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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47/162)


  • 〈 47화 〉늑대 걸음을 굽히지 말아라

    방으로 돌아온 쯔르레이를 반긴 건 엘핀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구만.”

    “너는 할 일이 없나?”

    “없다, 없어. 휘리오비치 녀석을 찾는 건 전적으로 마법사들한테 맡겨뒀으니까. 그나저나 갔던 일은 잘해결됐나?”

    “그럭저럭.”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해도 된다.”

    엘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분명 아까는 엄청 궁금해하던 듯한 느낌이었는데, 쿨하게 듣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아까랑은 반응이 다르군.”


    “네가 정 싫다면 어쩔 수 없는거니까. 우리 아가씨한테 해가 되는 일만 아니면 된다고.  굳이 말해주겠다면 들어는 주겠지만 말이야.”

    “건방져.”

    …그렇지만 꽤나 마음이 동한 것은 사실이었다. 쯔르레이가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나는 저주에 걸려있다.”

    “그래, 알고 있어.”

    “그 저주가 아니다. 휘리오비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용에 대한 것이다.”


    “용…?”


    반쯤 태도를 대충하고 있던 엘핀이  말에 곧바로 표정을 달리했다. 쯔르레이의 진지한 표정에 그는 무슨 헛소리냐고 말하려던 걸 집어넣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그래, 용. 나는 용의 저주를 받았다.”

    “사실…이냐고 물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 군.”


    “자세한 건 얘기할 수 없지만, 나는 고향에서 용의 저주를 받았고 그 후로 지금까지 그 저주를  단서를 찾기 위해 떠돌고 있었다. 만약 휘리오비치에게 저주를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다른 곳에 가있었겠지.”


    “믿기 힘든 이야기로군. 아니, 믿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네가 받은 저주는 대체 어떤 저주인거지?”


    쯔르레이가 엘핀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


    엘핀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 덕분에 엘핀이 쯔르레이의 말을 믿고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가. 말하기 힘든 얘기였겠지. 이런 어린 나이에. 저주라니.”

    “지금까지 상황이 이래서 말 못했지만,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쯔르레이의 폭탄 발언에 엘핀이 터졌다.

    “뭐? 잠깐 그건 무슨 소리냐.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저주 때문이다. 자세한  말못하지만. 나는 서른이 넘었다.”


    엘핀은 당황했고, 동시에 황당했다. 쯔르레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무뚝뚝하고 영리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른이라니. 엘핀이 쯔르레이를 훑어보았다. 도저히 서른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 모습이었다.


    “…서른살 먹고 지금까지 그 꼴을 한거냐?”

    “이 일이 전부 네놈 때문이란  잊지 마라.”

    “고역이었겠군….”

    “덕분에.”

    “하하하!”

    별안간 엘핀이 박장대소했다.


    “뭐, 뭐냐?”


    “아니, 서른살 먹어놓고 10살 어린애마냥 지냈던 네 꼴이 웃겨서 그런다.”


    “이 자식이….”


    “쯔르레이.”

    엘핀이 웃음을 거두고 쯔르레이를 불렀다. 이것이 엘핀이 처음 쯔르레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검은 늑대 울펜슈타인은 언제나 맞서 싸우는 자에게 꿇은 무릎을 들어올린다. 태양이 지는 날에는 발톱을 드러내고, 달이 거두는 날에는 이빨을 보이지. 늑대의 기사로서 너에게 경의를 표한다.”

    “….”

    갑작스런 엘핀의 고아한 인사였다. 쯔르레이는 당황하여 반응조차 잊은  엘핀을 그저 바라보았다. 엘핀이 웃으며 말했다.

    “표정이 말이 아니군.”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처럼 들렸다면 아쉽군. 그러나 진심이다. 네게 경의를 표한다. 용의 저주를 받았다는 얘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아니, 이미 믿고 있기에 그러는 거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를 나는, 싫어하지 않는다.”


    쯔르레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태껏 매일 티격태격, 그런 귀여운 의성어 정도로는 주고 받을  없을 정도로 나쁜 사이라고 생각했던 엘핀이 자신에게 이런다는 건 꽤나 낯간지러웠다.


    “부끄럽기라도 한가? 얼굴이 빨개졌네.”


    “…피로 때문에 그런다.”

    “그래, 피로인가. 그런 거로 해두지, 그럼. 그나저나 그렇다면 그라시아는 뭐라고 하던가?”


    “너 말투가 은근슬쩍 바뀌었는데.”


    “서른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애한테 대하듯이 굴 수는 없지.”

    예상 외라고 생각 될 정도의 변화였다. 저주라는 사실을 밝힌 것만으로 엘핀은 쯔르레이를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낯간지러울 때로 부끄러워졌던 쯔르레이는 어색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어색하다. 원래 말투로 해도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다행히 엘핀은 쉽게 말을 바꿨다. 자신도 그다지 어울려하는  같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그라시아는 저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못알아냈다. 꽤나 분해하더군.”

