쯔르레이는 자신의 머리칼을 만지며 생각했다. ‘황금 종달새’… 자신의 머리카락도 황금색이었다.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문득 거울을 보자 좀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어?”


    순간 쯔르레이는 이 몸이 자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깨까지 내려오던 금발머리가 지금은 그 밑을 향해온 것이다. 이건 저주로 인해 장시간 돌아가지 못해서 생긴 일일까? 의문이 쯔르레이를 감쌌다.


    그러나 곧 이내 털어버렸다. 머리카락이 자라든 자라지 않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였다. 무언가 저주의 정체에 대한 힌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적어도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쯔르레이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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