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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8/162)



〈 48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다음날 쯔르레이는 곧장 일어나서 준비했다. 오늘은 티타임의 날이다. 꼼짝없이 공주에게 붙잡혀서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날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까지 빨리 갈 필요는 당연히 없었다. 아마 공주는 지금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쯔르레이는 지금 제놈 그라시아를 찾아 갈 생각이었다.

지금 당장 저주를 풀지는 않을 생각이라 해도 그가 저주를 풀 수 있는지 정도는 확인해둬야 했다. 그러나 쯔르레이는 제놈을 만날 수 없었다. 그의 방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것은 핍셀이었다.


“아, 쯔르레이양? 이런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혹시 나를 보고 싶어서 왔다던가? 후후.”

“그라시아씨를 만나러 왔는데.”


“아, 제놈이요? 제놈씨 지금 여기 없는데….”

“없다고요?”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는다고 새벽 같이 나가셨어요. 볼일이 있었나 봐요?”


낭패였다. 당장에 저주를 풀 수는 없으니까 급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처 확인을 못한게 찜찜했다. 쯔르레이는 순간 핍셀을 보고 생각했다. 마법사라면 자기 앞에도 한 명 있지 않은가.

“혹시 핍셀씨는 저주를  수 있나요?”


“아, 저주라면…. 미안해요. 사실 엘핀이 쯔르레이양을 데려왔을 때 처음 바로 살펴봤는데 제 실력으론 무리에요. 아무리 그래도 휘리오비치 역시 대마법사니까요.”

음, 그건 오히려 다행이었다. 만약 핍셀이 실력이 있어서 저주를   있어, 그  멋대로 저주를 풀어버렸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수 없었다.

“괜찮아요. 그럼 전 가볼게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요. 잘가요.”


다행히 핍셀은 수다를 떨지 않고 그대로 쯔르레이를 보내주었다. 미안함 때문인걸까. 덕분에 편히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

호로록

차를 마시는 소리가 입안에서 울려퍼진다. 쯔르레이는 차에 대해서 잘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단 맛이 나는 고급스러운 차가 훌륭하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공주와 계속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고역이었지만 같이 나오는  디저트들만큼은 만족스러웠다.


쯔르레이는 돌아가서 제놈이 건네준 문서를 읽으며 씨름하다가 메이드들의 난입에 시간을 깨달았다. 투박하게 훈련복을 입고 잠들었던 쯔르레이가 아가씨로 변할 시간이었다. 훈련을 하는 동안 정말 기본적인 도움만을 받았기에 이렇게 중무장하게 되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인형놀이 하듯이 갈아입혀지는 일은 없었다. 공주 쪽에서 직접 갈아입을 드레스를 보내준 것이다. 연분홍색의 어린애 취향임이 분명한 드레스는 쯔르레이 입장에서는 악취미 같았지만 실로 놀라울 정도로 잘어울렸다.


그러나 이정도쯤 되면 쯔르레이도 익숙해졌다.  정도로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미숙하지 않은 것이다. 결코 여자아이 차림에 익숙해지는게 좋을 것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메이드들의 칭찬을 뒤로 하고 쯔르레이는 티타임에 들어갔다.

“투르는 과자를 좋아하나봐요?”


공주 르베니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과자를 좋아해서 애처럼 보인걸까. 그렇지만  몸이 되고 나서 단 맛을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쯔르레이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저도 과자 좋아해요! 오라버니는 매번 너무 많이 먹는다고 잔소리하지만요. 투르의 오라버니는 어때요.”


“그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저기… 르베니님.”

“네? 뭔가요, 투르.”


쯔르레이는 고민하고 있던 걸 풀기로 했다. 엘핀에 관한 이야기였다.

“왕자전하께서 오, 오라버니에게 파렴치한이라는 소리를 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좀 꽉막힌 데가 있거든요.”

“그, 제가 말이  심했나 해서…. 오라버니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짓궂어서 그렇지.”


처음에야 웃었지만 엘핀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보면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일단 소문의 근원에게서 오해를 좀 풀어줘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때도 쯔르레이는 엘핀을 싫어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미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자신이 일으킨 일이니 책임을 지고 싶었다.


“왕자전하께 전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오라버니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요.”

“걱정말아요. 꼭 전해줄게요.”