    “잠깐, 그럼 네 약체화의 저주는? 그건 풀어주었나?”


    “어…?”

    쯔르레이는 순간 진심으로 당황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런 저주. 아니, 잊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의 저주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걸 얘기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너, 설마….”


    “….”

    “솔직히 말해봐라, 꼬맹이. 서른 살이라는 거 거짓말이지.”


    “입 닥쳐.”

    쯔르레이는 곧바로 다음에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제놈에게 돌아가 얘기 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웃기지도 않은 실수였다. 바보 같으니.

    “약체화의 저주가 풀리면 곧바로 이딴  나갈 거니까.”


    “그 머리로 나갔다가는 어디 곧바로 납치당해서 팔려나갈거다.”

    “닥쳐.”

    “설사 저주가 풀렸다고 하더라도 금방 나가는 건 별로 추천하지 못하겠다는 건 사실이다. 휘리오비치가 널 노리고 있을 테니까.”


    물론 쯔르레이는 당장에 저주를 풀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휘리오비치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마당에 왕궁을 나가서 목적지에 도달하기란 꽤나 힘든 선택이었고 약체화의 저주가 풀리면 자신이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에 이 곳에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원래 모습이 그리웠으나 어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라시아가 저주를 풀 수 있을지 없을지는 확실히 알아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훈련도 있고.”


    “아무튼, 그라시아가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용에 대한 정보는 주었다. 여기 이거.”

    “이건 지도랑… 빙룡…. 너에게 저주를 내린 용이 이 용이냐?”

    “아니, 내게 저주를 내린 건… 울푸레. 울푸레라는 이름의 흑룡이었다. 빙룡은 같은 용이니까 정보를 알지 않을까 해서 찾아가려는 거다.”

    “용을 찾으러 간다고? 미쳤냐?”

    “네가 말했을 텐데. 맞서 싸우는 자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그랬지만. 용이 네 이야기를 들어줄거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든데.”

    “그라시아가 용에 대한 정보를 줬어. 거기 써있을 거다. 읽어줄 수 있겠나?”


    “…빙룡 네메시스는 가장 강력한 봉인자이다. 인간에게 이름을 알린 용 중에서 특별히 자비로운 편에 속하는 네메시스는  죽이기 전에 말  마디 정도는 들어줄 것이다… 퍽도 자비롭구만. 참 쓸만한 정보야.”

    “더 없나?”


    “네메시스는 자신에게 대적하는 자들을 산 채로 봉인하여 수집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들은 네메시스의 충실한 수하가 되거나 혹은 장식품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자비로워 그대가 소속한 집단, 혹은 나라에게 까지 분노가 미칠 일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이 정보 영양가가 없는 거 같은데.”


    “계속 읽기나 해.”


    “그러나 네메시스는 가장 강력한 복수자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들고간 이야기가 그녀의 맘에 들면 네메시스는 흔쾌히 당신의 심장을 쥐고 당신의 복수를 대신해줄 것이다. 그러나 용의 마음에 들만한 이야기란 것이 어떤 것일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쓸모가 없는데 이거. 뒤에 얘기는 전부 증언이나 목격담 같은 것 정도다. 제대로  정보는 이 정도가 끝이야. 너 이런데도 정말로 갈 생각이냐?”

    “지금 갖고 있는 유일한 단서야. 방법이 없다.”

    “…네가 바란다면 내 동생으로 사는 길도 있다.”


    “뭐?”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냐는 거지. 그럼 나는 너에 대한 경의를 거둬들이겠지만, 그저 그 뿐인 일이다.”

    문득 쯔르레이는 자신이 생하울라에게 했던 실언이 생각났다. 가지 말까? 만약 자신이 그 상황에서 엘핀이 그런 말을 해줬더라면 자신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끔찍한 소리하네. 네 동생이라니 내가 오라버니하고 부른 게 그렇게 좋던가?”


    “진지한 얘기다. 목숨을 버리지 않는 길을 말한  뿐이다.”


    “됐어. 오늘은 고마웠다. 그만 돌아가.”


    쯔르레이가 티가 나게 거짓하품을 했다. 하암 하고 입을 다무는 소리에 엘핀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하품은 거짓이었지만 졸린 건 거짓이 아니었다. 쯔르레이는 피곤했다.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피로는 남아있었고 곧바로 쉬지도 못한 것이다. 옷을 벗고 대충 흙먼지를 털어넘긴 후에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침대가 더러워졌지만 씻고 잔다거나 하기에는 다시 일어나고 싶지나 않았다. 쯔르레이는 곧장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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