티타임은 생각보다 꽤나 잘진행되었다. 대부분 르베니가 말하고 쯔르레이는 그저 말을 들어줄 뿐이었지만 르베니는 그래도 좋은 듯 했다.

티타임이 끝나자 르베니는 쯔르레이를 끌고 왕궁을 돌아다녔다. 처음 데려간 곳은 정원이었다. 정원은 계절에 맞지 않는 여러 꽃들이 아름답게 수를 놓고 있었다. 자연에서라면 한 곳에서 결코 볼 수 없는 꽃들이 모여 자라는 모습은 부자연스러워 쯔르레이에게는 맘에 들지 않았지만 아름답다는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이쁘네요.”


“그렇죠? 어머니께서 고생하셨어요. 마법사들을 닦달해서 이렇게 멋진 정원을 만드느라고요. 저희 왕궁의 자랑이랍니다.”


둘은 같이 정원을 산책했다. 이렇게 꽃을 바라보며 천천히 시간을 떼운 적이 없던 쯔르레이에게는 꽤나 낯선 경험이었다.

“여기  샐비어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정말이네요.”


꽃밭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쯔르레이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르베니였다. 아직 어린 아이였지만 그 미모가 출중해 꽃밭에서 같이 걷고 있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쯔르레이가 모르는 것은 그 그림에 자신도 같이 끼어있다는 사실 뿐이었고.


그렇게 산책을 하던 도중 쯔르레이의 기척에 사람이 들어왔다. 누군가 정원에 있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의 기척인 걸 보면 아마 정원을 구경하고 있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쯔르레이는 그냥 신경을 껐지만 곧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어머, 공주전하. 별일이시어요. 산책을 다하시고.”

“루벤트 후작 영애….”


붉은색 머리를 땋아올려 마치 샐비어 같은 인상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여자를 보자 르베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긴 어쩐 일로?”

“어쩐 일이라뇨. 왕궁의 정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걸요. 오랜만에 꽃밭을 보고 싶어서 산책을 나왔답니다.”


‘거짓말’

르베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여자가 그런 미지근한 이유로 나왔을리도 없고 우연으로 이렇게 마주칠리도 없었다.


“옆에 계신 그 아가씨는 누구신가요? 저한테도 소개시켜주실 수 있나요, 공주전하?”

여자의 말투에는 가시가 있었다. 쯔르레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르베니가 망설이다 말했다.

“이쪽은… 쯔르레이양입니다. 엘핀 경의 여동생인.”

“쯔르레이 세이피어스라고 합니다.”

“어머나 그… 평민 출신이라는?”


여자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비웃음이 배어나왔다. 르베니의 표정이 안좋아졌다.


“역시 천한 출신은 숨길 수가 없군요. 이렇게 비슷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다니….”


“그만 가요, 투르.”

르베니가 쯔르레이의 손을 잡고 정원을 나섰다. 빠른 걸음이었다. 르베니의 기분이 확실히 나빠지고 있었다. 쯔르레이는 꽉 잡힌 손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요, 투르. 못볼 꼴을 보였네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쯔르레이가 머뭇대다가 물었다. 방금 전 모욕을 받은 일 때문이었다.


“저런 일을 자주 겪으시나요?”


“한심하죠?”


르베니가 한숨을 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 어머니께서는 평민 출신이셨거든요. 그래서… 종종 이런 일이 생겨요. 그래도 어머니가 만드신 정원까지 와서 그럴 줄은 몰랐는데.”

“방금 그 여자는….”


“루벤트 살람 후작 영애에요. 유력한 왕자비 후보죠. 사실 궁에 소문이  난거 같거든요. 쯔르레이양에 대해서. 아무래도 후작 영애가 걱정이 되었나 보죠.”


“무슨 걱정이요?”

“오라버니가 쯔르레이양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요.”

쯔르레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소문까지 났을 줄은 몰랐다.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 그건 헛소문이에요.”

“후후, 그럴까요?”


르베니의 얼굴이 살짝 풀렸다. 그러나 이내  다시 찌푸린 표정이 되었다. 쯔르레이가 물었다.

“왕자전하께 얘기는 해보셨나요?”


“뭘요? 이걸요? 어떻게 얘기하겠어요. 이런 부끄러운 일.”

“하지만….”


“오라버니는 바빠요. 이런 일로 괜히 신경쓰이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르베니는 웃었다. 다시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일로 괜히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다음 장소로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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